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장무기는 타고난 기질이 굳세어 남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비굴하게 용서를 빌 성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불회와 함께 못된 백정의 손에 떨어져 산 채로 잡아먹힐 신세가 되자, 당황한 나머지 몇 마디 애걸복걸 목숨을 빌었다. - P268

"저 서가란 놈이 중간에서 득을 보려고 우릴 배반하다니! 정말 나쁜 놈일세! 도대체 어떻게 저런 놈을 만나서 데려온 건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었소. 그러니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누가 알겠소? 이름이 서달(徐達)"이라든가 합디다. 아무튼 그 녀석의 도깨비 같은 말을 귀담아둘 것 없이 어서 돌아가기나 합시다.’ - P273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 아직도 바람결에 책장을 나부끼는 왕난고의 걸작품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면서 앞으로 틈을 내서 이 《독경》을 세밀히 연구하기로 단단히 다짐했다. - P279

서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교에서 으뜸으로 치는 계율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것일세. 육식이 나쁜 일이긴 해도 그건 지엽적인 일일세. 자네들도 생각해보게. 여기 쌀 한 톨 푸성귀 한 닢 먹을 게 없는 마당에, 삶아놓은 쇠고기를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보기만 하다가 산 사람이 굶어죽어야 옳겠나?" - P283

하지만 장무기의 생각은 달랐다. 태사부님은 마교 사람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상우춘이나 서달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교 출신이면서도 설공원 따위의 명문정파 제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리와 기백이 충천하지 않은가?
그는 태사부 장삼봉을 하늘처럼 존경하고 마음으로 감복해 온 처지였으나, 지난 몇 해 동안 자신이 겪어온 경험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마교에 대한 태사부님의 생각은 너무 지나친 편견이 아닌가 싶었다. 마음은 비록 이러했지만 또 그렇다고 태사부님의 당부 말씀을 어길 뜻은 없었다. - P289

"이것 봐, 젊은이! 자네 정말 치료라는 걸 할 줄 아는가?"
하태충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장무기의 머릿속에는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큼 하태충에 대한 원망도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날의 원수를 잊지 않고 평생토록 한을 품는 그런 옹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 P314

"두 내외분께선 철금선생과 하부인이 아니신지? 소생은 양소라하오."
"앗……!"
상대방에게서 ‘양소(楊道)‘란 이름 한마디가 나오기 무섭게, 하태충과 반숙한, 장무기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외마디 경악성을 터뜨렸다. 외마디였을 뿐이지만 장무기의 경악성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태충과 반숙한 부부의 외침 속에는 놀라움과 더불어 분노가 엇갈려 있었다. - P351

"아저씨! 아저씨가 바로 명교의 광명좌사자 양소, 그분이신가요?"
양소는 의아스런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장무기는 대뜸 곁에 선 소녀를 가리켰다.
"얘가 바로 아저씨의 딸입니다."
그러고는 양불회를 잡아당겨 앞에 내세웠다. - P352

"이제 보니 무당파 제자였군. 그렇다면, 은리정…… 은육협은?""
"은육협께선 제게 여섯째 사숙 되시는 분이지요. 선친께서 세상을 뜨신 후, 여섯째 사숙님은 저를 친조카나 다름없이 대해 주셨습니다. 기효부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불회 동생을 이 곤륜산까지 데려오기는 했지만, 사실 여섯째 사숙님께는 미안한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 P366

장무기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슴 설레도록 아리따운 여자의 매력을 처음 느껴보았다. 만약 지금 이 시각에 주구진이 그더러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 하면 아마 추호도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니 그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넋이 빠질 대로 빠진 그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즉시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 P385

그렇다. 이 사람은 바로 주구진의 아버지 주장령(朱長)이었다. 위벽이 뜻하지 않게 팔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고 사태가 커지자, 영오궁에서 개 사육을 맡은 종복이 큰일 났구나 싶어 부리나케 주인어른께 달려가 급보를 전하고, 주장령은 무슨 일인가 싶어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던 것인데 자기 딸을 포함한 셋이서 어린 소년을 에워싼 채 인정사정없이 협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 P420

장무기는 입만 딱 벌린 채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한 곁에 멍청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연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 이 ‘사손‘ 이란 괴한은 절대로 내 양아버지 금모사왕 사손이 아니다. 그분은 벌써 오래전에 두 눈이 멀어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셨는데, 이 사람을 봐라! 두 눈초리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지 않은가! - P449

삽시간에 장무기는 모든 진상을 확연히 깨달았다. 저들이 어째서 무열을 개비수 호표라는 가공의 인물로 그럴듯하게 등장시켜 놓고 이 터무니없는 희극을 연출했던가? 저들은 장무기의 눈을 실감 있게, 그리고 박진감 넘치게 속여 넘기기 위해 무시무시한 장력으로 돌 부스러기가 흩날릴 만큼 석벽을 후려쳤고 목질이 단단한 탁자와 걸상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리기까지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공이 유별나게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수능란한 무열을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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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석부리 사내가 갑판 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도사 어르신께서 보잘것없는 이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소인 상우춘(常遇春)이 어르신께 큰절을 올리나이다."
"상영웅, 이렇듯 대례까지 올릴 것은 없소."
장삼봉이 손을 내밀어 부축해 일으켰다. 한데 그의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얼음보다 더 차가워 흠칫 놀랐다.
"상영웅, 혹시 내상까지 입은 것 아니오?""
텁석부리 상우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 P27

"얘야, 네 이름이 뭐냐?"
"제 성은 주씨(周氏)예요. 아버지 말씀이, 제가 호남성 지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지약이라고 붙여주셨어요." - P29

"뜻은 고맙네만, 이 아이의 한독이 오장육부에 깊숙이 퍼져 있어서 보통 약물로는 치료하지 못한다네. 그저 시일을 두고 천천히 풀어줄 수밖에."
"하지만 그 신의는 정말 다 죽어가는 병자를 기사회생시킬 만큼 신통력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 말에 장삼봉이 흠칫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말하는 사람이 혹시 접곡의선(蝶谷醫仙)이 아닌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도장 어르신께서도 저희 호사백(胡師伯)의 명성을 알고 계셨군요."
상우춘이 반가운 기색으로 얼른 대답했다. - P39

아미파 장문인 멸절사태는 제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기효부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의발을 전수할 뜻이 있었던 모양인데, 사저 되는 정민군이 마음속으로 질투심을 품은 듯했다. 그녀가 기효부에게서 무슨 꼬투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마음먹고 뭇 사람들 앞에 추태를 보이게 만들어 얼굴도 들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해 보였다. - P63

"이 아이의 모친은 백미응왕 은교주의 따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도 절반쯤은 우리 명교 인물인 셈입니다."
상우춘은 온갖 구실을 다 짜내어 호사백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다. 아니나 다를까, 무기의 어머니가 천응교 인물이란 말을 듣자 호청우도 다소 마음이 움직였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그래? 자넨 그만 일어서게. 이 아이가 천응교 은천정의 외손자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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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멀리 바닷가 바위더미 위에 키가 훤칠하게 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이마에 손을 얹고 자세히 바라보니, 이게 누군가? 금모사왕 사손이 아닌가! .
장취산의 놀라움은 실로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은소소와 그 엄청난 재앙을 겪은 뒤에 이제 이 섬에서 오붓하게 안주하기를 바랐는데, 저 무서운 마두가 또 들이닥칠 줄이야 누가 알았던가? - P108

무인(武人)에 대한 욕설은 멀리 당나라 때부터 송나라를 거쳐서 차츰 남송 말년까지 내려왔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 다섯 원로부터 차례차례 욕을 먹더니 그다음에는 곽정 대협, 황용 여협, 신조대협 양과, 소용녀 부부까지 내려갔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무당파 개산조사 장삼봉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P120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사손의 칼춤이 흠칫하더니 전극에라도 맞은 듯 몸뚱이가 부르르 떨리면서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응애……! 응애……!"
사손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124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녀는 사손에게 애절한 말씨로 간청했다.
"사선배님, 저희가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시게."
"이 아기를 선배님 양자로 거두어주세요. 이 아이가 자라서 선배님을 친아버님처럼 봉양해드릴 수 있게 말이에요. 선배님이 돌봐주시면, 이 아이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어떠신가요?"
장취산은 아내의 애틋한 속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얼른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정말 좋은 생각이오. 사선배님, 저희 부부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제발 수락해주십시오. 이 후배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P129

"이거야말로 내가 자네들한테 감사드려야겠네. 내 눈을 멀게 한 원한은 우리 이것으로 깨끗이 잊어버리세. 나 사손은 비록 친아들을 잃었으나 이제 아들을 새로 얻었으니, 장차 사무기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될 걸세. 앞으로 세상 사람들은 사무기의 부모가 장취산과 은소소요, 양부는 금모사왕 사손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거야!" - P131

"당시 나는 온몸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써늘해졌지. 손발마저 덜덜 떨렸으니까…… 그 사람의 무공 실력으로 내 한 목숨 끊어버리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웠을 것이네. 그가 말한 번뇌의 바다는 끝이 없으나, 마음을 돌이키면 그곳이 피안‘ 이란 말이 순간적으로 귀에 들렸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말이었으나, 자비심으로 가득 찬 것임을 나는 똑똑히 들었네…" - P160

당시 사손은 노름판에서 마지막 남은 밑천을 다 걸고 최후의 승부를 건 셈이었다. 천령개를 내리치는 그 손바닥에는 확실히 혼신의 공력이 담겨 있었다. 이제 공견대사가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제 손으로 정수리를 박살내고 죽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복수를 못할 바에야 더는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견대사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변하는 것을 보자 큰 소리로 외쳐대며 사손을 구하러 달려들었다.
"안 되오! 어째서 그런 짓을…….." - P179

"무기야, 중원 땅에 돌아가거든 아무쪼록 네 이름을 ‘장무기’ 라고 대야 한다. ‘사무기‘ 란 이름은 네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알겠니?"
"큰아버지 큰아버지....."
무기는 두세 번 고함쳐 부르다가 끝내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 시각했다. - P195

"소소, 이분이 바로 내가 늘 얘기하던 유연주 둘째 사형이오. 형님, 이쪽은 제 아내와 아들 무기입니다. 형님한테는 제수가 되고 조카뻘이 되는 셈이지요."
장취산의 말에, 유연주와 이천원은 동시에 대경실색했다. 지금까지 천응교와 무당파가 피를 튀기며 목숨 걸고 싸우던 판국이었는데, 이들 양쪽 집안의 두 남녀가 부부가 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낳았다니 이야말로 놀라 자빠질 노릇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 P205

"악한 짓을 일삼던 살인마 사손은 이미 구 년 전에 죽었습니다."
"사손이 죽었다고………?"
깜짝 놀란 유연주와 서화자, 위사랑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은소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이 아이를 낳던 그날, 악적 사손은 미친병이 발작하여 남편과 저를 죽이려다 별안간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 심병(心病)이 도졌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마구 저지르던 악적 사손은 이미 죽었습니다." - P211

"각원조사께서 임종 직전 《구양진경》을 암송하셨을 당시 그것을 들은 분이 세 분 있었다고 하셨는데, 한 분은 물론 사부님이시고, 또한 분은 소림파 무색대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자 분으로 바로 아미파의 개창조사이신 곽양 여협이었다고 하셨소." - P265

어진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당시 곽여협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남자 한 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더군요. 바로 양양성 공방전이 한창일 무렵, 몽골 황제 몽케 카간(蒙哥可汗)을 바윗돌로 쳐 죽인 신조대협 양과였지요. 그 후 곽여협은 천하를 방방곡곡 다 뒤지고 다녔지만 사모하는 신조대협을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랑하던 곽여협은 나이 사십 세가 되던 해에 돌연 대오각성하여 속세를 버리고 비구니로 출가하셨다가 훗날 아미파를 창건하신 겁니다. - P267

"무기야, 이 엄마한테 한 가지 약속해다오."
"말씀하세요, 엄마."
"성급히 복수할 생각은 마라. 천천히 기다려서 네 무공이 강해지거든 그때 가서 저 사람들을 모두 죽여라. 한 사람도 빠뜨려선 안돼." - P432

그녀는 무기를 품에 안고 귓속말로 소곤소곤 얘기했다.
"얘야, 네가 자라서 어른이 되거든 여자한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쁘게 생긴 여자일수록 남을 더 잘 속인단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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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그 칼의 비밀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 무인도에서 십 년이 지나든 이십 년이 지나든 나하고 같이 살아야겠지. 만약 내가 평생토록 그 비밀을 생각해내지 못할 때에는 자네들도 나하고 같이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걸세. 자네들은 정분도 나고 의기가 투합되어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니까 아예 부부가 되어서 아들 딸 낳고 기르는 재미도 있지 않겠나?" - P40

은소소가 그의 품안에 기대앉은 채 귓속말로 속삭였다.
"장오라버니, 만약 우리 둘이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장취산의 심정이 격하게 흔들렸다.
"나도 그대와 함께 있고 싶소. 천상으로 올라가는 땅속으로 들어가든, 인간세상이든 바다 밑이든,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을 거요."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기대앉았다. - P60

그의 언행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장취산과 은소소는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의 부모 처자식은 모두 남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미치도록 상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원수는 도대체 누굴까? 허나 사손의 정신병이 다시 도질까봐 두 사람은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P75

한데, 차가운 달빛 아래 사손이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안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은소소는 얼음판 위에 쓰러져 있었다.
급히 달려든 장취산이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은소소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내가 은침으로….… 저 사람 눈을 맞혔어……" - P82

이날 아침 일찍이 장삼봉은 폐관을 풀었다. 맑은 휘파람 소리와 함께 소맷자락을 떨치자 두 개의 문짝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10년 세월을 못내 그리워하던 애제자 장취산이었다.
그는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다. 허나 그때는 이미 장취산이 품안으로 달려들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잇따라 사부를 외쳐 부르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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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의 성은 장(張), 보잘것없는 이름은 취산(翠山)이라 부릅니다. 평소 용문표국 도총표두님의 크신 명성을 흠모해왔으나, 아직 뵈올 인연은 없었지요."
스스로 ‘장취산‘이라 신분을 밝히는 청년의 말에, 도대금과 축표두, 사표두 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장취산이라면 무당칠협 가운데 다섯 번째로, 지난 몇 해 동안 강호무림계 인사들의 칭송을 통해 그 무공 실력이 어떠한지 세 사람 모두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유명한 인물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젊은이라니!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것처럼 호리호리한 체구에 문약해 보이는 이 청년이 장취산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P290

"그렇다면 뺨에 커다란 흑사마귀가 달리고, 또 그 사마귀에 긴 터럭이 세 가닥 난 그 사람이 송대협이 아니란 말이오?"
장취산은 이 말에 또 한 번 멍해지더니, 이내 딱 부러지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희 일곱 형제 가운데 뺨에 사마귀가 달린 사람은 없습니다. 사마귀에 털 난 사람도 없고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도대금은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한 줄기 써늘한 기운이 확 치밀어 올랐다. 이날 이때껏 무언가 모르게 막연히 느껴왔던 불안감이 한꺼번에 솟구쳤던 것이다. - P293

결국 네 명의 승려들은 자기네 동료 두 사람과 용문표국 일가족이 몰살당한 모든 누명을 자기 머리 위에 덮어씌워놓은 셈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장취산은 제 입으로 이름 석 자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강호상에 명성을 떨쳐오던 ‘은구철획‘의 병기마저 꺼내 보여주지 않았던가? - P355

"똑똑히 보고 다시 말해보시오! 살인범이 딴 자가 아니라, 이 장취산! 바로 나였단 말이오?""
높이 쳐들린 화접자 불빛 아래 비친 장취산의 얼굴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던 혜풍의 두 눈에 갑작스레 이상야릇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장취산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너는…… 당신……… 아니…… 당신은….."
흥분에 들떠 몇 마디 말을 더듬는가 싶더니, 말끝을 다 맺기도 전에 갑자기 몸뚱이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그런 뒤 땅바닥에 가로누운 채 두 번 다시 일어날 줄 몰랐다. - P366

"제 성은 은(殷)씨예요…… 언젠가 연분이 닿으면, 장상공께 다시 가르침을 청하겠어요!"
‘성이 은씨……‘ 란 첫 마디에, 정취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금이 뭐라고 했던가? 셋째 형님 유대암의 호송을 부탁한 사람은 서생 차림에 용모가 준수하고 아리따운 여자라고 했다. 그가 스스로 은씨라고 일컬었다고 했는데, 혹시 저 처녀가 변장을 하고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 P395

이 말을 듣는 순간, 장취산은 가슴이 써늘해졌다.
"그렇다면, 표국 안의 그 숱한 목숨은 모두…… 모두……?"
"모두 내가 죽였어요!"
장취산은 귓속에서 ‘위잉!‘ 하는 이명(耳鳴)이 울렸다. 저 꽃같이 아리따운 처녀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숱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범인이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P397

"그런데 이 장취산이 당신과 무슨 원수를 졌기에 날 그토록 함정에 빠뜨린 거요?"
장취산이 분노로 가슴이 꽉 메어져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은소소는 빙그레 웃으면서 응수했다.
"저 역시 당신을 함정에 몰아넣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소림파와 무당파, 소위 당세 무학의 양대 종파라고 일컫는 두 세력이 충돌한다면, 과연 어느 편이 이기고 질 것인지 보고 싶어서 싸움을 붙여보려는 거였죠."
이 말에 흠칫 놀란 장취산은 가슴속 그득히 들끓던 분노의 불길이 단번에 수그러들고 그 대신 두려움과 경계심이 부쩍 늘었다. - P426

상금붕을 도로 주저앉힌 백귀수가 서둘러 포구 쪽으로 달려 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헛기침을 하면서 나무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볼 것 없네! 금모사왕은 진작 여기 와 있으니까."
착 가라앉으면서도 무게가 있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백귀수는 고막에서 윙윙!‘ 하고 귀 울음까지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 P479

"법왕이라니 지나친 말씀이오. 소인의 성은 사(謝)씨, 이름은 외자로 손(遷), 자(字)를 퇴사(退思)‘라 부르오. 그리고 친구들이 보잘것 없는 내게 금모사왕(金毛獅王)‘이란 별호를 붙여주었기에 그대로 쓰고 있소. - P480

"그렇겠지! 여러분더러 그냥 죽으라고 하면 억울해서 죽을 때까지 불복하실 거요. 내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하리다. 여러분이 각자 평생토록 갈고 닦아온 절기를 내 앞에 펼쳐보도록 하시오. 만에 하나, 그 장기로 ‘나를 이길 수만 있다면 그분의 목숨만큼은 살려드리리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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