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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평점 :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헤세..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헤르만 헤세 Herman Hesse(1877. 7. 2. ~1962. 8. 9.)의 책 한두권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왠지 헤세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고 치부될 수도 있을 정도로 헤세는 일종의 책을 읽는 사람의 성지와도 같은 사람이고 알을 깨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데미안'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도 책 좀 읽는 사람 축에 끼기 힘들 것 같다. 그렇지만 데미안을 제외하고 헤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제목만 들어 봤지 실제로 읽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헤세의 책이기도 하다.
나같은 경우만 해도 헤세의 책을 거의 읽어 보기는 했지만 너무나 오래전인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문학에 미쳐서 읽었던 전집 중에 몇 권이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도 다시 들춰봐야 기억을 할 수 있다. 그나마 데미안 정도는 5~6년에 한번씩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또 꽤 오래 되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새로웠다. 이건 마치 모든 사람이 '어린 왕자'를 읽었지만 '어린 왕자'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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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나왔다는 것 외에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헤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과시하는 연애편지..
처음 이 책을 잡았을 때는 이 책의 정체가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사진이 많고 짤막한 글로 이루어져 있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을 펼치면 이 책은 기행에세이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헤세의 대표적인 4개의 작품인 '수레바퀴 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를 읽어 주는 두번째 장을 보면 헤세작품 해설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 나는 이 책을 헤세에게 보내는 작가의 연애편지라고 생각을 했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작가는 자신이 얼마나 헤세를 사랑하는지.. 자신의 인생에 헤세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헤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혀 숨길 생각없이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나는 정여울이라는 작가에 대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이외에는 전혀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만약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남편이 이 책을 읽으면 질투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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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독일의 대문호.. 소설가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문호(文豪)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감성적인 사진과 글로 헤세의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을 보여 준다..
작가는 사진가인 이승원과 함께(였는지 아니면 따로 갔는지..) 헤르만 헤세의 자취를 따라 간다. 헤세는 독일의 칼프에서 태어나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색깔 고운 사진과 함께 사진에 대한 단상을 서정적으로 쓰고 있다. 거기다가 각 페이지마다 헤세의 작품 속에 나오는 구절들을 삽입했다. 이승원의 사진과 정여울의 글과 헤세가 만나니 이전에 읽었던 헤세를 마음속으로부터 끌어 올린다. 헤세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헤세를 잊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헤세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그리고 헤세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헤세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전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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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 심리학자, 한때 신화에 미쳤을 때 칼 융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집단무의식을 주창했다.>
칼 융의 눈으로 헤세를 보다..
하지만 두번째 장에서 뜻밖에 칼 융 Karl Jung (1875 7. 26.~1961. 6. 6.)을 만나게 된다. 4개의 작품의 내용을 일러 주고 인물들의 심리를 해석할 때 칼 융의 심리학을 계속해서 인용을 하고 있다. 이전에는 헤세와 융의 접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나이도 2살 차이밖에 나지 않고 같은 나라인 스위스에서 살았고, 사망한 해도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궁금해서 찾아 보니 헤세가 융의 제자와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스위스로 이주한 이후에 쓴 작품들이 융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누군가 나에게 융에 대해서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면 '신화'와 '원형'이라는 난 딱 두 단어로 대답을 할 것이다. '개인의 무의식이 집단화되어서 집단무의식이 되고 그 집단무의식이 고대에 서술되어 표현된 것이 신화이고 그 신화의 구조를 단순화시켜서 파헤쳐 보면 하나의 원형에 도달하게 된다' 정도로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헤세와 융, 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뜬금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접점을 알게 되어 기뻤다.
작가는 두번째 장에서 칼 융과 그 제자들의 심리학을 인용해서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을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듣고 있자니 헤세가 정말 융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소설을 썼나 싶다가도 융의 심리학 자체가 원형을 얘기하는 것이고 헤세의 소설 역시 큰 틀에서 원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딱히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분석의 틀로써 활용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조금은 살짝 과하다..
내 생각에는 작가는 의도적으로 칼 융을 헤세에게 대입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부각시킨 것 같다. 그런데 융이 너무나도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작가의 시각이 위축되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사랑하는 감정은 틀림이 없지만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연애를 잘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충분히 사랑한다면 그냥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됐을텐데..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소극적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아닐 수도 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데미안을 그리워 하고.. 골드문트를 동경하다..
어릴 때부터 숱한 책을 읽어 왔지만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책들중에 어지간한 책은 한 번 읽고 또 읽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데미안만큼은 특별하다. 10대에 처음 읽고 거의 5년에 한번씩은 데미안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데미안이라고 제목에 붙어 있는 책도 4권이나 된다. 나에게 데미안이 특별한 이유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겠지만 나는 언제나 싱클레어였고 나를 괴롭히는 크로머가 사람이든 상황이든 항상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항상 데미안은 없었고 아브락사스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나이가 더 들었을 때는 내가 데미안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크로머가 되어 주위에 있는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데미안은 어느 인물에게 나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리고.. 어차피 나르치스가 될 수 없는 바에야 골드문트는 연민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제목은 지와 사랑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지와 사랑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인 걸 처음 알았다.
분명히 데미안을 찾고 있을 것이다..
책의 페이지수가 400페이지가 넘는다. 하지만 책의 1/3 가량이 사진이고 1,3장은 짤막한 에세이이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헤세에 한번쯤 빠져 봤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을 데미안을 찾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을 것이다. 헤세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헤세의 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2장을 잘 읽어 보면 어째서 헤세가 위대한 작가이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작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다른 것은 몰라도.. 헤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듬뿍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있었던 헤세에 대한 애정도 다시금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헤세의 책들을 책장 한구석에 모아 놓게 되었다.
한때 헤세에 대해서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면.. 무조건 추천..
헤세를 읽어 보지 않았는데 헤세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