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보는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목에도 써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비수는 워낙 예리해서, 살짝 닿기만 해도 두부 썰 듯이 목이 절단되고 말 것이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헤벌쭉 웃었다.
"유 대형, 말로 합시다. 한 식구나 다름없는데 왜 이렇게 거칠게 구는 거죠?"
유일주는 그의 얼굴에 퉤하고 침을 뱉었다. - P21

"지금 잡아떼는 거냐? 방사매가 너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했다는데···사실이냐?"
그 말에 위소보는 깔깔 웃었다.
유일주가 다그쳤다.
"왜 웃는 거야?"
엘레위소보가 웃으며 말했다.
"유 대형, 내가 묻겠는데... 내시도 마누라를 얻을 수 있나요?"
유일주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급히 달려왔는데, 위소보가 내시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 P23

"아… 형제… 위 형제, 아니 위 향주! 목왕부와의 유대를 봐서라도 제발... 제발 좀 살려줘…."
위소보가 말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궁에서 널 살려냈는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오히려 날 죽이려 해? 흥! 흥! 너 같은 조무래기 따위가 감히 이 어르신을 건드려? 나더러 목왕부와의 유대를 봐서라도 살려달라고 했지? 그럼 날 잡을 때는 왜 천지회와의 유대를 생각하지 않았느냐?" - P37

위소보는 전세를 정확히 파악했다.
‘저 노인만 건드리지 않으면 나머지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가 비수를 뽑아쥐고 앞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방이가 얼른 그를 말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길 거야. 나서지 않아도 돼."
위소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길 걸 아니까 나서려는 거지, 질 것 같으면 벌써 달아났을 거야.‘ - P67

노인이 오른손으로 판관필을 들어올리더니 소리 높여 외쳤다.
"홍 교주는 장생불로, 홍복영락, 영원불멸하리라! 영원불멸하리라!"
그러자 부하들도 일제히 무기를 높이 들고 외쳤다.
"홍 교주는 영원불멸하리라! 영원불멸하리라!" - P68

위소보는 강시를 제일 무서워하고, 그다음으로는 귀신을 겁낸다. 불여우는 그다지 무서워하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이 소녀는 귀엽고 예쁜 게, 어딜 봐도 불여우 같지 않았다. 게다가 강남 말씨가 배어 있어 자기 고향 말투와 비슷했다. 운남 말씨를 쓰는 목검병이나 방이보다 더 친근감이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물었다.
"낭자, 이름이 뭐야?",
소녀가 대답했다.
"난 쌍아라고 해요. ‘한 쌍’ 할 때 그 ‘쌍’이에요." - P97

"그 간신 오배를 죽인 경위를 저한테 말해줄 수 있나요?"
위소보는 그녀가 오배를 ‘간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더욱 마음이 놓였다. 이제 끗발이 가장 높은 ‘지존패’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상대가 어떤 패를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높아도 기껏해야 비길 뿐이었다. - P106

얼마 후장 부인이 안채에서 걸어나왔다.
"계 상공, 너무 놀라지 마세요.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다 오배에게 죽음을 당한 충랑들의 유가족이에요. 모두들 계 상공이 오배를 죽여서 자기들의 피맺힌 원한을 갚아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사하고 있어요." - P110

"쌍아 이 아이는 저를 따른 지 오래됐어요. 아주 영리하고 일도 깔끔하게 잘합니다. 은공께 드릴게요. 앞으로 은공을 따라다니며 정성껏 잘 모실 겁니다."
위소보는 놀라면서도 내심 좋아했다. 그녀가 주겠다는 선물이 사람일 줄이야, 정말 뜻밖이었다. - P112

그러자 황보각이 얼른 외쳤다.
"그와 함께 있는 승려가 다치지 않게 다들 조심해라!"
황보각의 말에 모두들 그 승려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키가 헌칠하고 아주 준수하게 생겼다. 그는 현재 상황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눈을 내리깔고 표정이 없었다.
위소보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 사람이 분명 소황제의 아버지일 거야. 한데 생김새는 닮지 않았어. 소황제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생각보다 젊네.‘ - P156

위소보가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나직이 말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 화상 때문에 온 겁니다."
징광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시주께선 다 알고 있었군요."
위소보가 여전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이곳에 와서 불사를 치르겠다고 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실은.… 명을 받고… 황제 화상을 지켜드리러 온 겁니다."
징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P162

위소보는 눈치 하나는 빠르다.
"분명 기분 나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쌍아는 잡아뗐다.
"없다니까요!"
위소보는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아, 알았다. 내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면서도 얘기를 안 했다고... 화난 거지?" 설명했다.
쌍아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랑캐 황제는 나쁜 사람이에요. 한데 상공은… 왜 그들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죠? 그것도 아주 큰 벼슬이잖아요!" - P179

‘노황야는 이 경전을 소현자한테 전해주라고 했는데・・・ 전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 이미 다섯 부를 수중에 넣었어. 이것까지 합치면 여섯 부가 되지. 나머지는 단 두 부야. 만약 소현자한테 주면 내가 갖고 있는 다섯 부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어. 다행히 노황야는 소현자가 오대산에 온다고 해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했어. 그럼 대질심문도 할 수 없지.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면 내 무슨 면목으로 위씨 조상을 대하겠나?" - P202

반두타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위 시주, 한가지 간곡한 청이 있는데, 들어주면 고맙겠네."
위소보는 영문을 몰라 멍해졌다.
"무슨 일인데요?"
반 두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신룡도로 며칠만 손님으로 모셔가고 싶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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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가 지금껏 손을 쓰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선 그날 해 노공과 싸우면서 심한 내상을 입었다. 그리고 해 노공이 분명 발로 걷어찼는데도 위소보가 멀쩡한 것을 보고 어린것이 심후한 내공을 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상처가 완치되고 공력을 회복하기 전에는 섣불리 행동을 하지 않기로, 신중을 기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 P33

방이가 말했다.
"이젠 한편이 됐으니 솔직히 다 말해줄게 우린 오삼계의 아들 오옹웅의 부하로 위장해서 황제를 노리러 온 거야. 황제를 죽일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러지 못하더라도 황제가 대로해 오삼계를 죽이게끔 계획을 짠거지." - P74

그러자 조 시위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위소보가 나섰다.
"너희들은 오늘 겁 없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는데, 대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냐? 솔직하게 말해라!"
그 내관이 대답했다.
"억울해요! 우린 태후마마의 분부로……."
위소보는 펄쩍 뛰어 왼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호통을 쳤다.
"헛소리 말아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또 입을 열면 당장 죽여버리겠다!" - P90

강희가 다시 말했다.
"다시 잘 생각해보시오. 만약 오삼계가 보낸 자객이 아니라면, 평서왕부의 병기를 휴대하고 역모를 획책한 목적이 무엇이겠소? 당연히 오삼계를 모함하기 위해서겠죠. 오삼계는 대청제국이 천하를 차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어요. 그를 시기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죠. 진짜 자객들을 사주한 자가 누군지, 다시 단단히 신문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오." - P118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계자는 충성심이 강하고 돈에도 욕심이 없으니 정말 기특해. 자기는 한 푼도 갖지 않고 은자 5만냥을 다 시위들에게 나눠주는군.‘ - P140

목검성은 천지회 북경의 수장인 위 향주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백한풍을 통해 이 어린아이가 무공은 형편없고 입만 살아 있는 천덕꾸러기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사부인 진근남이 전적으로 밀어주는 바람에 향주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주 침착한 게 의젓해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 P156

위소보는 서천천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나서 말했다.
"서 삼형, 속상해할 필요 없어요. 노일봉 그놈은 제가 오응웅을 시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라고 했어요."
서천천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향주님"
그러면서도 속으론 별로 믿지 않았다.
‘또 얼토당토않은 뻥을 치는군. 오응웅은 평서왕부의 세자로서 얼마나 도도하고 건방진데, 설마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
위소보가 자신을 위해 백한송과의 풀기 어려운 응어리를 해결해 주겠다고 장담하니, 말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과연 자객 한 명을 구해낼 능력이 있을지는 믿어지지 않았다. - P175

강희는 무공을 연마한 후 아슬아슬하고 긴박감이 넘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몸이라 위험에 노출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직접 겪는 것처럼 위소보를 보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설령 시위들을 보내면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위소보를 보낼 것이었다. - P179

방이는 처음엔 일개 내시인 위소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어전 시위 부총관 서동을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또한 이상한 약으로 시신을 없애는 것도 지켜보았다. 게다가 궁중 시위들과 내관들이 그를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193

"위 향주께서 저와 제자, 그리고 유 사질의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저는 귀회의 전 사부한테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반청복명을 위한 일에 천지회에서 저와 제자를 불러주신다면, 언제든지 달려와 명에 따르겠습니다!" - P238

진근남은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궁에 있는 위 향주의 친구가 바로 위소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매우 흐뭇해했다.
"소공야, 유 어른, 오 대형! 세 분은 너무 겸손하십니다. 폐회와 목왕부는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동지로서 서로 돕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은혜니 보은이니 하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그 위소보는 저의 어린 제자입니다. 나이가 어려 철이 없지만 ‘의리‘만은 좀 남다른 것 같습니다." - P239

오입신은 정중하게 말했다.
"험지에 몸담고 있으니 그야 당연하죠. 좀 전에도 제자 오표에게 언급했습니다. 그 소영웅은 일을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고 간담과 기백, 용기가 있는 아주 훌륭한 인물이라고요. 오랑캐 궁중에 어떻게 그런 걸출한 인물이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천지회의 향주였군요. 아… 허허 ・・・ 어쩐지 어쩐지 이제야 납득이 갑니다!",
그러면서 연신 엄지를 세우며 계속 고개를 흔들어댔다. 얼굴엔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P240

진근남이 다시 말했다.
"과연 융무와 영력, 어느 쪽이 정통을 이을지 구체적으로 논하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목소공야, 유어른! 천하영웅중에 누구든 오삼계를 죽이면, 모두 그의 호령에 따르도록 합시다!" - P244

다시 살금살금 두 걸음을 내디뎠는데, 갑자기 낯선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유연이 어떻게 된 거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야?"
위소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 해괴한 일이었다.
‘태후의 방 안에 어떻게 남자가 있지? 목소리를 들어보니 내관은 아닌데・・・ 그렇다면 늙은 화냥년의 기둥서방이 아닐까? 하하. 이 어르신이 간통 현장을 잡아야겠군!‘ - P293

위소보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도궁아는 내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면 황제가 입을 봉하기 위해 날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하지만・・・ 영웅호한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대신 의리를 저버리는 일만은 절대 해서는 안 돼! 좋아! 대장부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나?"
그는 다과를 탁자에 내려놓고 강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현자! 한 번만 더 소현자라고 불러봐도 되겠어요?" - P320

"겨루는 건 급하지 않고・・・ 한 가지 중대한 기밀이 있어요. 이건 분명히 내 친구 소현자한테 털어놓는 거지, 절대 황제에게 말하는 게 아네요. 황제가 들으면 분명 내 목을 칠 거예요. 하지만 소현자는 날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 P321

강희는 생각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음..… 이렇게 하자. 내가 정식으로 선포하겠다. 오배를 제압하기 위해 넌 내 명에 따라 가짜 내관 노릇을 해왔다고 말이야. 이제 원흉을 제거했으니, 당연히 가짜 내관 노릇을 계속할 필요가 없지. 소계자, 앞으로 글공부를 좀 해라. 내가 큰 벼슬을 내려줄 테니까."
위소보가 대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저는 책만 보면 지근지근 골치가 아파요. 공부를 조금만 할 테니까 벼슬도 그냥 조금 작은 걸로 주세요."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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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오늘 이 야밤에 날 찾아온 목적이 뭐지?"
해 노공이 차분하게 말했다.
"소인은 마마께 한 가지를 여쭈려고 합니다. 그래야 돌아가서 주군께 그대로 아뢸 수 있으니까요. 단경 황후와 효강황후, 정비, 영친왕.… 네 사람은 다 비명횡사했습니다. 주군은 그로 인해 출가를 했고요. 그들을 죽인 잔악한 흉수는 궁 안에 있는 무공 고수입니다. 외람되오나 태후께 여쭙고 싶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소인은 이제 나이가 많은 데다 눈도 멀고,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 풍전등화처럼 갈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그 흉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 P57

‘태후가 날 승진시킨 것은 어젯밤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거야. 사실 승진시켜주지 않아도 난 절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않을거야. 대갈통이 달아나면 주둥아리도 함께 옮겨갈 텐데 무슨 수로 벙끗해? 아무튼 태후가 날 이끌어 줬다는 것은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니, 일단 안심이 되는군.‘ - P91

관안기가 말했다.
"이분이 바로 본회의 진 총타주요."
위소보는 고개를 약간 쳐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아주 온화한데 눈빛은 섬광처럼 예리했다. 위소보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절로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얼른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 P163

총타주가 웃으며 말했다.
"모십팔의 말을 들으니 소형제는 양주 득승산에서 묘책을 써 청군 군관 흑룡편 사송을 죽였다더군. 강호에 나오자마자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야. 한데 오배는 어떻게 제압했지?"
위소보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가슴이 쿵덕쿵덕 방망이질을 하는 바람에 평상시에 늘 해오던 자화자찬이나 허풍 따위는 말끔히 다 잊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P164

총타주는 위소보를 잠시 응시하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나를 사부로 모시겠느냐?"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넙죽 엎드려 연신 큰절을 올렸다.
"네, 사부님!"
총타주는 이번에는 그를 일으키지 않고 큰절을 열댓 번 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젠 됐다."
위소보는 싱글벙글하며 일어났다.
너총타주가 다시 말했다.
"나의 성은 진이고, 이름은 근남이다. 이 ‘진근남‘ 세 글자는 강호에서 사용하는 이름이다. 넌 이제 내 제자가 됐으니 사부의 본명을 알아야겠지. 나의 본명은 진영화다. 영원할 영 자에 중화의 화자." - P171

위소보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백한풍은 너무 뜻밖이었다. 마박인, 왕무통 등은 물론이고 천지회 사람들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한풍이 전개한 금나수법은 비록 고절했지만 피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위 향주는 진근남의 제자인데 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명을 내지르며 눈물까지 흘렸으니, 무림의 일대 해괴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현정, 번강, 고언초 등은 모두 얼굴이 붉어지며 수치심을 금할 수 없었다. - P244

"형님을 죽인 놈은 평상시 천교에서 약을 팔던 서천천이라는 늙은이요! 남들은 그를 ‘팔비원후‘라고 부르기도 한다던데! 바로 천지회 청목당 소속이 아니오? 그걸 부인할 사람이 있소?"
번강과 현정 등은 서로 마주 보며 표정이 굳었다. 그들이 양류 골목으로 온 것은, 백씨 형제가 서천천에게 중상을 입혀 그걸 따지려던 것인데, 오히려 백씨 형제 중 맏이인 백한송이 서천천에게 죽음을 당했다니, 실로 뜻밖이었다. 번강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 P247

"반청복명의 얘기가 나왔고, 나중에 오랑캐를 몰아내면 홍무 황제의 자손을 다시 용좌에 받들자고 하면서 형님이 말했습니다. ‘황상은 미얀마에서 승하하시며 나이 어린 태자만 남겨두셨는데, 아주 영명하십니다. 지금은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지요. 그러자 그 늙은 놈이 대뜸 ‘진명천자는 대만에 있소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들은 소강, 요춘, 왕무통 등 군호들은 쌍방이 왜 싸움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옹계와 옹당, 계왕을 옹립할지 당왕을 옹립할지를 놓고 사달이 벌어진 것이었다. - P264

소강과 백한풍은 서로 마주 보며 풀이 팍 죽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풍제중의 무공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게다가 서천천은 당시 비록 살수를 전개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직접 시연해 보였다. 백씨 형제가 앞뒤에서 무서운 살초로 협공을 해오니, 자신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 P274

역시 예상했던 대로 전씨는 꿰맨 부위를 가르더니 두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무언가 큼지막한 물체를 안다시피 해서 끄집어냈다.
"잇?"
위소보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외침을 토했다. 돼지 배 속에서 나온 건 사람이었다.
전씨는 그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체구가 왜소하고 머리카락이 긴, 열서너 살쯤 돼 보이는 소녀였다. 얇은 옷을 입고 두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촐랑이는 것으로 보아 숨은 붙어 있는 게 분명했다. - P295

시종들은 위소보가 평서왕세자 옆자리에 앉아 있고, 좌중이 다 그를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귀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앞서 그가 바로 오배를 제압한 계 공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을 위해 모자까지 주워주자 얼른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소인들은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 P365

목검성은 천지회 북경의 수장인 위 향주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백한풍을 통해 이 어린아이가 무공은 형편없고 입만 살아 있는 천덕꾸러기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사부인 진근남이 전적으로 밀어주는 바람에 향주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주 침착한 게 의젓해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어리지만 뭔가 남다른 재주가 있는 모양이야.‘ - P156

위소보는 서천천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나서 말했다.
"서 삼형, 속상해할 필요 없어요. 노일봉 그놈은 제가 오응웅을 시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라고 했어요."
서천천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향주님."
그러면서도 속으론 별로 믿지 않았다.
‘또 얼토당토않은 뻥을 치는군. 오응웅은 평서왕부의 세자로서 얼마나 도도하고 건방진데, 설마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 - P175

강희는 무공을 연마한 후 아슬아슬하고 긴박감이 넘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몸이라 위험에 노출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직접 겪는 것처럼 위소보를 보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설령 시위들을 보내면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위소보를 보낼 것이었다. - P179

‘엄마가 기녀라는 사실을 모십팔 대형도 알고 있으니 끝까지 숨길순 없어 남의 진심을 알아내려면 우선 나부터 가장 꺼리는 치부를 털어놔야 해.‘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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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제 북경 말씨도 익숙해졌어. 몇 달 전에도 양주 사투리를 쓰지 않고 그렇게 말을 잘했다면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위소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삽시간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자신도 모르게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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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처럼 예리한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대지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변이 가까운 강남의 어느 큰길에서는 손에 창칼을 든 청나라 병사들이 대열을 이뤄 매섭게 불어오는 눈보라를 뚫고 죄수들을 북쪽으로 압송하고 있었다. 죄수들은 일곱 대의 수레에 실려 있었다. 앞쪽 세 대에는 서생 차림의 남자 세 명이 한 명씩 갇혀 있는데, 한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고 나머지 둘은 중년인이다. 뒤따르는 수레에는 여인들이 앉아 있고, 맨 마지막 수레에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인이 타고 있다. - P32

태호 주변에는 학식이 뛰어난 문사들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장씨 문중의 초빙을 받고는 장정의 실명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그의 진심어린 성의에 기꺼이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귀중한 역사자료를 편찬하는 작업을 보람 있게 여겨 장씨 문중에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머물면서 오류 수정과 윤색에 전력을 기하고, 자신의 소견도 글로 써서 삽입했다. 이 한 부의 ‘명사‘를 완성하기까지 적지 않은 재력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투자된 셈이다. - P49

오지영은 또 몇 마디 지껄였는데, 장윤성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자, 주절주절 ‘명사‘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는 이책을 단 한 장도 본 적이 없었다. 재능, 학식, 문체가 어쩌고저쩌고 한것은 돈을 좀 얻어내기 위한 헛소리고 수작에 불과했다. - P54

이황은 한술 더 떴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대를 풍진호걸로 여겨 기꺼이 친구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오육기가 물었다.
"어째서 잘못 봤다는 겁니까?"
이황의 음성은 낭랑했다.
"그대는 출중한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이바지하지 않고 악에 빌붙어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 한인 백성들을 핍박하며 의기양양, 그게 수치임을 모르니 친구가 되는 것이 부끄럽소이다." - P81

오육기는 다시 가슴을 가렸다.
"방금 선생께서 말씀하신 고론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께서 멸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에게 심금에서 우러난 충고를 해주셨는데 내 어찌 더 이상 자신을 숨기겠습니까? 저는 원래 강호 개방 출신이고 지금은 천지회 홍순당의 홍기紅旗 향주입니다. 맹세코 반청복명을 위해 뜨거운 피로 들끓는 이 한목숨을 다 바칠 것입니다." - P82

천지회는 대만 수복을 쟁취했던 국성야 정성공의 휘하 진영화 선생께서 창건한 조직으로, 근자에 복건, 절강, 광동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 P86

우리 천지회의 총타쥬이신 진영화 선생은 진근남이라는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강호의 기남아 영웅호걸입니다. 강호인이라면 그를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평생불식진근남平生不識陳近南, 취칭영웅야왕연就稱英雄也枉然‘, 평생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이라 불려도 헛되다는 말이 항간에 나돌겠습니까? - P87

서생은 선실 안으로 들어와 세 사람의 혈도를 풀고 관병 네 명의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등잔불을 밝혔다.
여유량 등 세 사람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서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의 이름을 좀 전에 황 선생께서 언급하셨는데… 성은 진, 이름은 근남입니다." - P95

아이는 텁석부리의 왼쪽 어깨를 떠받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린아이의 엄마가 소리쳤다.
"소보야, 소보야! 너 어딜 가는 거니?"
어린아이가 대꾸했다.
"이 친구를 좀 바래다주고 바로 돌아올게요."
텁석부리는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이 친구라... 하핫! 내가 네 친구가 되었구나!" - P112

이 아이는 기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위춘방이고, 아버지가 누군지는 그의 엄마조차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들 그를 그냥 ‘소보‘라 부를 뿐, 생전 성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텁석부리가 갑자기 묻자 어머니의 성을 끄집어낸 것이다. - P120

모십팔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북경으로 간다."
위소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북경에? 다들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왜 제 발로 호랑이굴을 찾아가죠?"
모십팔이 말해준 이유는 좀 엉뚱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오배란 놈이 무슨 만주 제일용사라는 말을 들었어. 빌어먹을! 천하 제일용사라고 하는 잡것들이 있더라고! 배알이 꼴려서 북경으로 찾아가 한번 겨뤄보려고 그런다!" - P149

위소보는 출신이 미천해 돈 많은 집안의 자식들을 아주 싫어했다. 당장 땅에다 퉤하고 침을 내뱉고는 씨부렁거렸다.
"빌어먹을, 이 어르신이 천리마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가 길을 막고 생난리를…." - P155

소계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공공! 공공!"
황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다 보니 마침 모십팔과 위소보에게 등을 보이게 되었다. 위소보는 재빨리 뛰어가 비수를 냅다 그의 등에 힘껏 꽂았다. 소계자는 나직이 신음을 토하더니 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 앞에는 해 노공이 바닥에 쓰러진 채 혼자 꿈틀거리고 있었다. - P219

해 노공이 다시 화를 냈다.
"잔말 말고 냉큼 가서 주사위를 가져와 열심히 연습하라고 했는데, 그동안 별로 실력이 늘지 않았잖아."
위소보는 ‘주사위‘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주에서 설화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사위놀이를 하는 데 전력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양주 바닥에선 ‘꾼‘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 P231

남자아이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위소보가 응답했다.
"난 소계자야, 너는?"
남자아이는 약간 주춤하더니 말했다.
"난・・・ 난 소현자야 넌 어느 공공 밑에 있는데?"
위소보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해 노공을 모셔." - P252

황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처벌은 너무 과중하지 않소?"
위소보는 내심 의아했다.
보 ‘황제의 목소리가 어린애 같아. 그리고 소현자와 비슷한 게… 정말웃기는데?‘ - P307

이때 한 소년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얼굴을 살짝 돌리는 순간 위소보의 입에서도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앗!"
그 소년 황제는 다름 아닌, 바로 매일 자기와 무예를 겨루던 그 소현자가 아닌가! - P311

매일 위소보와 무예를 겨루던 소현자가 바로 지금의 대청 황제 강희였던 것이다. 그의 본명은 ‘현엽‘인데 위소보가 자신을 몰라보고 이름을 묻자 장난기가 동해 그냥 아무렇게나 ‘소현자‘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 P315

그동안 강희는 위소보와 비무를 하는 것 외에 가끔 상서방으로 데려가 말벗을 삼곤 했다. 궁 안 무사들과 내관들은 상선감 소속의 어린 내관 소계자가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그를 만나면 감히 ‘소계자‘라 부르지 못하고 ‘계 공공, 계 공공‘ 하면서 친절하고도 공손하게 대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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