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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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재난의 시작
부인은 걱정이 됐다. 아픈 남편을 집에 두고 일하러 나왔는데 퇴근이 늦어진다. 119에 연락을 해서 남편이 잘 있는지 확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기준의 팀이 배정되어 아파트로 출동을 했다. 문은 잠겨 있고,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기준은 창문을 통해 아파트로 진입을 하기로 한다. 아파트에 진입하는 순간, 큰 개 한마리가 창문을 통해 뛰쳐나갔다.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방안을 살펴 보니 남자가 죽어 있다. 기르고 있던 개들도 모두 죽어 있다. 사람도 개도 눈은 시뻘겋다. 여기는 화양시, 서울의 북쪽에 붙어 있는 도시를 고립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전염병은 이렇게 발견됐다.

 

정유정. (1966 ~ )


28일간 지옥이 된 도시, 그 안의 사람들
<28>은 사람과 개를 통해 전염이 되는 정체불명의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지옥이 된 화양시가 배경이다. 전염병이 처음에 어떻게 화양시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고, 처음에는 병의 원인은 물론 전염이 되는 메카니즘도 알 수 없어서 시민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지만 일부 항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자신의 목숨만을 돌보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혼란의 와중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고,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것처럼 참혹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피가 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인수공통전염병이 화양시를 덮치고 별다른 대책없이 시민들은 죽어 나간다. 이 틈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지옥을 체험하게 된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동물까지 그렇다
<28>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등장인물들이 많고 소설의 시점은 각 등장인물들의 관점을 돌아가면서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그에 맞게 행동을 한다. 프롤로그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재형이다. 예전에 개썰매 대회에서 개들을 희생시켜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진 수의과 의사이다. 한참 존경을 받다가 과거를 파헤친 신문기사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 전염병을 맞이하게 된다. 서재형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신문기자가 김윤주이다. 정의의 사도로 나서 서재형을 망가뜨리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서재형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가장 비중이 큰 두 인물이다.


작가는 비극을 담당하는 두 사람도 따로 준비를 해 두었다. 한기준은 소방대원으로 계속해서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다해 시민들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동안 자신의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가족을 죽인 복수를 하기 위해 원수를 찾아 나선다. 한기준이 복수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4년차 간호사인 노수진은 처참하게 망가져 버리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한기준이 소방관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면 노수진은 간호사로서 임무에 충실하다. 역시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픔을 지니고 있는데다 마지막에는 여자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공격을 받고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겪는다.


이 지옥같은 곳에는 인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링고라는 개를 등장시켜서 개의 시점까지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던 개 스타를 잃은 링고 역시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원수를 찾아 다닌다. 소설 속에서 가장 악독한 역할을 맡은 박동해도 스스로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벌이고 다닌다. 이 모든 사람들, 동물들의 시점을 모두 설명하기 때문에 각 인물들이 설득력을 가진다. 처음에는 따로 놀던 인물들이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촘촘히 엮여가는 관계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디타로드(Iditarod)의 경주 코스. 오른쪽 아래의 앵커리지에서 출발하여 왼쪽 위에 보이는 놈(Nome)까지 장장 1,600km를 달리는 경주이다. 주인공인 서재형은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에서 개들을 희생시켜 살아 남고, 개에 대한 미안함과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개인의 연약함, 권력의 비정함
피가 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정유정 작가의 특성이기도 하고 장기이기도 하다. 전작인 <7년의 밤>이나 다음 작품인 <종의 기원>과 다른 점이라면 두 작품은 단지 한 사람의 잔혹한 면을 그 끝까지 파고 들었다면, <28>은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맞이한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 더 집단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버려 무정부상태에 빠진 화양시에서 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의해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위에 의지해서 행동을 선택해 나간다. 당연히 게중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화양시를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생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화양시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큰 불행이며, 그 곳을 탈출하려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염병을 화양시 밖으로까지 퍼뜨리는 것은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구나 화양시는 인구 밀집지역인 서울에 붙어 있는 도시이다. 서울로 전염병이 퍼지면 그 피해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국 정부는 화양시민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길목을 막아 버린다. 화양시를 빠져나가려는 화양시민들과 길목을 막고 있는 군인들 사이에는 충돌이 벌어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정부는 화양시의 전염병이 다른 도시로 퍼지지 않도록 화양시를 폐쇄해 버리고 시민들은 이에 저항하여 집단행동을 한다.


사회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중 세 번째로 읽은 책이다. 손에 잡히는대로 읽다 보니 순서대로 읽지 않고 <7년의 밤>, <종의 기원>, <28>의 순서로 읽었다. 그런데 이 읽는 순서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위에서 쓴 것처럼 앞의 두 책은 오직 한 사람만을 깊이 파고 들었고, <28>은 여러 사람과 함께 권력까지 다루었기 때문에 대조가 된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하라고 하면 난 앞의 두 작품이 더 마음에 든다. <28>에서도 각 인물들에 대한 표현은 탁월하다. 하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려고 한 시도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져셔 우화처럼 느껴졌다.


먼저 읽은 두 작품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그 상황을 피해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28>은 배경 자체가 좀 작위적인 느낌이다. 인수공통전염병이 무차별적으로 퍼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화양시에 꼼짝없이 갇혀서 이도저도 못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한 도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정부가 화양시의 모든 사람들을 모두 희생시키고 다른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습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주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극한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작위적인 장치를 노골적으로 배치했다는 느낌이다. 개인의 심리와 상황을 다루는 솜씨에 비하면 사회와 권력을 만져서 개연성을 만들어 내는데는 충분히 솜씨를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다뤄서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각 인물들에 대해서 충분히 빠져들지 못한 것은 아쉽다. 재미는 있지만 다른 두 작품에 비해서 흡입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마지막에 약간의 아쉬움에 대해서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28>이 재미없는 소설은 아니다. 긴장감도 넘치고 읽으면서 계속해서 뒷부분이 궁금하다.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굉장히 긴 소설이긴 하지만 지루할 틈없이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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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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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심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건 모세의 등허리에 패인 열 줄 핏자국입니다. 성난 시나이 산 가슴 터지며 내뿜는 불꽃입니다. 아니, 그건 불꽃러엄 뒹구는 하비루 노예들의 살점들이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억울하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죄 없이 맞아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살점들의 아우성이 바로 십계명이란 말입니다.
P. 109 ~ 110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스라엘 고대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이스라엘의 고대사를 보는 관점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는 성서에 씌여 있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이면서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성서의 주제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야훼 하느님의 역사이며, 완결된 줄 알았던 구약의 역사가 신약으로 이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까지 연결이 된다. 어떤 사회현상이든지 종교가 개입되게 되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진다. 종교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든,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든 보통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처음 해방신학을 알았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구속사가 아닌 민중 해방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성서의 신성함을 깨부수는 것 같아서 신선한 느낌도 받았고, 사울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초기 영웅적인 왕들에 대해서 민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으로 폄하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폄하할 때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예수를 온 세상의 구원자로 보기보다는 이스라엘 해방의 지도자로 바라 본 이스라엘 민중들의 시선도 처음에는 좀 불편했다. 운동권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기독교에 덧씌워서 종교를 더럽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 관점에 마음이 더 간다. 문익환 목사님(존경의 뜻을 담아 다른 책의 저자들과는 달리 '님'자를 꼭 붙이고 싶다.)은 대표적인 운동권 목사였고, 당연히 이 책은 굉장히 민중적인 관점에서 썼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절반 정도만 맞는 것 같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 1918 ~ 1994. 만주 북간도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공동번역성서 번역에도 참여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이후 재야운동권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집트로부터 시작하는 노예해방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디서부터 바라볼 것인가는 종교적,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온갖 신화시대를 지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야곱의 자손들이 모두 이집트로 넘어가는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에게 모세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 따위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바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의 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쯤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일단 좀 잊자.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 민중사>이고 문익환 목사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중심으로 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받던 노예계급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상. 하비루(이집트의 노예계급)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한 실질적인 이스라엘 최초의 민족 지도자.


노예계급과 농민혁명군의 해방전쟁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
문익환 목사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 개의 이질적인 민중의 결합으로 본다. 하비루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민중들이다. 모세가 이들을 이집트의 지배계급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끌고 나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라는 혈통적인 결속감보다는 피지배인으로서의 계급성이 더 강조가 된다. 이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한다. 모세의 사후에는 여호수아를 거쳐 필요할 때마다 판관들이 나타나 이들을 이끌었고,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을 거쳐서 남쪽 유다가 이들의 전통을 잇는다. 이들의 하느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엘로힘'이며, 군신이며, 유목민의 하느님이다.


다른 구성원은 농민혁명군이다. 이들은 아마도 하비루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중에 결합된 사람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던 토착민들일 수도 있다. 이들의 하느님은 '엘 샫다이'이며, 풍요로움의 신이다. 이 전통은 사울과 요나단, 여로보암을 거쳐서 북이스라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농경이 주된 생업이었던 농민혁명군은 풍요로움을 주는 가나안 토착신앙이었던 바알과 아세라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에 비해서 바알 신앙에 자주 무너졌던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에 따르면,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사사의 시대, 왕국의 시대는 하비루군과 농민혁명군이 결합한 해방전쟁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배계급을 때려부수고 노예를 해방하여 자유를 쥐어주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노예시절 쉬지 못했던 이집트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했다고 한다. 민중의 삶을 지배자의 논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과 설교는 왕국의 분열 이후 피폐해지는 민중들을 다시 구해내기 위한 하느님의 안타까워 하는 목소리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민중운동가가 아닌 신학자로서의 면모
<히브리 민중사>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책의 내용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재야운동에 몸바친 분이고, 그의 삶이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을지언정, 신학적인 깊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발간되었다는데 대한 관심으로 책을 구매했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읽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보기좋게 엇나갔다. 약력을 확인해 보니 문익환 목사님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깰 정도로 대단한 신학자였고, 책 또한 본격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자신의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써 내려갔다. 위에서 내 예상이 절반만 맞았다고 했는데, 신앙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민중해방의 관점만을 서술한 다른 해방신학 책과도 분명히 궤를 달리한다. 평범한 기독교인이 읽을만한 이스라엘 종교사로서의 가치도 충분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도 많이 벗어났다.

 

니콜라 푸생, <다윗의 승리> 1627년경,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영웅 다윗에게 천사가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쉬우면서도 깊은데 가슴도 뛴다
문익환 목사님은 <히브리 민중사>를 구어체로 썼다.  학술적인 책을 구어체로 썼다는 것도 이례적이다.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읽을수록 말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쉽다. 그렇다고 가볍게 쓴 책은 아니다. 읽을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문익환 목사님의 통찰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민족을 바라보는 모습에 가슴이 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한 종교인이 가져야 할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쓴 글이다.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내용까지 좋으니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 민중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에 정착하고, 사사의 시대를 지나 초기 왕국시대와 남북으로 나뉜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존의 기독교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도 거부감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문익환 목사님이 이 책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언자의 시대를 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까지 책을 쓰셨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의외로 전혀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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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음악의 글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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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서양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다른 천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음악의 천재는 그냥 모차르트와 동의어이다. 굉장히 식상하긴 하지만 천재 모차르트가 가진 이미지를 얘기할 때, 영화 <아마데우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면 또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보면서 질투를 했던 살리에리를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을 읽을 때는 살리에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빈의 궁정악장으로서 궁정사회에서 음악의 최정점에 있었고, 모차르트는 시민사회와 궁정사회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리에리의 자리는 모차르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나 탐을 내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설명 필요없음.


궁정사회의 말단인가? 시민사회의 우두머리인가?


모차르트는 어려서 이미 천재로 유명했다.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손에 이끌려 누나인 난네를과 함께 두 차례의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귀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왕실로부터도 찬사를 받았을 때, 모차르트는 스스로 귀족의 일원이 된 것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귀족의 생활이 익숙했고, 많은 귀족들이 모차르트를 기억했다. 모차르트는 스스로를 궁정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귀족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의 많이 보아온 귀족들과 자신을 동일시 했을 수도 있다. 자기 정도의 천재성이면 당연히 귀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궁정사회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비록 궁정사회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음악을 만들어 귀족들에게 바치는 음악가였을 뿐이다. 모차르트 이전 세대인 하이든은 좀 심하게 말하면 거의 귀족집안의 종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종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평생을 집사의 복장을 하고 에스타르하치 가문에 봉사하는 집사의 모습으로 살았다. 모차르트 이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은 궁정사회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의 작곡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하이든과 베토벤 사이에 끼여 있는 음악가였고, 궁정사회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자리를 굳건히 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는 궁정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해서 시민사회로 쫒겨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의지로 시민사회의 일원이 된 것일까? 이 책은 후자의 입장에서 글을 전개해 나간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1897 ~ 1990)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문명화 과정>이라는 저서로 유명하다.


천재가 아닌 모차르트를 조망한다


모차르트는 분명히 천재다. 게다가 괴퍅한 천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역시 영화 <아마데우스>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 있지만, 그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평범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p. 97)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의 영혼인 예술성은천상으로 올려 보내고, 모차르트의 육체는 비루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의 삶을 더욱 극적으로 왜곡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생을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로서만 본다면 모차르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의 입장이다.


모차르트의 삶이 처음에는 궁정사회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와 부딪히면서 점점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고 파악을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후반기로 갈수록 귀족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주를 이룬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뒤로 갈수록 예약음악회의 형식으로 위촉받지 않은 곡을 연주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저자는 이것이 모차르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사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모차르트의 의지보다는 궁정사회에서 일정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밀려 나와서 시민사회에서 자구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내 의견은 근거없는 그냥 느낌이다.)

 

빈의 풍경. 빈은 오스트리아의 수도로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했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사회가 만들어 낸 모차르트를 그려낸 사회학자


책의 저자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책을 읽기 전에는 누군지 잘 몰랐다. 음악사가가 아니면 전기작가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검색을 해 보니 굉장히 저명한 사회학자다. 사회학에 관심은 있지만 많은 책을 읽어 보지 못해서 그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책을 읽다 보면 모차르트가 살았던 당시의 유럽사회, 모든 문화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려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은 그동안 읽었던 책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모차르트의 삶을 조명하고 있고, 잘 모르는 용어들이 나와서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저자에 대해서 좀 알고 나니 책이 왜 이런 모습이었는지 이해가 됐다.


처음 몇십페이지는 읽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정도 책의 서술방식에 익숙해 지고 나서는 빠르게 읽을 수 있다.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져서 유치한 놀음이나 하다 음악 하나 뚝딱 만들어 치우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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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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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쩡하게 성공한 변호사
벤저민 브래드포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월스트리트라고는 해도 그다지 치열하지 않은 신탁유산 전문 변호사 일을 하면서 아름다운 아내 베스와 큰 아들 애덤, 태어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조시와 함께 살고 있다. 겉으로는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 것 같지만 베스와 항상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베스는 원래 소설가를 꿈꿨지만 출판사로부터 여러차례 거절을 당한 후 벤저민의 아이를 갖게 된 이후로는 소설가의 삶을 포기하게 됐다. 둘째까지 태어난 이후로는 작가로서 사는 것은 이미 요원한 일이 됐다.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이 벤저민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하는 마음까지 갖고 있다.


벤저민은 어릴 때는 사진가가 되고 싶었고, 실력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갈등을 겪은 끝에 사진가의 꿈은 접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었다. 꿈은 비록 접었지만 집의 지하실에는 암실을 만들어 놓았고, 4만5천 달러에 달하는 카메라 장비도 구매해 놓았다. 지하실은 온전히 벤저민의 공간으로 벤저민이 유일하게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대학시절 애인으로 잠깐 동거를 했던 케이트 브라이머는 종군기자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부럽다. 케이트 브라이머는 별로 큰 역할이 없으니 책을 읽을 때 잊어도 상관없다.

 

더글러스 케네디 Douglas Kennedy, 1955년 ~ . 미국.


아내의 외도로 시작된 불행
베스가 심상치 않다. 갑자기 이상한 지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으로 벤저민에게 살갑게 대한다. 아내가 갑자기 변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벤저민은 촉을 발동시키고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거짓말이 늘어나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발전한다. 언제나 나쁜 예상은 들어맞기 마련. 베스는 주변에 살고 있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실패한 사진가, 게리 서머스와 불륜에 빠졌다. 아내와 게리가 키스하는 장면까지 목격한 벤저민은 오히려 아내와 사이가 틀어질까봐 걱정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게리의 집으로 찾아간다.


뻔뻔한 게리. 말다툼. 결국 벤(벤저민)은 홧김에 술명으로 게리를 내리치고 게리는 죽는다.

 

주인공인 벤저민은 월스트리트의 전도유망한 변호사로 나온다.


바꿔친 후 사라져 버리기
1부가 끝이 날 때(소설은 3부로 되어 있다) 단순 치정극이던 소설은 벤이 게리를 죽이면서 순식간에 스릴러가 된다. 벤은 살인자가 되고 여러가지 선택지를 놓고 순간적으로 고민을 한다. 자수를 해서 단번에 망가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보니 끔찍하다. 도망자가 되어 살 자신도 없다. 범죄자도 싫고 도망자도 싫었던 벤은 엉뚱한 결정을 하게 된다. 게리와 자신의 삶을 바꾸고 사라져 버리기로 한다.


게리는 천애고아나 마찬가지라 찾을 사람이 없다. 게리의 지하실에서 게리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게 가장 급하다. 게리의 모든 우편물들을 다른 곳으로 배달되도록 돌려 놓는다. 벤 자신의 얼굴로 사회보장카드를 만들고 게리의 신분을 훔친다. 아내가 찾지 않도록 게리 이름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메일도 보내 놓았다. 이후 친구의 요트에 게리의 시신을 싣고 자동항해 후 폭발하도록 장치를 해 놓는다. 물론 게리는 벤의 옷을 입고 있다. 결국 벤은 게리로 신분을 바꿔서 떠나 버리고, 게리는 벤이 되어서 요트폭발과 함께 시신은 산산조각이 되어 바다 속에 수장되어 버린다. 완전범죄가 성공했다.

 

실수로 게리 서머스를 살해한 벤저민은 서머스의 시신을 유기한 후 신분을 바꾼 후에 평생 꿈꾸던 사진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잘 이해되지 않는 주인공의 행보
굉장히 미국적인 스릴러다. 여기서 미국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라면 과연 이런 바꿔치기가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라면 여기저기 수많은 CCTV가 달려 있다. 모든 국민은 지문날인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어디선가 월급을 받으려면 반드시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한다. 땅도 좁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분 바꿔치기가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싸하긴 하다. 게다가 소설의 배경이 1995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신분바꿔치기의 가능성보다도 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주인공의 행보였다. 벤은 게리를 죽인 후에 용의주도하게 살인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 게리의 모든 정보를 거머쥘 수 있었고, 게리가 다른 주로 여행하는 것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게리를 완벽하게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꼭 신분을 바꿔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 요트를 폭파시켜서 시체를 없앨 생각을 했다면 요트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가서 돌에 매달아 시체를 유기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시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딱히 사랑하는 가족(아내는 아닐 수 있지만 아이들도 못 만나잖아)과 헤어지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 같은데..

 

벤저민은 우연한 기회에 특종사진을 찍게 되고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위기를 맞게 된다.


 

애인도 얻고 명성도 얻었지만..
신분을 바꾼 벤은 자동차를 달려 서북부 몬태나 주의 중소도시인 마운틴 풀스에 정착을 한다. 이 곳에서 꿈이었던 사진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게리의 이름으로 활동을 한다.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루디 워렌은 무례한 술주정뱅이이지만 사진을 볼 줄 아는 명칼럼니스트이다. 벤이 찍어 놓은 몬태나 주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몰래 몬태난 지에 보냈고, 이 덕에 벤은 몬태난 지와 사진 연재 계약을 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 몬태난 지의 사진부장인 앤 에임스와 사랑에 빠진다. 벤은 자신의 사진에 반한 주디 윌머스와 계약을 해서 사진전시회까지 준비한다.


여기까지만 하지.. 주디와 함께 무스호수의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숲에 불이 나고, 벤은 생생한 화재현장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행운을 얻는다. 전국 단위의 모든 잡지에 이 사진들이 실리고 방송에도 나간다. 하지만 이건 행운이기도 하지만 벤에게는 불행이기도 하다. 게리 서머스의 이름이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되고, 게리의 행방을 찾던 아내 베스가 게리를 찾아 사진전시회까지 들이닥치게 된다. 게다가 벤의 방을 뒤지던 루디 워렌은 벤의 범죄행각을 눈치채고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벤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나는 벤의 행동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범죄를 치밀하게 감춘 사람답지 않게 마운틴 풀스에 정착한 이후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한다. 사라진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게리를 아는 누군가, 특히 아내가, 게리를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최소한 몇 년은 숨만 쉬고 살아야 완전범죄가 완성이 될텐데, 벤은 그런 경각심이 하나도 없다. 결국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벤저민은 모든 것을 알아챈 루디 워렌에게 협박을 받고,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좀 아쉽지만 재미는 있다
발표된지 꽤 오래된 소설이다. 20년이 넘게 지났으니 현재의 시점과 비교해 볼 때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미국 소설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역시 꽤 많다. 시간과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주인공인 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좀 많다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완전히 몰입을 해야 더욱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 때문에 완전하게 몰입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게 또 시간과 공간의 큰 차이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대체적으로 추천할 만하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마지막까지 읽은 후에 문득 정유정의 <종의 기원>과 플롯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로 인한 살인, 그것을 숨기려는 주인공, 살인을 알아챈 사람, 그리고 결말까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종의 기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훨씬 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피의 농도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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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잘 읽지 않는 종류의 책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쓸데없는 관심이 많아서 책을 좀 잡다하게 읽는 편이다. 한 권의 책은 다른 몇 권의 책을 낳고, 또 그 책들은 다른 책을 소개하고.. 그러다 보니 읽지 못하면서도 언젠가는 읽을 거라는 생각으로 사서 쌓아 두기도 한다. 사 놓은지도 모르고 기억에서 사라졌던 책들을 책장 구석에서 꺼내 읽고 나서는 너무 늦게 읽은 걸 아쉬워 할 때도 있다. 나는 책에 관해서는 잡식성이다.


좋다고 하는 책은 어지간하면 읽어 보려고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만 잘 손에 잡지 않는 책이 있다. 첫번째로 자기계발서는 절대로 읽지 않는다. 이전에 읽었던 몇 권 되지 않는 자기계발서는 성공하는 방법을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한정된 경험과 그 경험을 증명하려는 의도를 가진 왜곡된 데이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강요했다. 두번째로 에세이도 잘 읽지 않는다. 감성적인 글이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책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을 중요시 하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다. 꼭 정보가 없더라도 소설은 꽤 많이 읽는 편이고, 시집도 간혹 읽는 것을 보면 감성적인 글을 싫어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에세이는 읽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언어의 온도>를 읽은 건 내 독서 스타일에서는 꽤 벗어난 의도하지 않은 접촉사고와 비슷하다.

 

저자 이기주. 개인 프로필을 찾기가 힘들다. 검색하면서 몇 가지 알게 된 것은 있지만 그의 정치적 성향은 이 포스팅에서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섬세한 필치로 일상을 더듬어 나간다
<언어의 온도>는 글쓴이가 일상을 훑어서 감성을 담아낸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들을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에는 삶이 너무 바쁘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소한 일상이라는 것은 훌륭한 글의 소재가 되는가 보다. 때로는 옆자리에서 하는 얘기를 엿듣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하고, 친구한테 문자가 오기도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기도 하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을 뽑아내서 그 속에 감성을 불어 넣고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 평범한 일상과 섬세한 감성, 각기 두 단어로 이루어진 두 개의 말로 이 책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의 온도>의 첫 번째 대목은 '말'에 관한 내용이다.


편안하게 읽을 수는 있는 유려한 문장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문장이 굉장히 좋다. 감성적이고 따뜻함이 느껴진다. 글쓰기에 대해서 여성과 남성을 가를 수 있다면, 강인한 느낌보다는 섬세한 여성의 필치가 느껴진다. 글쓴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글대로라면 굉장히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글을 쓰려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주변을 잘 살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섬세하게 살피는 것도, 그것을 써내려가는 것도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일이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대단한 철학이라든지 굉장한 지식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끝까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글'에 대한 대목이다.


역시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이제 내가 왜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를 얘기해 봐야겠다. 에세이는 도대체 읽어도 내가 뭘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좋은 소설은 치밀한 주제의식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좋은 시는 한껏 벼리어 놓은 글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지식에 관한 글이야 읽는 목표가 뚜렷한 것이 읽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떨까?


감성은 과잉되어서 일상적인 감정같지가 않다. 일상이라고 하지만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것같은 에피소드가 중간중간 들어가 있다. 일상을 통해서 얻은 통찰을 써 놓지만 통찰이 있어 보일 뿐이지 깊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읽어 본 에세이들은 대부분 진심을 담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언어의 온도> 역시 다른 에세이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다른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세 번째는 '행동'에 대한 대목이다.


왜 베스트셀러일까?
이 책을 읽은 건 워낙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맨 앞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고 나서도 책 속에서 딱히 베스트셀러가 될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책의 외적인 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1. 제목이 정말 좋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목 하나만큼은 굉장히 잘 지은 것 같고, 머릿글에서 밝혀 놓은 뜻도 굉장히 좋아 보인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를 수 있어 보인다.
2. 책이 작다.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책이다. 한 손에 쏙 들어 온다. 남자들이라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좋고, 여자들이라면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니다가 읽기에 좋다.
3. 표지가 눈에 확 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을 살펴 보니 보라색 책이 거의 없다. 그것도 이 책처럼 선명한 보라색 책은 더더군다나 없다. 가지고 다니면 좀 있어 보일 것 같다.
4. 책을 읽으면서 감정의 동요를 크게 느낄 일이 없고, 집중해서 읽어야 할 부담도 없다. 차례대로 읽을 필요도 없이 중간을 펼쳐서 아무 곳이나 눈에 띄는대로 읽어도 된다. 책을 읽는데 대한 부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많은 감성적인 글보다 크게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런 글들을 한 사람이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써내려가는 것도 멋진 일이다. 하지만 딱히 일부러 찾아 읽을 것까지는 없어 보인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들고 다니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독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거르고 지나가도 괜찮을 것 같다. 궁금하면 서점에서 몇 장 들춰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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