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처럼 예리한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대지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변이 가까운 강남의 어느 큰길에서는 손에 창칼을 든 청나라 병사들이 대열을 이뤄 매섭게 불어오는 눈보라를 뚫고 죄수들을 북쪽으로 압송하고 있었다. 죄수들은 일곱 대의 수레에 실려 있었다. 앞쪽 세 대에는 서생 차림의 남자 세 명이 한 명씩 갇혀 있는데, 한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고 나머지 둘은 중년인이다. 뒤따르는 수레에는 여인들이 앉아 있고, 맨 마지막 수레에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인이 타고 있다. - P32
태호 주변에는 학식이 뛰어난 문사들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장씨 문중의 초빙을 받고는 장정의 실명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그의 진심어린 성의에 기꺼이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귀중한 역사자료를 편찬하는 작업을 보람 있게 여겨 장씨 문중에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머물면서 오류 수정과 윤색에 전력을 기하고, 자신의 소견도 글로 써서 삽입했다. 이 한 부의 ‘명사‘를 완성하기까지 적지 않은 재력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투자된 셈이다. - P49
오지영은 또 몇 마디 지껄였는데, 장윤성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자, 주절주절 ‘명사‘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는 이책을 단 한 장도 본 적이 없었다. 재능, 학식, 문체가 어쩌고저쩌고 한것은 돈을 좀 얻어내기 위한 헛소리고 수작에 불과했다. - P54
이황은 한술 더 떴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대를 풍진호걸로 여겨 기꺼이 친구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오육기가 물었다. "어째서 잘못 봤다는 겁니까?" 이황의 음성은 낭랑했다. "그대는 출중한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이바지하지 않고 악에 빌붙어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 한인 백성들을 핍박하며 의기양양, 그게 수치임을 모르니 친구가 되는 것이 부끄럽소이다." - P81
오육기는 다시 가슴을 가렸다. "방금 선생께서 말씀하신 고론에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께서 멸족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에게 심금에서 우러난 충고를 해주셨는데 내 어찌 더 이상 자신을 숨기겠습니까? 저는 원래 강호 개방 출신이고 지금은 천지회 홍순당의 홍기紅旗 향주입니다. 맹세코 반청복명을 위해 뜨거운 피로 들끓는 이 한목숨을 다 바칠 것입니다." - P82
천지회는 대만 수복을 쟁취했던 국성야 정성공의 휘하 진영화 선생께서 창건한 조직으로, 근자에 복건, 절강, 광동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 P86
우리 천지회의 총타쥬이신 진영화 선생은 진근남이라는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강호의 기남아 영웅호걸입니다. 강호인이라면 그를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평생불식진근남平生不識陳近南, 취칭영웅야왕연就稱英雄也枉然‘, 평생 진근남을 모르면 영웅이라 불려도 헛되다는 말이 항간에 나돌겠습니까? - P87
서생은 선실 안으로 들어와 세 사람의 혈도를 풀고 관병 네 명의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등잔불을 밝혔다. 여유량 등 세 사람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서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의 이름을 좀 전에 황 선생께서 언급하셨는데… 성은 진, 이름은 근남입니다." - P95
아이는 텁석부리의 왼쪽 어깨를 떠받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주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린아이의 엄마가 소리쳤다. "소보야, 소보야! 너 어딜 가는 거니?" 어린아이가 대꾸했다. "이 친구를 좀 바래다주고 바로 돌아올게요." 텁석부리는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이 친구라... 하핫! 내가 네 친구가 되었구나!" - P112
이 아이는 기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위춘방이고, 아버지가 누군지는 그의 엄마조차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다들 그를 그냥 ‘소보‘라 부를 뿐, 생전 성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텁석부리가 갑자기 묻자 어머니의 성을 끄집어낸 것이다. - P120
모십팔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북경으로 간다." 위소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북경에? 다들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왜 제 발로 호랑이굴을 찾아가죠?" 모십팔이 말해준 이유는 좀 엉뚱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오배란 놈이 무슨 만주 제일용사라는 말을 들었어. 빌어먹을! 천하 제일용사라고 하는 잡것들이 있더라고! 배알이 꼴려서 북경으로 찾아가 한번 겨뤄보려고 그런다!" - P149
위소보는 출신이 미천해 돈 많은 집안의 자식들을 아주 싫어했다. 당장 땅에다 퉤하고 침을 내뱉고는 씨부렁거렸다. "빌어먹을, 이 어르신이 천리마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가 길을 막고 생난리를…." - P155
소계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공공! 공공!" 황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다 보니 마침 모십팔과 위소보에게 등을 보이게 되었다. 위소보는 재빨리 뛰어가 비수를 냅다 그의 등에 힘껏 꽂았다. 소계자는 나직이 신음을 토하더니 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 앞에는 해 노공이 바닥에 쓰러진 채 혼자 꿈틀거리고 있었다. - P219
해 노공이 다시 화를 냈다. "잔말 말고 냉큼 가서 주사위를 가져와 열심히 연습하라고 했는데, 그동안 별로 실력이 늘지 않았잖아." 위소보는 ‘주사위‘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주에서 설화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사위놀이를 하는 데 전력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양주 바닥에선 ‘꾼‘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 P231
남자아이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위소보가 응답했다. "난 소계자야, 너는?" 남자아이는 약간 주춤하더니 말했다. "난・・・ 난 소현자야 넌 어느 공공 밑에 있는데?" 위소보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해 노공을 모셔." - P252
황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처벌은 너무 과중하지 않소?" 위소보는 내심 의아했다. 보 ‘황제의 목소리가 어린애 같아. 그리고 소현자와 비슷한 게… 정말웃기는데?‘ - P307
이때 한 소년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얼굴을 살짝 돌리는 순간 위소보의 입에서도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앗!" 그 소년 황제는 다름 아닌, 바로 매일 자기와 무예를 겨루던 그 소현자가 아닌가! - P311
매일 위소보와 무예를 겨루던 소현자가 바로 지금의 대청 황제 강희였던 것이다. 그의 본명은 ‘현엽‘인데 위소보가 자신을 몰라보고 이름을 묻자 장난기가 동해 그냥 아무렇게나 ‘소현자‘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 P315
그동안 강희는 위소보와 비무를 하는 것 외에 가끔 상서방으로 데려가 말벗을 삼곤 했다. 궁 안 무사들과 내관들은 상선감 소속의 어린 내관 소계자가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그를 만나면 감히 ‘소계자‘라 부르지 못하고 ‘계 공공, 계 공공‘ 하면서 친절하고도 공손하게 대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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