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을 정복하라

일단 주인공은 자크 클라인이다. 여자친구는 샤를로트. 엄마는 카롤린 클라인. 아빠는 요트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 자크는 어릴 때 좀 찌질했다. 공부도 못하고 체력도 약하니 또래의 힘센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 수밖에.. 자크의 엄마 카롤린은 유명한 신경생리학자로 꿈 연구의 권위자인다. 엄마는 자크에게 꿈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쉽게 말하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서 꿈을 꿀 수 없게, 정확히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지식의 갈무리도 못하고 트라우마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크가 최고 수준의 잠을 잘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잠을 훈련한다는 건 5단계인 역설수면까지 방해없이 자고 꿈을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걸 의미한다. 자크는 엄마에게 잠 훈련을 받은 후 머리도 좋아지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용기도 솟는다. 좀 부럽네. 잠만 잘자는 것만으로 이런 발전을 이루다니..


한편 카롤린은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꽤 유치한 제목의 프로젝트지만 최고 전문가가 수행중이니 그런가 보다 하자. 그 프로젝트는 1, 2, 3, 4, 5 단계 꿈보다 더 깊은 단계인 6 단계 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엄마는 6단계의 꿈을 수도자나 성자가 일종의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신 깊숙히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위험할 법도 해서 아킬레시라는 수도자를 데려다 6 단계로 들어가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중 아킬레시가 죽었다. 이 소문은 매스컴을 통해 퍼지고 카롤린은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실종된다. 꿈속을 탐험하는 엄마와 아들을 지켜보는 소설이 《잠》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Bernard Werber 1961 ~ .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나라에서 책만 냈다 하면 반드시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굉장히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데, 본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오히려 인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초기작인 《개미》와 《타나토노트》를 보고 지식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엉뚱한 상상력을 잘 접목시켜 놓은, 손을 놓기 힘든 소설에 매혹을 느꼈다. 그래서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꽤 읽었는데 초기 소설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카산드라의 거울》을 읽은 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쌓아둔 밑천이 이제는 다 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잠》은 오랜만에, 그래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이제 소재 다 떨어진 거 아냐?

《잠》의 주요 소재는 '잠'이다. 이게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잘 때 1~5 단계를 거치고 5단계는 '역설 수면'의 단계이다. 이 잠의 단계를 잘 조절하면 머리도 똑똑해지고 정서도 안정이 된다. 어릴 때는 좀 뒤떨어진 학생이었던 주인공 자크는 엄마가 유도해 준 '잠' 덕분에 유망한 의대생이 된다. 그리고 엄마는 5단계보다 더 깊은 단계인 6단계 수면을 발견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떠오르는 소설이 두 개 있다. 가사 상태에서 좀더 내면 깊은 곳으로 다이브한다는 설정은 《타나토노트》에서 가져 왔다. 단지 그것이 '꿈'이고 《타나토노트》는 그것이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외부의 도움으로 지능이 발전한다는 건 《뇌》와 비슷하다. 《뇌》는 지능이 초인적으로 발전한 반면 《잠》에서는 조금 똑똑해지면서 일종의 시간여행을 하고 영혼과 대화하고.. 초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 정도면 그냥 자기표절 아닌가? 표절이 아닐 수는 있지. 소설가가 직업이니 얼마나 그럴싸하게 변형했겠어? 하지만 이미 두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기 표절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개미》나 《타나토노트》같은 걸작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허접한 설정

소재는 좀 비슷한 걸 끌어다 그냥 좀 썼다 치자. 하지만 설정은 더 형편없다. 엄마는 수면전문가로 아들의 잠을 컨트롤해서 똑똑한 의대생을 만든다. 말레이시아의 소수 부족은 꿈꾸는 시간을 현실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자각몽은 언제든 이어질 수 있고, 내용도 뚜렸하다. 게다가 부족은 꿈이 모인 집단의식(집단무의식이 아니다)이 존재해서 5단계 꿈에 든 사람이 찾아갈 수 있다. 6단계 잠이 들면 꿈속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이게 잠이고 꿈이야? 그냥 유체이탈이잖아. 흔한 유체이탈을 써놓고 엄청난 과학이론이 숨어있는 것처럼 분장해서 써 놓았다.


물론 소설이 꼭 현실적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설득력과 개연성을 있어야 읽으면서 수긍하고 지나가는데 《잠》은 최소한의 덕목을 지키지 않았다. 《개미》가 명작인 이유는 개미에 대한 엄청난 과학적 지식을 쏟아 부은 후 그 이상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고, 《타나타노트》는 많은 죽음에 대한 신화들을 집대성한 후 거기에서 한 발짝 상상력을 내밀었기 때문에 수긍이 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말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잠》은? 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 잠만 자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 미래의 '나'는 꿈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고 현자가 나타나 6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인 약물을 만드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 준다. 형태는 비슷하다. 하지만 밑바탕이 탄탄하지 않으니 쌓아놓은 건물이 그냥 무너져 버리고 만다.


★☆

좀 작정하고 까서 미한한데, 좀 쉬세요. 마른 수건 짜내듯 아무 것도 없는데서 자꾸 글을 쓰려고 하니 이런 졸작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개미》에서 103683호가 편지를 인간에게 전했을 때의 그 소름끼치는 충격이나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던 타나토노트들의 목숨 건 프론티어 정신을 기대하면 안되는 걸까?


쓰고남은 소재 조각들을 그러모아 소설책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파쇄된 종이뭉치같은 소설이다.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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