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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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심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건 모세의 등허리에 패인 열 줄 핏자국입니다. 성난 시나이 산 가슴 터지며 내뿜는 불꽃입니다. 아니, 그건 불꽃러엄 뒹구는 하비루 노예들의 살점들이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억울하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죄 없이 맞아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살점들의 아우성이 바로 십계명이란 말입니다.
P. 109 ~ 110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스라엘 고대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이스라엘의 고대사를 보는 관점은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는 성서에 씌여 있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이면서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성서의 주제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야훼 하느님의 역사이며, 완결된 줄 알았던 구약의 역사가 신약으로 이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까지 연결이 된다. 어떤 사회현상이든지 종교가 개입되게 되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진다. 종교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든,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든 보통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처음 해방신학을 알았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구속사가 아닌 민중 해방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성서의 신성함을 깨부수는 것 같아서 신선한 느낌도 받았고, 사울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초기 영웅적인 왕들에 대해서 민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으로 폄하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폄하할 때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예수를 온 세상의 구원자로 보기보다는 이스라엘 해방의 지도자로 바라 본 이스라엘 민중들의 시선도 처음에는 좀 불편했다. 운동권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기독교에 덧씌워서 종교를 더럽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 관점에 마음이 더 간다. 문익환 목사님(존경의 뜻을 담아 다른 책의 저자들과는 달리 '님'자를 꼭 붙이고 싶다.)은 대표적인 운동권 목사였고, 당연히 이 책은 굉장히 민중적인 관점에서 썼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절반 정도만 맞는 것 같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 1918 ~ 1994. 만주 북간도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공동번역성서 번역에도 참여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이후 재야운동권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집트로부터 시작하는 노예해방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디서부터 바라볼 것인가는 종교적,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온갖 신화시대를 지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야곱의 자손들이 모두 이집트로 넘어가는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에게 모세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 따위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바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의 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쯤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일단 좀 잊자.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 민중사>이고 문익환 목사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중심으로 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받던 노예계급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상. 하비루(이집트의 노예계급)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한 실질적인 이스라엘 최초의 민족 지도자.


노예계급과 농민혁명군의 해방전쟁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
문익환 목사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 개의 이질적인 민중의 결합으로 본다. 하비루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민중들이다. 모세가 이들을 이집트의 지배계급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끌고 나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라는 혈통적인 결속감보다는 피지배인으로서의 계급성이 더 강조가 된다. 이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한다. 모세의 사후에는 여호수아를 거쳐 필요할 때마다 판관들이 나타나 이들을 이끌었고,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을 거쳐서 남쪽 유다가 이들의 전통을 잇는다. 이들의 하느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엘로힘'이며, 군신이며, 유목민의 하느님이다.


다른 구성원은 농민혁명군이다. 이들은 아마도 하비루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중에 결합된 사람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던 토착민들일 수도 있다. 이들의 하느님은 '엘 샫다이'이며, 풍요로움의 신이다. 이 전통은 사울과 요나단, 여로보암을 거쳐서 북이스라엘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농경이 주된 생업이었던 농민혁명군은 풍요로움을 주는 가나안 토착신앙이었던 바알과 아세라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에 비해서 바알 신앙에 자주 무너졌던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에 따르면,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사사의 시대, 왕국의 시대는 하비루군과 농민혁명군이 결합한 해방전쟁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지배계급을 때려부수고 노예를 해방하여 자유를 쥐어주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노예시절 쉬지 못했던 이집트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했다고 한다. 민중의 삶을 지배자의 논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과 설교는 왕국의 분열 이후 피폐해지는 민중들을 다시 구해내기 위한 하느님의 안타까워 하는 목소리이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민중운동가가 아닌 신학자로서의 면모
<히브리 민중사>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책의 내용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평생을 재야운동에 몸바친 분이고, 그의 삶이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을지언정, 신학적인 깊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발간되었다는데 대한 관심으로 책을 구매했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읽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보기좋게 엇나갔다. 약력을 확인해 보니 문익환 목사님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깰 정도로 대단한 신학자였고, 책 또한 본격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자신의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써 내려갔다. 위에서 내 예상이 절반만 맞았다고 했는데, 신앙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민중해방의 관점만을 서술한 다른 해방신학 책과도 분명히 궤를 달리한다. 평범한 기독교인이 읽을만한 이스라엘 종교사로서의 가치도 충분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도 많이 벗어났다.

 

니콜라 푸생, <다윗의 승리> 1627년경,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영웅 다윗에게 천사가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다.

 

쉬우면서도 깊은데 가슴도 뛴다
문익환 목사님은 <히브리 민중사>를 구어체로 썼다.  학술적인 책을 구어체로 썼다는 것도 이례적이다.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읽을수록 말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쉽다. 그렇다고 가볍게 쓴 책은 아니다. 읽을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문익환 목사님의 통찰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민족을 바라보는 모습에 가슴이 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한 종교인이 가져야 할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쓴 글이다.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내용까지 좋으니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 민중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에 정착하고, 사사의 시대를 지나 초기 왕국시대와 남북으로 나뉜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존의 기독교가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도 거부감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문익환 목사님이 이 책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언자의 시대를 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까지 책을 쓰셨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의외로 전혀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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