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는 숨을 몰아쉬며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오늘 이 야밤에 날 찾아온 목적이 뭐지?" 해 노공이 차분하게 말했다. "소인은 마마께 한 가지를 여쭈려고 합니다. 그래야 돌아가서 주군께 그대로 아뢸 수 있으니까요. 단경 황후와 효강황후, 정비, 영친왕.… 네 사람은 다 비명횡사했습니다. 주군은 그로 인해 출가를 했고요. 그들을 죽인 잔악한 흉수는 궁 안에 있는 무공 고수입니다. 외람되오나 태후께 여쭙고 싶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소인은 이제 나이가 많은 데다 눈도 멀고,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 풍전등화처럼 갈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그 흉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 P57
‘태후가 날 승진시킨 것은 어젯밤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거야. 사실 승진시켜주지 않아도 난 절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않을거야. 대갈통이 달아나면 주둥아리도 함께 옮겨갈 텐데 무슨 수로 벙끗해? 아무튼 태후가 날 이끌어 줬다는 것은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니, 일단 안심이 되는군.‘ - P91
관안기가 말했다. "이분이 바로 본회의 진 총타주요." 위소보는 고개를 약간 쳐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아주 온화한데 눈빛은 섬광처럼 예리했다. 위소보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절로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얼른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 P163
총타주가 웃으며 말했다. "모십팔의 말을 들으니 소형제는 양주 득승산에서 묘책을 써 청군 군관 흑룡편 사송을 죽였다더군. 강호에 나오자마자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야. 한데 오배는 어떻게 제압했지?" 위소보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가슴이 쿵덕쿵덕 방망이질을 하는 바람에 평상시에 늘 해오던 자화자찬이나 허풍 따위는 말끔히 다 잊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 P164
총타주는 위소보를 잠시 응시하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나를 사부로 모시겠느냐?"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넙죽 엎드려 연신 큰절을 올렸다. "네, 사부님!" 총타주는 이번에는 그를 일으키지 않고 큰절을 열댓 번 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젠 됐다." 위소보는 싱글벙글하며 일어났다. 너총타주가 다시 말했다. "나의 성은 진이고, 이름은 근남이다. 이 ‘진근남‘ 세 글자는 강호에서 사용하는 이름이다. 넌 이제 내 제자가 됐으니 사부의 본명을 알아야겠지. 나의 본명은 진영화다. 영원할 영 자에 중화의 화자." - P171
위소보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백한풍은 너무 뜻밖이었다. 마박인, 왕무통 등은 물론이고 천지회 사람들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한풍이 전개한 금나수법은 비록 고절했지만 피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위 향주는 진근남의 제자인데 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명을 내지르며 눈물까지 흘렸으니, 무림의 일대 해괴한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현정, 번강, 고언초 등은 모두 얼굴이 붉어지며 수치심을 금할 수 없었다. - P244
"형님을 죽인 놈은 평상시 천교에서 약을 팔던 서천천이라는 늙은이요! 남들은 그를 ‘팔비원후‘라고 부르기도 한다던데! 바로 천지회 청목당 소속이 아니오? 그걸 부인할 사람이 있소?" 번강과 현정 등은 서로 마주 보며 표정이 굳었다. 그들이 양류 골목으로 온 것은, 백씨 형제가 서천천에게 중상을 입혀 그걸 따지려던 것인데, 오히려 백씨 형제 중 맏이인 백한송이 서천천에게 죽음을 당했다니, 실로 뜻밖이었다. 번강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 P247
"반청복명의 얘기가 나왔고, 나중에 오랑캐를 몰아내면 홍무 황제의 자손을 다시 용좌에 받들자고 하면서 형님이 말했습니다. ‘황상은 미얀마에서 승하하시며 나이 어린 태자만 남겨두셨는데, 아주 영명하십니다. 지금은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지요. 그러자 그 늙은 놈이 대뜸 ‘진명천자는 대만에 있소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들은 소강, 요춘, 왕무통 등 군호들은 쌍방이 왜 싸움을 하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옹계와 옹당, 계왕을 옹립할지 당왕을 옹립할지를 놓고 사달이 벌어진 것이었다. - P264
소강과 백한풍은 서로 마주 보며 풀이 팍 죽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풍제중의 무공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게다가 서천천은 당시 비록 살수를 전개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직접 시연해 보였다. 백씨 형제가 앞뒤에서 무서운 살초로 협공을 해오니, 자신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 P274
역시 예상했던 대로 전씨는 꿰맨 부위를 가르더니 두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무언가 큼지막한 물체를 안다시피 해서 끄집어냈다. "잇?" 위소보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외침을 토했다. 돼지 배 속에서 나온 건 사람이었다. 전씨는 그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체구가 왜소하고 머리카락이 긴, 열서너 살쯤 돼 보이는 소녀였다. 얇은 옷을 입고 두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촐랑이는 것으로 보아 숨은 붙어 있는 게 분명했다. - P295
시종들은 위소보가 평서왕세자 옆자리에 앉아 있고, 좌중이 다 그를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귀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앞서 그가 바로 오배를 제압한 계 공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을 위해 모자까지 주워주자 얼른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소인들은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 P365
목검성은 천지회 북경의 수장인 위 향주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백한풍을 통해 이 어린아이가 무공은 형편없고 입만 살아 있는 천덕꾸러기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사부인 진근남이 전적으로 밀어주는 바람에 향주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주 침착한 게 의젓해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어리지만 뭔가 남다른 재주가 있는 모양이야.‘ - P156
위소보는 서천천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나서 말했다. "서 삼형, 속상해할 필요 없어요. 노일봉 그놈은 제가 오응웅을 시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라고 했어요." 서천천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향주님." 그러면서도 속으론 별로 믿지 않았다. ‘또 얼토당토않은 뻥을 치는군. 오응웅은 평서왕부의 세자로서 얼마나 도도하고 건방진데, 설마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 - P175
강희는 무공을 연마한 후 아슬아슬하고 긴박감이 넘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몸이라 위험에 노출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직접 겪는 것처럼 위소보를 보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설령 시위들을 보내면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위소보를 보낼 것이었다. - P179
‘엄마가 기녀라는 사실을 모십팔 대형도 알고 있으니 끝까지 숨길순 없어 남의 진심을 알아내려면 우선 나부터 가장 꺼리는 치부를 털어놔야 해.‘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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