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장무기는 타고난 기질이 굳세어 남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비굴하게 용서를 빌 성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불회와 함께 못된 백정의 손에 떨어져 산 채로 잡아먹힐 신세가 되자, 당황한 나머지 몇 마디 애걸복걸 목숨을 빌었다. - P268
"저 서가란 놈이 중간에서 득을 보려고 우릴 배반하다니! 정말 나쁜 놈일세! 도대체 어떻게 저런 놈을 만나서 데려온 건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었소. 그러니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누가 알겠소? 이름이 서달(徐達)"이라든가 합디다. 아무튼 그 녀석의 도깨비 같은 말을 귀담아둘 것 없이 어서 돌아가기나 합시다.’ - P273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 아직도 바람결에 책장을 나부끼는 왕난고의 걸작품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면서 앞으로 틈을 내서 이 《독경》을 세밀히 연구하기로 단단히 다짐했다. - P279
서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교에서 으뜸으로 치는 계율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것일세. 육식이 나쁜 일이긴 해도 그건 지엽적인 일일세. 자네들도 생각해보게. 여기 쌀 한 톨 푸성귀 한 닢 먹을 게 없는 마당에, 삶아놓은 쇠고기를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보기만 하다가 산 사람이 굶어죽어야 옳겠나?" - P283
하지만 장무기의 생각은 달랐다. 태사부님은 마교 사람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상우춘이나 서달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교 출신이면서도 설공원 따위의 명문정파 제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리와 기백이 충천하지 않은가? 그는 태사부 장삼봉을 하늘처럼 존경하고 마음으로 감복해 온 처지였으나, 지난 몇 해 동안 자신이 겪어온 경험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마교에 대한 태사부님의 생각은 너무 지나친 편견이 아닌가 싶었다. 마음은 비록 이러했지만 또 그렇다고 태사부님의 당부 말씀을 어길 뜻은 없었다. - P289
"이것 봐, 젊은이! 자네 정말 치료라는 걸 할 줄 아는가?" 하태충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장무기의 머릿속에는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큼 하태충에 대한 원망도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날의 원수를 잊지 않고 평생토록 한을 품는 그런 옹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 P314
"두 내외분께선 철금선생과 하부인이 아니신지? 소생은 양소라하오." "앗……!" 상대방에게서 ‘양소(楊道)‘란 이름 한마디가 나오기 무섭게, 하태충과 반숙한, 장무기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외마디 경악성을 터뜨렸다. 외마디였을 뿐이지만 장무기의 경악성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태충과 반숙한 부부의 외침 속에는 놀라움과 더불어 분노가 엇갈려 있었다. - P351
"아저씨! 아저씨가 바로 명교의 광명좌사자 양소, 그분이신가요?" 양소는 의아스런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장무기는 대뜸 곁에 선 소녀를 가리켰다. "얘가 바로 아저씨의 딸입니다." 그러고는 양불회를 잡아당겨 앞에 내세웠다. - P352
"이제 보니 무당파 제자였군. 그렇다면, 은리정…… 은육협은?"" "은육협께선 제게 여섯째 사숙 되시는 분이지요. 선친께서 세상을 뜨신 후, 여섯째 사숙님은 저를 친조카나 다름없이 대해 주셨습니다. 기효부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불회 동생을 이 곤륜산까지 데려오기는 했지만, 사실 여섯째 사숙님께는 미안한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 P366
장무기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슴 설레도록 아리따운 여자의 매력을 처음 느껴보았다. 만약 지금 이 시각에 주구진이 그더러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라 하면 아마 추호도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니 그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하랴? 넋이 빠질 대로 빠진 그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즉시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 P385
그렇다. 이 사람은 바로 주구진의 아버지 주장령(朱長)이었다. 위벽이 뜻하지 않게 팔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고 사태가 커지자, 영오궁에서 개 사육을 맡은 종복이 큰일 났구나 싶어 부리나케 주인어른께 달려가 급보를 전하고, 주장령은 무슨 일인가 싶어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던 것인데 자기 딸을 포함한 셋이서 어린 소년을 에워싼 채 인정사정없이 협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 P420
장무기는 입만 딱 벌린 채 망연자실한 기색으로 한 곁에 멍청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연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 이 ‘사손‘ 이란 괴한은 절대로 내 양아버지 금모사왕 사손이 아니다. 그분은 벌써 오래전에 두 눈이 멀어 앞 못 보는 장님이 되셨는데, 이 사람을 봐라! 두 눈초리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지 않은가! - P449
삽시간에 장무기는 모든 진상을 확연히 깨달았다. 저들이 어째서 무열을 개비수 호표라는 가공의 인물로 그럴듯하게 등장시켜 놓고 이 터무니없는 희극을 연출했던가? 저들은 장무기의 눈을 실감 있게, 그리고 박진감 넘치게 속여 넘기기 위해 무시무시한 장력으로 돌 부스러기가 흩날릴 만큼 석벽을 후려쳤고 목질이 단단한 탁자와 걸상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리기까지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공이 유별나게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수능란한 무열을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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