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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총체적 재난의 시작
부인은 걱정이 됐다. 아픈 남편을 집에 두고 일하러 나왔는데 퇴근이 늦어진다. 119에 연락을 해서 남편이 잘 있는지 확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기준의 팀이 배정되어 아파트로 출동을 했다. 문은 잠겨 있고,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기준은 창문을 통해 아파트로 진입을 하기로 한다. 아파트에 진입하는 순간, 큰 개 한마리가 창문을 통해 뛰쳐나갔다.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방안을 살펴 보니 남자가 죽어 있다. 기르고 있던 개들도 모두 죽어 있다. 사람도 개도 눈은 시뻘겋다. 여기는 화양시, 서울의 북쪽에 붙어 있는 도시를 고립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전염병은 이렇게 발견됐다.
정유정. (1966 ~ )
28일간 지옥이 된 도시, 그 안의 사람들
<28>은 사람과 개를 통해 전염이 되는 정체불명의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지옥이 된 화양시가 배경이다. 전염병이 처음에 어떻게 화양시로 들어왔는지 알 수 없고, 처음에는 병의 원인은 물론 전염이 되는 메카니즘도 알 수 없어서 시민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지만 일부 항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 자신의 목숨만을 돌보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혼란의 와중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고,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것처럼 참혹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피가 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인수공통전염병이 화양시를 덮치고 별다른 대책없이 시민들은 죽어 나간다. 이 틈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지옥을 체험하게 된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동물까지 그렇다
<28>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등장인물들이 많고 소설의 시점은 각 등장인물들의 관점을 돌아가면서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사연이 있고, 그에 맞게 행동을 한다. 프롤로그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재형이다. 예전에 개썰매 대회에서 개들을 희생시켜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진 수의과 의사이다. 한참 존경을 받다가 과거를 파헤친 신문기사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순간 전염병을 맞이하게 된다. 서재형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신문기자가 김윤주이다. 정의의 사도로 나서 서재형을 망가뜨리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서재형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가장 비중이 큰 두 인물이다.
작가는 비극을 담당하는 두 사람도 따로 준비를 해 두었다. 한기준은 소방대원으로 계속해서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다해 시민들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동안 자신의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가족을 죽인 복수를 하기 위해 원수를 찾아 나선다. 한기준이 복수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4년차 간호사인 노수진은 처참하게 망가져 버리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한기준이 소방관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면 노수진은 간호사로서 임무에 충실하다. 역시 가족을 돌보지 못한 아픔을 지니고 있는데다 마지막에는 여자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공격을 받고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겪는다.
이 지옥같은 곳에는 인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링고라는 개를 등장시켜서 개의 시점까지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던 개 스타를 잃은 링고 역시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원수를 찾아 다닌다. 소설 속에서 가장 악독한 역할을 맡은 박동해도 스스로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벌이고 다닌다. 이 모든 사람들, 동물들의 시점을 모두 설명하기 때문에 각 인물들이 설득력을 가진다. 처음에는 따로 놀던 인물들이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촘촘히 엮여가는 관계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디타로드(Iditarod)의 경주 코스. 오른쪽 아래의 앵커리지에서 출발하여 왼쪽 위에 보이는 놈(Nome)까지 장장 1,600km를 달리는 경주이다. 주인공인 서재형은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에서 개들을 희생시켜 살아 남고, 개에 대한 미안함과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개인의 연약함, 권력의 비정함
피가 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정유정 작가의 특성이기도 하고 장기이기도 하다. 전작인 <7년의 밤>이나 다음 작품인 <종의 기원>과 다른 점이라면 두 작품은 단지 한 사람의 잔혹한 면을 그 끝까지 파고 들었다면, <28>은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맞이한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 더 집단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버려 무정부상태에 빠진 화양시에서 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의해서 가장 바람직한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위에 의지해서 행동을 선택해 나간다. 당연히 게중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화양시를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생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화양시에 있는 것은 너무나도 큰 불행이며, 그 곳을 탈출하려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염병을 화양시 밖으로까지 퍼뜨리는 것은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리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구나 화양시는 인구 밀집지역인 서울에 붙어 있는 도시이다. 서울로 전염병이 퍼지면 그 피해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국 정부는 화양시민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길목을 막아 버린다. 화양시를 빠져나가려는 화양시민들과 길목을 막고 있는 군인들 사이에는 충돌이 벌어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정부는 화양시의 전염병이 다른 도시로 퍼지지 않도록 화양시를 폐쇄해 버리고 시민들은 이에 저항하여 집단행동을 한다.
사회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중 세 번째로 읽은 책이다. 손에 잡히는대로 읽다 보니 순서대로 읽지 않고 <7년의 밤>, <종의 기원>, <28>의 순서로 읽었다. 그런데 이 읽는 순서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위에서 쓴 것처럼 앞의 두 책은 오직 한 사람만을 깊이 파고 들었고, <28>은 여러 사람과 함께 권력까지 다루었기 때문에 대조가 된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말하라고 하면 난 앞의 두 작품이 더 마음에 든다. <28>에서도 각 인물들에 대한 표현은 탁월하다. 하지만 사회문제를 다루려고 한 시도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져셔 우화처럼 느껴졌다.
먼저 읽은 두 작품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그 상황을 피해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하지만 <28>은 배경 자체가 좀 작위적인 느낌이다. 인수공통전염병이 무차별적으로 퍼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화양시에 꼼짝없이 갇혀서 이도저도 못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한 도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정부가 화양시의 모든 사람들을 모두 희생시키고 다른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습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주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극한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작위적인 장치를 노골적으로 배치했다는 느낌이다. 개인의 심리와 상황을 다루는 솜씨에 비하면 사회와 권력을 만져서 개연성을 만들어 내는데는 충분히 솜씨를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다뤄서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각 인물들에 대해서 충분히 빠져들지 못한 것은 아쉽다. 재미는 있지만 다른 두 작품에 비해서 흡입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마지막에 약간의 아쉬움에 대해서 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28>이 재미없는 소설은 아니다. 긴장감도 넘치고 읽으면서 계속해서 뒷부분이 궁금하다.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굉장히 긴 소설이긴 하지만 지루할 틈없이 읽을 수 있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