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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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소매상, 유시민

시민이란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한창 대학생일 때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국회의원, 장관 등 정치인의 행보를 하면서 욕도 먹었지만 그만큼 뚜렷한 족적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는 '썰전'이라는 정치·시사 예능에서 어려운 시사를 쉽고 명확하게 풀어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풍부한 지식, 논리적이고 쉬운 설명,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정치관 때문에 많은 팬들은 유시민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미 절대로 정치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한 것을 보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화려한 사회·정치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시민은 '작가'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하여 방송 프로그램이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유시민 '작가'라고 소개를 받는다. 유시민은 청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도 바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렇게 지식을 쌓았는지 인문학적 소양이 굉장히 뛰어나다. 게다가 논리적인데다가 전달력도 정말 좋고, 이전에 보였던 거부감을 일으키는 날카로운 이미지까지 누그러져서 대중을 위한 강연에 최적화되었다. 일단 유시민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시사교양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시청률이 보장이 된다. 유시민 작가는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소매상 중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유시민(1959 ~ ) 대한민국의 작가, 전 16대, 17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이것은 '역사 서술의 역사'이다

처음 책의 제목인 <역사의 역사>를 봤을 때는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는데, 책의 컨셉이 정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책을 구매하기 전에 목차를 살펴 보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정체를 바로 파악할 수가 있다. <역사의 역사>는 멀리는 그리스 시대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헤로도토스로부터 가깝게는 <사피엔스>를 지은 유발 하라리까지, 역사가들이 기술해 놓은 역사책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목차만 읽는 것으로도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역사'는 무엇인가? '인간과 사회의 과거에 대해 문자 텍스트로 서술하는 내용과 방법이 변화해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역사책과 저자들이 역사를 쓰는 관점과 방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처음은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전통적인 역사기술 방식인 기전체를 고안해 낸 사마천의 <사기>, 그리고 이슬람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설>을 쓴 이븐 할둔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통 예상할 수 있는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이외에 이븐 할둔을 처음 세 개의 장에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시작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세 명의 사가를 설명한 후에는 작가는 순식간의 시간을 건너 뛰어 19세기로 넘어와 랑케로부터 토인비 등 명성만 익히 들어 본 사람들이 왜 유명하고 그들이 어째서 뛰어난 역사학자들인지 안내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은 <총·균·쇠>를 쓴 제레미 다이아몬드와 가장 최근에 <사피엔스>라는 책을 낸 유발 하라리까지를 다룬다.
시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역사의 역사>는 그 '방식'을 유기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시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역사의 역사>는 그 '방식'을 유기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쉽고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유시민은 <역사의 역사>에서 모두 열다섯 명의 역사서 저자와 그들의 책,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자가 워낙 인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각 역사서의 기본적인 배경, 역사 서술의 방향, 저자의 의도, 장점과 한계 등 해당 역사서에 대해 일반인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고도 넘칠만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열다섯 명의 책을 모두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반인이라면 <역사의 역사>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보통 수준은 넘어가는 역사서에 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개별 역사서를 다루고 있지만 책을 읽는 중에 역사 서술의 흐름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더욱 뛰어난 점이다. 한 장에서 한 권의 역사서를 설명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과 뒤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통사로서의 역사 서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흔한 다이제스트 방식으로 나열된 책들에 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신채호, 박은식, 백남운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로도 기억해 두는 것이 당연하다.

풍부한 지식을 쉽게 전달한다

<역사의 역사>는 정리하는 책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대단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 서술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그 배경이 되는 지식까지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았다. 우선 열다섯 명이 쓴 (두껍고 어려운) 책을 저자 나름대로 이해할만큼 충분히 읽고 소화해낸 것만 해도 내가 보기엔 대단하다. 더해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집필했던 만큼, 내용이 어려울 수는 있어도 문장이 조잡해서 읽기 짜증나는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역사의 역사>를 읽으면서는 국어실력이 모자라 좋은 지식을 허접한 그릇에 담아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유시민은 최고의 지식소매상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세 권의 책.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역사의 역사>를 읽고 보니 이 책들에 대한 느낌이 새롭게 다가온다. 조만간 다시 한 번 정독을 해야 할 것 같다.


정리의 힘, 읽을 책이 늘었다

이 책은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역덕들을 위한 책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깊이 들어가는 면이 있다. 역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여러 면에서 좀 애매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데, 저자에 대한 믿음으로 이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걸 보니 놀랍다. 굉장히 정리를 잘해 놓은 수험생의 노트를 빌려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현미로 지어 놓아서 좀 거칠겠지만 꼭고 씹어 보면 고소한 맛이 올라오고 건강에도 좋은 쌀밥같은 책이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그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독서가 끝나는 책이 있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독서욕을 자극해서 다른 책을 구매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 <역사의 역사>는 전형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소개된 책 중에서 1/3 정도는 읽은 것 같은데.. 읽을 책이 늘었다.


★★★★☆
랑케 이후 헌팅턴까지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시기 역사학자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 본 점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은 이 책에서 인용의 기준이 되는 책이 원서가 아니라 번역본이었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한 책을 보다 보면 반드시 원서를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언어까지 공부하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서를 읽은 것과 다름없는 좋은 번역본이 발간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원서를 인용하는 현학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당연히 추천한다.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반적인 역사지식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극 추천한다. 하지만 역사 자체(동서양사라든지, 인류사나 문명사)를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역사>에서 소개한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한 번쯤 서점에서 살펴 보고 고민한 후 구매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책읽는 습관이 없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아니다.

 


부록 <역사의 역사>에서 소개되어 있는 책 목록
<역사>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200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천병희 옮김, 숲, 2011
<사기>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1
<역사서설> 이븐 할둔 지음, 김호동 옮김, 까치, 2003
<무깟디마 1·2> 이븐 칼둔 지음, 소명출판, 김정아 옮김, 2012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레오폴트 폰 랑게 지음, 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1
<강대 세력들 · 정치 대담 · 자서전> 레오폴트 폰 랑게 지음, 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4
<공산당 선언> 독일어 원전 번역 인용
<조선상고사 / 한국통사> 신채호 · 박은식 지음, 윤재영 역해, 동서문화사, 2012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상) · (하)> 박은식 지음, 남만성 옮김, 서문당, 1999
<조선사회경제사> 백남운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9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까치, 2015
<역사의 연구 Ⅰ · Ⅱ> 아놀드 J. 토인비 지음,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서구의 몰락 1 · 2 · 3> 오스발트 A. G. 슈팽글러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5
<문명의 충돌>, 새무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김영사, 2016
<총, 균, 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2005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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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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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대한민국, 보수와 진보

2016년 말부터 2017년 전반기까지, 한국사회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미증유의 경험을 했다.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정치적 태풍은 대한민국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영향은 2018년 전반기가 하른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움을 생각해 보면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70-80%라는 이전의 대통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국정지지율을 누리며 놀라울만큼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많은 보수 인사들은 진보쪽으로 급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한탄하며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우리의 정치 지형이 진보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고 우리 시민들이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16년에서 2017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단지 비상식이 상식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사회의 의식이 전환된 것 같지 않다. '상식 vs. 비상식'의 대결에서 비상식이 종말을 맞고 이제 상식 안에서 '보수 vs. 진보'의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1년을 갓 지난 문재인 정부는 개혁적인 진보와 품격있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우측에 수구 세력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고, 그 왼쪽에 이제 막 커 나가려고 하는 진보세력, 그리고 더 왼쪽에 극단적인 진보 세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크 릴라(1956 ~ ) 미국의 정치철학자.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교수.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에 대해 주로 연구하는 정치철학자.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체제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큰 지지를 받고 있지만, 거의 전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을 당시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미국의 주류 사회,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2016년 미국의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된 이후 진보주의자들의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 마크 릴라가 쓴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정체성 정치를 넘어 After Identity Politics>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체성 정치'이다. 정체성 정치는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해 그들의 이익과 관점을 대변하는 정치 (p.152)'를 말한다. 정체성 정치에서 대변하는 사람들은 주로 흑인, 여성, 성소수자이다. 각 나라마다 정체성 정치에 경도되어 있는 진보주의자들은 있을 것이고,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진보주의자라고 하면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세력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마크 릴라는 정체성 정치를 펼치는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의 오히려 진보의 정권획득을 방해하고 보수주의자들, 심지어는 트럼프같은 사람에게 정권을 넘기고 있다고 설명한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1946 ~ ). 미국의 45대 대통령. 2016년 공화당 후보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미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아웃사이더 대통령.


무엇이 문제인가?

아빠 문제. 진보주의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통령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낸다. 대선에서 이긴 후에는 다른 모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모든 요구사항이 다 관철된다면 이미 그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진보주의 세력은 대통령의 왼쪽에서 대통령을 끊임없이 저격한다.


X로서 말하는데.. 누군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여기에 X에는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갈 수 있고, B는 토론의 상대방이 X의 정체성에 대해 반대되는 주장을 넣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진보주의자와는 토론이 진행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채식주의자로서 말하는데, 네가 사람들은 반드시 육류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든지, '동성연애자로서 말하는데, 네가 동성연애자 때문에 에이즈가 퍼진다고 주장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대화는 끊어진다. 토론이 이뤄질 공간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위의 두가지 사례 외에도 책 속에는 여러가지 사례가 제시되어 있는데, 읽는 동안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화법과 태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마크 릴라는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있지만,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절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일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 놨더니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결정을 내려서 실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로서 절박하게 살고 있는데 다수의 편견에 의해 나의 삶이 폄하당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문재인(1953 ~ ).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 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탄핵으로 갑자기 치뤄진 대선에서 혼준표, 안철수 후보 등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적인으로는 중도진보~중도보수의 성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분열


마크 릴라가 지적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저런 태도는 진보주의자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사회구조가 원하는대로 변한다면 그 사회는 독재사회이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자신의 발언에 반대하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는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를 얻어낼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심하게 분열이 되어 거꾸로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은 남자에게 '넌 여자가 아니니 나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레즈비언은 '넌 여자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은 아니니 나를 이해하는 척 하지 마.'라고 얘기한다. 둘 다 평등을 얘기하고 있지만 또 느낌이 달라져 버린다. 남녀평등주의자는 성소수자로부터 왼쪽으로부터 또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분열이 되고 사회적 연대를 위한 공감대가 파괴되어 버리면 진보에게 남는건  패배뿐이다.


평범한 민주 정치란 '자기 자신과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득하는 일을 의미한다 (p.116)'고 마크 릴라는 말한다.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민주 정치를 외면하면서 높은 위치의 연단에서 (스스로만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는) 주제에 대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로 정의롭지 못한 대중에게 설교를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독재정권에 대하여 나 자신을 포기하면서 쌓았던 정의로움, 너희들은 모르는 내 삶의 절박함은 소수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사회운동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적당하게 정의롭고 그다지 절박하지 못하지만 진보가 옳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면 정치 권력을 얻을 수 없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민주주의에서 다양성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다양성에만 매몰되어서 자신의 특수성만을 주장하여 다른 세력을 도외시한다면 '운동'은 될 수 있어도 '정치'는 될 수 없다. 타협하기 싫고 순수성만을 지키고 싶다면 정치를 하지 않으면 된다.


★★★★☆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미국학자가 미국의 정치상황을 분석하여 쓴 책이기 때문에 미국 정치 현실의 맥락에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현재의 미국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미국 정치의 역사를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부터 시작해서 레이건, 클린턴, 트럼프까지 정치지형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를 펼치는 진보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진보주의자들, 좀더 특정을 짓는다면 민주당의 왼쪽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소수의 권익에(만) 신경을 쓰는 진보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야 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선민의식, 피해자의식의 폐해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은 책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읽어 보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책이 얇고 내용도 좋고 번역도 잘 되어 있어서 정치관련 책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두께에 비해 책값이 좀 비싼 감은 좀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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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1 - 미래에서 온 살인자,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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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부산은 당연히 디스토피아이다..

가까운 미래에 부산에 엄청난 쓰나미가 밀려 들어 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자들은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져서 안전한 높은 곳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물이 빠져 나간 후 땅이 드러난 곳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다. 쓰나미는 또다시 해안가를 덮치고, 또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부자들은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 남을 수 없다. 이제 돈은 '상징적 의미'로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의미'로서 삶의 조건이 되어 버렸다. 배경이 장황하지만 소설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냥 미래에 부산의 풍경은 어둡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난 2063년, 고아로 자란 40대 중반의 이우환은 식당 보조로 일을 하고 있다. 식당의 사장은 80이 넘은 노인인데, 어릴 때 먹어 봤던 곰탕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우환에게 과거로 가서 곰탕 만드는 법과 곰탕 재료를 사서 오라고 한다. 40~50년 정도 지나면 타임머신이 있을 법도 하다. 어쨌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과거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타임머신을 탔다.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은 운이 좋다. 그리고 또다른 운이 좋은 사람은 이우환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간 이제 갓 성인이 된 것같은 김화영이다. 13명의 정원 중에 깨어난 것은 이우환 뿐이었는데, 김화영은 운좋게도 이우환이 깨워서 살 수 있었다. 이우환이 곰탕을 배우러 온 것에 비하면 김화영은 그래도 좀 이유가 그럴 듯하다.

 


사람 죽이러 왔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 목숨걸고 과거로 올 가치가 있지. 김화영은 미래에서 어떤 노인의 부탁을 받고 '열 둘'을 죽인 사람을 죽이러 왔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른다.

 

작가 김영탁,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곰탕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다른 곳에서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우환은 미래의 주방장이 준 약도에 의지해서 곰탕집을 찾고, 그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무뚝뚝한 주인, 고3이면서 말썽만 피우는 아들, 그리고 그 여자친구. 처음엔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느낌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과도 친해지고 주인 아들과 여자친구와는 더 친해진다. 아들의 이름은 이순희, 여자친구의 이름은 유강희. 자신을 버린 엄마와 아빠의 이름이다. 처음에는 설마설마했지만 자신을 고아로 자라게 한 부모가 맞다. (도대체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 같은데, 부모가 아닐 확률이 얼마나 되지?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부모라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이순희도 그렇고, 유강희도 그렇고 모범생들은 아니다. 주요 교통수단이 오토바이 이고, 귀가 시간은 보통 새벽이다. 이순희는 더 심해서 학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다. 어쩌면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막장 부모인 셈이다. 하지만 할아버지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던 두 아이는 이우환에게는 마음을 열고 이우환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곰탕을 끓여 준다.


곰탕집은 이렇게 훈훈해 지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력사건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다. 이순희의 학교에서는 둥근 구멍이 뚫리면서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시신의 머릿속에는 현대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칩이 꽂혀 있다. 용의자를 잡아 취조를 하던 경찰서에도 똑같은 둥근 구멍이 뚫리면 피의자가 사망을 한다. 한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해 간다. 치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는 옆방에 있는 얼굴 가죽이 없어진 다른 환자를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아들은 아파트에 잘 살고 있다.

 

주인공 이우환은 겨우 곰탕 끓이는 법을 배우러 목숨을 걸고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한다. 미래에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는데, 현재로 와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타임머신은 등장하지만 SF판타지소설은 아니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내가 보이니>도 그랬는데, 이 책도 장르를 배반하는 소설이다. 타임머신이라는 가장 SF에 어울리는 소재를 이용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지만 시간여행이 주는 장르적인 쾌감에 주력하지는 않는다. 타임머신 외에도 소설 속에서는 (굉장히 그럴듯한 설정과 함께) 공간이동도 등장하고 미래에서 왔을 수밖에 없는 무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읽는 동안 이 책이 SF소설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빴다는 건 아니다. 단, 김화영이 죽이려고 했던 '열두명을 죽인 살인자'가 이우환임이 밝혀지는 부분은 충분히 예상가능하긴 했지만, 시간여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미를 잘 살린 설정이다.


미래에서 현재로 온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이 소설은 이런 궁금증에 상상력을 더해서 개연성을 부여해 준다. 미래에서 왔든 과거에서 왔든 사람이 살려면, 살 곳이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다. 미래에서 현재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면 살아가는데 딱히 압도적으로 유리할 것도 없다. 오히려 불법체류자보다도 못한 신분으로 인해서 사는데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우환은 미래에서도 하층민이었고 현재로 왔다고 해서 팍팍했던 삶이 나아질 기미도 없다. 부모를 만났지만 밝힐 수도 없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건 곰탕을 끓여 주는 것밖에 없다.


최초의 시간여행자였던 박종대는 이후에 오는 시간여행자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와중에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지만 그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미래에서 온 사람들에게 신분을 주기 위해서 박종대는 얼굴을 바꿔쳐 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미래에 대통령이 될 유력한 정치인과 얼굴을 바꾸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는 미래인들이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우주인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지구인인 척 하고 사는 영화도 있었으니 비슷한 상상력인 것 같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타임머신인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 이 책은 시간여행을 다루기는 하지만 시간여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타임패러독스는 정교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여행 SF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지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힘들다.


몇가지 궁금한 점들..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곰탕>은 원래 카카오스토리에서 연재가 되었던 작품이다. 긴 기간 동안 연재를 하는 작품을 보면 설정에 구멍이 생기게 마련인데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몇가지 있다. 내가 읽으면서 지나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미래의 주방장은 이우환이 찾아가는 곰탕집 주인이 이우환의 할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건 우연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제일 궁금한 건 김화영을 보낸 사람은 누구이며, 왜 이우환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는지이다. 작가가 처음에 뭔가 설정을 해 놓았다가 나중에 잊은 것이 아닌가 싶다.


미래에서 오는 타임머신은 배의 형태로 바다에서 출발해서 바다에 도착한다. 제 때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된다. 바다에 도착한 시간여행자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수영실력은 필수다. 묘한 곳에서 설정이 세세하다.

 


★★★☆

위에서도 썼지만 이 책은 SF적인 상상력으로 쓴 것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SF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기대하는 즐거움을 주는 책은 아니다. 시간여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파라독스, 그로부터 발생하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쾌감같은 걸 기대하면 실망할 것 같다.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엮여서 치밀하게 생각을 해 가면서 읽어야 하는 지적인 즐거움에 치중한 소설도 아니다. <곰탕>은 주인공이 고아이고 현재로 와서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는 가족애를 그리는 소설이고, 미래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로 숨어 들어서 (불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SF라기보다는 기름때가 다 벗겨지지 않은 솥에 한참 끓여내는 <곰탕>같은 소설이다. SF에 현실을 설득력있게 접붙이려면 어쩔 수 없는 결과인 것 같다.


본격 SF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으므로 추천할 만하다.
타임머신이라는 멋지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소재를 생각하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충분히 한 권으로 낼 수 있는 책을 폰트 키우고 판형 작게 해서 두 권으로 나눠서 낸 것은 좀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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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b 2018-08-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래의 주방장은 이우환이 찾아가는 곰탕집 주인이 이우환의 할아버지라는 건 알고 있었겠지요 ㅎㅎ 그러니 어떤 이유로 보냈던 것일 테고요. (2권에서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더 읽어보심 찾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화영을 보낸 사람, 왜 이우환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는지도 2권에 나와요. 그 이유와 관계가 밝혀지는 지점들이 이 책을 남다르게 하는 것이 아녔나 싶습니다. 저도 여러 번 읽으면서 숨겨둔 복선의 답을 찾았고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은 책이였어요.^^
 
내가 보이니
배영익 지음 / 네오픽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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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세계에는 직선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직선을 긋는 행위야말로 진짜 창조적인 행위다. 직선은 신에게서 해방된 인간성의 상징이다.


연쇄살인사건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있는 덕적도.. 덕적도 주변에서 엉뚱한 변사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시신은 모두 세 구가 발견되었는데, 비닐에 싸여서 돌덩이 몇 개와 함께 가방에 담겨 있다. 누군가 살인을 한 후 바다에 유기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PD이면서 전직 프로파일러인 류문학 피디가 이 사건을 알게 되고 살인사건의 뒤를 쫒기 시작한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무런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시신의 손가락은 훼손돼서 지문으로도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전직 프로파일러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영받지는 못해도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철저하게 시신을 훼손해서 신분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신 중 한 구에서 척추에 인공디스크 수술을 한 것이 확인됐고, 이것을 힌트로 해서 한 사람의 신원은 알 수 있게 됐다. 인공디스크에 새겨진 제품번호로 확인을 해 보면 어디서 수술기록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 받은 수술이니 외국에 확인을 해 봐야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게다가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특이한 돌 덕분에 실제 범행이 이뤄진 장소, 즉 가방이 던져졌던 장소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류문학 피디는 이렇게 점점 연쇄살인마를 쫓아 간다.

 

머리에 이런 감투를 쓰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도깨비 감투

성기담은 거의 인생의 막장까지 와 있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며, 운영하던 학원은 부실한 운영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은행으로부터 대출도 거절을 당했다. 혹시나 돈을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염치는 없지만 장인어른을 찾았다. 장인으로부터 차마 돈 얘기는 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장승과 장승이 머리에 쓰고 있는 감투를 하나 얻어 온다. 여담이지만 성기담은 귀신과 함께 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다기보다는 귀신이 성기담의 집에 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다. 어느 집이든 귀신 몇 위 정도 함께 사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딱히 놀랍지는 않다. 이 귀신은 성기담에게 이런 저런 얘기도 해 준다. 그 중에 사람이 타지 않고 있는데 움직이던 차에 관한 얘기도 있다.


우리는 금세 예상할 수 있다. 장인이 성기담에게 줬던 감투는 도깨비 감투이다. 머리에 쓰면 투명인간이 된다. 이 감투가 어째서 장인 집 허름한 궤짝 속에 있었는지, 장인은 왜 성기담에게 이 감투를 줬고, 이 감투가 도깨비 감투인지 알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굉장한 보물을 얻었다. 안그래도 쫒기던 기담은 도깨비 감투 덕에 사채업자들에게 추적당하는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찾아 보니 의외로 도깨비 감투에 관한 창작품이 많다. 사진은 신문수 화백의 <도깨비 감투>. 굉장히 오래된 만화이다.


도깨비감투와 싸이코패스의 대결

설화 속에 나오는 도깨비 감투가 소재의 하나로 등장하는 미스터리 판타지 소설이다. H. G. 웰즈가 쓴 소설 <투명인간> 이후로 온갖 SF 판타지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숱하게 사용되고 있는 소재이다. 투명인간이 등장한다면 모두들 생각하는 전개가 있다. 목욕탕.. 은행털이.. 히어로가 되어 남몰래 선행을 한다든지.. 이런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당연히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은 투명인간이 되어 시원하게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내가 보이니>에서 도깨비 감투를 손에 쥔 성기담을  따라 가다 보면 그런 시원시원한 전개는 물건너가 버린다. 찌질하고 자신감없어 보이는 성기담은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찌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당황스러운 것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소재일 것 같았던 도깨비 감투는 사실은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감투를 손에 넣은 성기담이 아니다. 사람들을 죽여서 덕적도에 던져 버린 연쇄살인마가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성기담과 류문학의 두 사람의 관점을 교차하면서 소설이 진행되는데, 성기담보다는 살인자를 찾는 류문학에게 더 많은 무게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는 살인마 vs. 다른 사람들의 대결구도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같은 신비한 물건을 손에 넣은 성기담은 주요 인물을 짚어 나가다 보면 정체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싸이코패스와 생명을 놓고 사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절대적인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이 대결은 싸이코패스가 승기를 잡아간다. 무적일 것 갓 같은 투명인간이 되는 능력은 교활한 살인마 앞에서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살인마는 결국 범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지만 성기담이나 류문학의 활약 때문이라기보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도깨비 감투는 이 과정에서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는 물건이 아니라 탐욕을 부리는 사람에게 스스로 벌을 주는 심판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중요한 두개의 소재는 투명인간과 싸이코패스이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성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다.


★★★☆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전개되는데 나쁘지 않다. 도깨비 감투에 페널티를 부여해서 주인공이 무적이 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에서 기대하는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다. 대신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성장과정, 행동 등은 설득력이 있어서 긴장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도 상징적으로 잘 결말지은 것 같다.


재미있게 읽었으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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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ABC - 입문자를 위한 음악 기초 문법 음악의 글 7
이모겐 홀스트.벤저민 브리튼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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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공부 언제 해 봤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처음 음악에 흠뻑 빠졌던 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5살이나 6살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아서 닥치는대로 음악을 들었던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부모님이 가지고 계시던 카세트 테이프를 내가 더 열심히 듣기도 했었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클래식음악은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었고, 처음으로 합창을 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성가대에서였다. 이후로도 아마츄어로서 상당히 많은 음악활동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 순간도 음악을 놓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가지고 갈 평생의 취미이다.


음악이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론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공부해 본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전부다. 그나마라도 배운게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조금씩은 음악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어차피 아마츄어이고 취미로 하는 음악인데 본격적으로 공부할 틈도 별로 없었고 필요성도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이론은 퍼즐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직소퍼즐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모겐 홀스트 Imogen Holst 1907~1984 영국의 작곡자, 지휘자, 음악교육자, <음악의 ABC> 저자


본격적인 음악 이론서

음악에 관련된 책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을 살펴 보니 당연히 악보가 있고, 음악사에 대한 책, 개별 음악가에 대한 전기, 음악 형식에 대한 책, 음악에 관련한 에세이가 있다. 그런데 꽤 많은 음악 관련 책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음악이론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다. 생각해 보니 그런 책을 살 생각을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음악의 기초이론을 모른다고 해서 음악을 듣는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음악을 듣기만 하는게 아니라 따로 음악 활동도 하고 있어서 간혹 음악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음악의 ABC>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음악 이론서이다. 기본적인 기보법부터 설명을 시작해서 음표의 종류와 박자, 쉼표, 각종 박자지시, 셈여림까지 악보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학교 다닐 때 음악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되새기면서 읽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인 딸림화음이라든지 버금딸림화음같은 용어를 볼 때는 살짝 입가에 웃음이 돌기도 한다. 책의 2/3 가량은 온전히 악보를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어서 악보를 봐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내가 이 책에서 기대를 했던 부분은 4부의 '대위법' 부분이었다. 음악을 하면서 대위법이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지만, 그동안 잘 찾아 보지도 않았고 제대로 설명을 들어 본 적도 없어서 대강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 뭔지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 30페이지의 대위법 부분을 읽어도 다른 부분과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력이 딸려서 그런 건 아닌가 자괴감이 들어서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원래 대위법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음대를 다니더라도 작곡과가 아닌 경우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안심을 했다. '대위법'은 어려운 거다.

 

벤저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1976 영국의 작곡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서문을 썼다.


이론으로 배우는 음악의 역사

책의 나머지 1/3은 여러가지 음악의 형식과 악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름으로 들어 왔던 여러가지 춤곡의 형태로부터 소나타, 오페라, 칸타타 및 각종 음악 양식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얇은 부분에서 모든 장르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음악 양식에 대해서 짧은 시간에 한 번 훑어 보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각 장르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 봐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음악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음표가 처음에 어떤 모양으로부터 나왔는지도 설명을 하고, 각 장르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변천을 겪었는지도 설명을 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표들, 악기들, 음악 장르들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음악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음악은 그냥 듣기만 해도 괜찮다. 좋은 음악을 듣는데 꼭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지는 않다. 하지만 음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질 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좋은 책, 하지만 조금 애매한 포지션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책이냐고 물어 본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는 좀 쉽지 않다. 이 책은 일종의 교과서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기는 하지만 이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 특히 악보를 볼 필요가 없거나(사실 살면서 악보를 봐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클래식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별로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렇다고 전공자에게 읽으라고 하기엔 맛만 보고 끝나는 느낌이 든다. 이 책 이외에도 서양음악의 이론이나 역사에 관한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그런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은 너무 내용이 적다.(부실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딱 나같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다. 적당히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내용을 좀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데 시간은 많지 않아서 짧은 시간에 훑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 딱 좋다. 이 책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자고 생각하는 건 욕심이다. 위에서 쓴 것처럼 이 책은 훑어 보고 시작할 수 있는 책이지 완결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음악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더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딱 좋은 그런 책이다.

 

요즘 고등학교 음악교과서는 이렇게 나오는구나. <음악의 ABC>는 원래도 음악교육을 위한 교과서같은 책으로 쓴 책이다.


★★★★☆


추천할 대상은 명확하다.
1. 아마츄어 음악가 중에서 합창이나 중창, 아카펠라같은 보컬 활동을 하거나 악기를 다루기 때문에 악보를 볼 필요성이 있는 사람
2. 클래식 애호가 중에서 음악을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
3. 프로(여기서 프로는 음대를 준비중인 수험생이나 갓 입학한 학생을 말함) 중에서 음악의 이론을 간단하게 훑어 볼 수 있는 시작점이 필요한 사람


어쨌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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