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을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 P730

나는 철학자로서, 이 세상이 혹 하나의 질서에 꿰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질서라는 말이 적당하지 않다면,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적어도 무슨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P731

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 사상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그 서책을 묻어 버리고 있구나. - P736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두 마디를 밝히기 위해 선지자들, 복음 전도자들, 교부들 고승 대덕들이 남긴 말에 지나지 못합니다. - P741

베르나르는 어떻게 하든 미켈레를 아비뇽으로 데려가려 할 게다. 미켈레의 아비뇽 도착 일자를, 소형제회 수도사를 지낸 이단자이며 살인자인 레미지오의 심판 일자와 맞추어 놓겠지.…………. 그래야 레미지오를 태우는 화형대의 불길이 화해의 횃불이 되어 미켈레와 교황이 만나는 자리를 비출 테니………. - P751

나는 하도 부끄러워 눈물을 떨구며 내 방으로 돌아와 밤새 울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더라면, 동료들과 멜크 수도원에서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사 무훈담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애통해 할 수 있었을 것을… - P753

노래에 빠져 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든 내 눈에, 언제 없었더냐는 듯이 다시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말라키아의 모습이 보인 것이었다. 나는 사부님을 보았다. 사부님 얼굴에도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수도원장의 얼굴에서도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호르헤는 다시 손을 내밀어 의자를 더듬다가 말라키아의 몸을 감촉하고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 P761

상자 속에 든 걸 보고 너무 기죽지 말아라. 나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도 거룩한 십자가 조각을 많이 보았다. 모두가 진짜라면 우리 주님은 통나무 두 개를 걸쳐 만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아주 널찍한 숲속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 - P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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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찾지 못했으니까 없다고 하는지도모른다. 우리가 찾지 못했던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 P680

이윽고 베르나르기가 그 길고 지루한 침묵을 깨뜨리고 공식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건성으로 한 다음 이런 말로 심문을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에 배석한 심판관들로서는 공히 용서하기 어려운 두 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된 자를 심문합니다. 두 가지 혐의 중 한 가지는, 피의자가 살인 사건의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만치 형제들이 익히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이미 그전에 이단적인 범죄 혐의로 수도원 경내에서 수배되고 있었습니다.’
레미지오는 쇠사슬에 묶인 손을 거북살스럽게 올려 얼굴을 감쌌다. - P687

각하께서는 지금 제가하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시키려고 하십니다. 저는, 각하께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가르쳐 주시면 그것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 P693

일이 시점에서 네 입으로부터 어떤 고백이 나와야 하는지는 나만이 안다. 그러니까 이실직고하라, 오로지 이실직고하라. 이실직고해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우리의 양심과 너그러움과 연민의 감정을 훼손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한시 바삐 끝내기 위해서라도 오직 이실직고하라! - P709

베르나르의 간계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그가 노리는 것은 누가 누구를 죽였느냐는 것이 아니라, 레미지오가 황제측을 대표하는 소형제회 교리에 어떻게 물들어 있느냐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 P710

‘정결함을 얻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성급함이다.‘ - P715

「보았지? 고문을 당하거나 고문의 위협을 당하면 사람이란 제가 하지 않은 짓은 물론이고 알지 못하는 짓 하려던 짓까지 했다고 하는 법이다. 레미지오는 지금 어떻게 하든지 죽기만을 소원한다.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이다.」 -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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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약소 안에 있는 세베리노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엾은 본초학자 세베리노는 머리를 얻어맞고 시체가 되어, 흥건한 피 위에 쓰러져 있었다. - P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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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수도원장이 추기경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교회가 큰 빚을 지고 있는 교단 수도원의 원장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기독교 교회가 베네딕트 교단에 빚을 지고 있다는 발언에 다른 교단 수도사들이 토를 달고 나선 것이다. - P631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했다. 사부님의 엄청난 박학의 시위에 모두가 넋을 잃은 것 같았다. - P655

교회는, 이단자를 색출했다고 여겨질 경우 이를 제왕에게 통고해야 합니다. 제왕에게는 제국의 신민에 관한 것이니 만치 이를 통고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왕은 이 이단자를 어떻게 처결해야 합니까? 제왕이 하느님 진리의 수호자가 아니면서도 하느님 이름으로 이를 처결해야 합니까? 당치 않습니다. 제왕은, 이단자의 행위가 국가의 안위를 위협했을 경우에만 이단자를 처결할 수 있고또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 P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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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 P588

「그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De te fabula narratur〉.」
그 책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상사병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600

특히 사랑이라는 병은 괴질(怪疾)이기는 하되 사랑 자체가 곧 치료의 수단이 된다는 이븐 하의 정의는 인상적이었다. 이븐 하즘에 따르면, 사랑이 괴질인 까닭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 P600

내눈에, 경호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얼굴이 눈의 흰자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살바토레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내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 생각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내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알아본 듯한 그 여자는 필사적인 애원이 묻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달려나가 여자를 구하고 싶었다. - P607

이 수도원 수도사의 안내를 받아 이자와 마녀를 독방에다 분리 감금하라. 수도사는 벽의 고리에다 단단히 묶어 두되 심문이 시작되면 언제든 끌어 내어 올 수 있도록 하라. 여자는, 정체가 분명해진 이상 화형대로 보내는 마녀 재판이 따로 열릴 터이다. 따라서 밤중에 끌어 내어 심문할 일은 없을것이다.
베르나르기는 끌려가는 살바토레에게, 진실을 말하고 공범을 대면 죽음을 면하는 길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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