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 당신이랑 이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나는 몰라요.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은 힘들었어요. 의사들 말로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래요. 그러고 나서야 좋아질 거라고. 의사들 말을 딱히 믿은 건 아니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됐어요. 오늘 밤에는 내가 사무실에 가봐야 하는데, 이브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 P103

이제는 누가 누구 것이고, 극장에서 누가 누구 옆에 앉을 것인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아니, 이제는 전혀 게임이 아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밤을 견뎌내는 일이었고, 그 일은 말만큼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항상 아주 개인적인 일이기도 했다. - P108

"너 좋아 보인다." 마침내 내가 말했다.
이브가 뭔가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케이티, 내가 그런 헛소리 싫어하는 거 알지? 특히 네가 하는 건더 싫어."
"그냥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나아 보인다는 뜻이었을 뿐이야." - P113

"적어도 팅커가 널 잘 돌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자기가 깨뜨렸으니까 자기가 산 거지. 안 그래?" - P115

관대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오. 오히려 책임이 시작되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이 씨는 틀림없이 알고 있으리라고 믿소. - P121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
첫째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야한다.
.
.
. - P120

내가 뒤로 물러섰지만 팅커는 금방 손을 놓지 않았다. 뭔가 말해야 할지를 두고 혼자 씨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하는 대신 그는 복도 저편에서 자고 있는 이브를 두고 내게 키스했다.
강압적인 키스는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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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그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1920년대의 태평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속아 넘어가 꿈과 기대를 품기에 딱 적당한 나이. 마치 미국이 맨해튼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대공황을 발진시킨 것 같았다. - P14

밸과 내가 사귀기 시작한 여름에 우리는 아직 30대였고, 서로 성인이 된 뒤 10여 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10년이면 충분했다. 인생 전체의 방향이 좋은 쪽, 또는 나쁜쪽으로 바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하다못해 누군가의 앞에 의문을 하나 떨어뜨려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 P16

내 생각은 나도 모르게 과거로 향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금의 완벽한 모습에 등을 돌린 채, 나는 달콤했지만 불확실하던 과거를. 그때의 우연한 만남들을 찾아 헤맸다. 그때는 정말 우연하고 열띤 만남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운명 같다는 느낌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 P18

이브는 첫 봉급을 받자마자 1인용 방을 포기하고, 아버지 계좌의 돈을 쓰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브가 자립하고 몇 달 뒤, 아버지가 딸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다정한 편지와 10달러 지폐 50장을 함께 봉투에 넣어 보내왔다. 이브는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냈다. 마치 결핵균에 감염된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태도로 이브가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겪을 각오가 돼 있어. 남의 명령에 휘둘리는 일만 아니라면." - P29

혼자 온 남자가 예쁜 여자 두 명에게 술을 사면,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든 일단 여자들과 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말쑥한 옷차림의 이 사마리아인은 우리에게 전혀 말을 걸지 않았다. 상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하며 우리를 향해 잔을 한 번 들어 보인 뒤에는 자신의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며 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 P34

팅커가 우리의 빈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뭔가 새해의 소원 같은 걸 외쳐야 해요."
"우린 새해의 소원 같은 거 없어요, 선생님."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새해의 소원을 들어주면 어때요?" 이브가 말했다.
"최고예요! 내가 먼저 할게요. 1938년에는 두 사람이…………."
팅커가 말했다. 그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줍음을 덜 타는 사람이 되세요."
우리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요. 이제 당신 차례예요." 팅커가 말했다.
이브가 주저 없이 나섰다.
"당신은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세요." - P40

그는 벤치 뒤에서 소년과 나란히 몸을 웅크리고 남학생회 청년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원군의 도움을 받은 소년은 조금 전보다 더욱 더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팅커는, 북극에 설치된 모든 램프에 환하게 불을 밝힐 수도 있을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P46

젊은 여자들이 사소한 보복의 기술에 숙련되어 있다 해도, 이 우주 또한 나름의 앙갚음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브가 팅커의 귓가에서 키득거리며 웃어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양털 외투에 감싸여 있었다. 실제 양가죽처럼 양털이 두툼하게 달린 그 외투에는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어 따뜻했다. - P54

그는 고갯짓으로 우리 자리를 가리켰다. 이브가 팅커에게 술을 한 잔 더 하자고 설득하는 데 거의 성공하려는 참인 것 같았다.
"저 젊은이는 누구야?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의 친구인가?"
"둘 다라고 해두죠."
체르노프가 빙긋 웃었다. - P63

이건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을 고를 때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골탕 먹일 의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 P66

"난 시간을 완벽하게 지켜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 60초 동안 60초를 셀 수 있다는 뜻이에요. 언제나."
"말도 안 돼요." - P76

부인의 짧은 방문이 이브의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면, 팅커의 케이크에는 불을 꺼버린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부인의 뜻하지 않은 출현은 오늘 밤 외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부유한 남자가 두 여자를 멋진 곳으로 데려온‘ 분위기가 ‘어린 공작새가 자기집 뒤뜰에서 깃털을 자랑하는’ 분위기로 눈 깜짝할 새에 바뀌어버린 것이다. - P90

바로 그때 우유 배달트럭이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그 차를 미처 보지도 못했다. 트럭은 배달할 우유를 잔뜩싣고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로 파크 애버뉴를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속도를 늦출 때 트럭도 정지하려고 했지만 얼음에 미끄러지며 뒤에서 정통으로 우리를 들이받았다. 우리가 탄 쿠페는 마치 로켓처럼 붕 떠올라서 47번가를 뛰어넘어 중앙의 철제 가로등에 처박혔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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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4일 밤, 중년의 끝자락에 이르러 있던 밸과 나는 현대미술관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워커 에번스가 1930년대 말에 뉴욕 지하철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인물사진들을 처음으로 전시하는 자리였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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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그래서 투명해 보이는 손으로 그 서책의 책장을 가늘게 찢어 입안에 넣고는, 그 책장으로 제 몸을 살찌우려는 듯이 호물호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 P877

「서둘러라! 서둘지 않으면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먹어 치우겠다!」
사부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 먹어 치우고는 죽을 테지요.」
사부님과 합류하면서 나는 심술을 부렸다.
「저 영감탱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독약을 먹고 있으니 지금 먹은 양으로도 영감은 명재경각(命在傾刻)이다. 문제는 서책이야. 서책을 찾아야 해!」 - P881

서책에 맞은 등잔은 공중을 날아가 서안 위에 펼쳐져 있던 다른 서책들 위로 떨어졌다. 기름이 엎질러지면서 불길은 곧 양피지 위로 번졌다. 양피지는 흡사 잘 마른 낙엽 같았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장서관의 고서는 수세기 동안 불길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단 불길을 만나게 되자 함성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 P883

「틀렸어. 이젠 안 돼. 이 수도원 수도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이젠 안 돼. 장서관은 끝났어.」 - P890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필사사들의 절규를 들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필사하던 땀과 눈물이 밴 양피지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헛일이었다. - P892

수도원은 나락의 혼돈을 방불케 했으나 이는 비극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창과 지붕에서 튀어나온 불똥은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다가 이윽고 교회 지붕 위로 우박처럼 내려앉았다. - P893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 P896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P897

뒷 이야기이지만 수도원은 그 후로도 사흘 밤낮을 탔다.
불길을 잡아 보려던 마지막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생존자들은, 수도원 건물 중에 지켜 낼 수 있는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느님의 응징에 맞서 보려고 쳐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 P903

사부님께서는,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나를 안아 보시고는 나를 떠나보내셨다.
그 뒤로는 그분을 다시 뵙지 못했다. 금세기 중엽 역병이유럽을 휩쓸 당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아,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혼을 수습하시되, 지적인 허영에 못 이겨 그분이 지으신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 P906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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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는 겁을 먹고 있어. 원장은 포사노바에서, 제 사부의 시신을 메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온 적이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데 그게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어.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의 계단도 오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 P849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지요. 지금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문서 사자실에서 점잖지 못한 주제를 놓고 토론할 때 나를 몰아치는 재주를 보고 진작부터 알았지요. 그대는 역시 다른 이들보다는 한 수 위더군요. - P850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씌어지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어쩌면이 세상에서 한 권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소장품, 바로 그겁니니다. - P853

오늘 아침 우연히 문서 사자실에서 손가락에 침을 칠해 가면서 책을 읽다가 당신의 수법을 알아낸 겁니다. 손에 침을 묻히면서, 독이 혀끝을 통해 입안으로 충분하게 좀 들어가게 읽어야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 P857

이레 동안 두 사람은 교묘한 약속 아래,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면서 은밀히서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 P864

하고많은 서책 중에서 어째서 이 서책만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무엇 때문에 당신은 갖가지 요술로 속임수를 쓰고, 당신 자신까지 저주를 면치 못할 짓을 하면서까지 이 책을 감추려 했소?
.
.
.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 P865

「병이라는 것은 쫓아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박멸해야 하는 것이오.」
「병자와 함께?」
「필요하다면!」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사부님이 처음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 P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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