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그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1920년대의 태평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속아 넘어가 꿈과 기대를 품기에 딱 적당한 나이. 마치 미국이 맨해튼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대공황을 발진시킨 것 같았다. - P14
밸과 내가 사귀기 시작한 여름에 우리는 아직 30대였고, 서로 성인이 된 뒤 10여 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10년이면 충분했다. 인생 전체의 방향이 좋은 쪽, 또는 나쁜쪽으로 바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누군가의 앞에 의문을 하나 떨어뜨려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 P16
내 생각은 나도 모르게 과거로 향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금의 완벽한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나는 달콤했지만 불확실하던 과거를. 그때의 우연한 만남들을 찾아 헤맸다. 그때는 정말 우연하고 열띤 만남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운명 같다는 느낌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 P18
이브는 첫 봉급을 받자마자 1인용 방을 포기하고, 아버지 계좌의 돈을 쓰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브가 자립하고 몇 달 뒤, 아버지가 딸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다정한 편지와 10달러 지폐 50장을 함께 봉투에 넣어 보내왔다. 이브는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냈다. 마치 결핵균에 감염된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태도로 이브가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겪을 각오가 돼 있어. 남의 명령에 휘둘리는 일만 아니라면." - P29
혼자 온 남자가 예쁜 여자 두 명에게 술을 사면,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든 일단 여자들과 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말쑥한 옷차림의 이 사마리아인은 우리에게 전혀 말을 걸지 않았다. 상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하며 우리를 향해 잔을 한 번 들어 보인 뒤에는 자신의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며 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 P34
팅커가 우리의 빈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뭔가 새해의 소원 같은 걸 외쳐야 해요." "우린 새해의 소원 같은 거 없어요, 선생님."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새해의 소원을 들어주면 어때요?" 이브가 말했다. "최고예요! 내가 먼저 할게요. 1938년에는 두 사람이…………." 팅커가 말했다. 그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줍음을 덜 타는 사람이 되세요." 우리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요. 이제 당신 차례예요." 팅커가 말했다. 이브가 주저 없이 나섰다. "당신은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세요." - P40
그는 벤치 뒤에서 소년과 나란히 몸을 웅크리고 남학생회 청년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원군의 도움을 받은 소년은 조금 전보다 더욱 더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팅커는, 북극에 설치된 모든 램프에 환하게 불을 밝힐 수도 있을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P46
젊은 여자들이 사소한 보복의 기술에 숙련되어 있다 해도, 이 우주 또한 나름의 앙갚음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브가 팅커의 귓가에서 키득거리며 웃어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양털 외투에 감싸여 있었다. 실제 양가죽처럼 양털이 두툼하게 달린 그 외투에는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어 따뜻했다. - P54
그는 고갯짓으로 우리 자리를 가리켰다. 이브가 팅커에게 술을 한 잔 더 하자고 설득하는 데 거의 성공하려는 참인 것 같았다. "저 젊은이는 누구야?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의 친구인가?" "둘 다라고 해두죠." 체르노프가 빙긋 웃었다. - P63
이건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을 고를 때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골탕 먹일 의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 P66
"난 시간을 완벽하게 지켜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 60초 동안 60초를 셀 수 있다는 뜻이에요. 언제나." "말도 안 돼요." - P76
부인의 짧은 방문이 이브의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면, 팅커의 케이크에는 불을 꺼버린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부인의 뜻하지 않은 출현은 오늘 밤 외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부유한 남자가 두 여자를 멋진 곳으로 데려온‘ 분위기가 ‘어린 공작새가 자기집 뒤뜰에서 깃털을 자랑하는’ 분위기로 눈 깜짝할 새에 바뀌어버린 것이다. - P90
바로 그때 우유 배달트럭이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그 차를 미처 보지도 못했다. 트럭은 배달할 우유를 잔뜩싣고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로 파크 애버뉴를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속도를 늦출 때 트럭도 정지하려고 했지만 얼음에 미끄러지며 뒤에서 정통으로 우리를 들이받았다. 우리가 탄 쿠페는 마치 로켓처럼 붕 떠올라서 47번가를 뛰어넘어 중앙의 철제 가로등에 처박혔다. - P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