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죄에 대한 견해로는 일반적으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자와 죤 낙스가 있다. 노자는 인간이 태어 날 때에는 죄 없이 선하게 태어 난다는 견해를 표방했으며, 죤 낙스는 인간에게는 죄가 없고 백지에 흠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후자의 대표적 인물로는 순자가 있는데, 인간은 본성이 악한 것으로 태어날 때에 가지고 온다고 말했다. 한편 기독교의 견해는, 인간은 죄 없이 창조되었으나 범죄 함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기독교의 견해가 성악설과 성선설을 종합해 놓은 듯이 보이지만, 기독교의 견해는 세상 사상의 종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죄의 문제가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고의 주제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죄의 문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접근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철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죄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도까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이러한 죄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 중 칸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 중 본고에서는 근본악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펴보면서 죄와 근본악과의 관계를 고찰해보고, 이를 기독교의 견해와 비교, 평가해보고자 한다. 특별히 기독교의 죄론과 관계된 내용만으로 정리함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재창조의 필요성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칸트에게 있어 근본 악(惡)의 문제
(1) 악에 대한 성벽(性癖)
칸트의 종교론인 “순수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 Vernunft)는 4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은 ”인간본성의 근본악"이고, 제2편은 “선 원리와 악 원리의 싸움"이다. 이 중 “순수이성 한계내의 종교"중 그 첫 번째인 “근본악"은 그가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악의 근거를 이미 단순히 경향성에 의한 의지의 타율적 규정에서가 아니라 의지의 주체 내로 향해서 자유의지의 자유행사 자체에서 구하고 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악한 행위를(범을 어기는 행위)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행위들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준칙(準則)에서 나오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범법 행위들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적어도 행위자체에 있어서) 이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법을 어겼다는 사실까지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준칙을 결코 관찰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인간 자체 안에서도 결코 관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을 악하다고 하려면 몇몇 행위를 오히려 단 한가지 의식적으로 악한 행위로부터 선험적으로 이 행위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악한 준칙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이 준칙으로부터 주체 내에 보편적으로 놓여 있는 모든 특수한 준칙들의 근저에서 추론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인간이 악하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낱낱의 가시적인 악한 행위나 그와 같은 낱낱의 악한 행위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내면의 악한 낱낱의 준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악한 모든 준칙의 선험적 근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천적 의지가 이렇게 낱낱의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근거를 문제 삼는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본성’이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표현이 자유로부터 나오는 행위의 근거와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든지 도덕적으로 악하다든지 하는 술어들과 또 전적으로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선하다 혹은 그가 본성으로부터 악하다 할 때, 그것은 그가 선한 준칙을 혹은 반 법칙적 준칙을 채용하는 제1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이렇게 본성으로부터 악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 있어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성격'이라고 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렇게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성벽(性癖)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악에 대한 성벽’이라고 했고 또 그것이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속해있는 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악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성벽'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하여 칸트는 도덕법을 위반하는 악한 준칙을 채용할 가능성에 대한 주관적 근거인 ‘악에의 성벽’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기 전부터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칸트가 악에의 성벽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다, 혹은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악하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정신적, 육체적, 소질이나 생리, 심리학적, 유전학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자연소질로서의 성벽에 의한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써, 그것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도덕적 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적 죄악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성벽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는 실천적 자유의 임무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성벽 자체가 도덕적인 악으로 관찰된다. 즉 자연적 소질로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책임을 지는 그 무엇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이 성벽은 의지의 불법적인 준칙으로 인해 존립한다. 그러나 이 의지의 준칙은 자유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준칙에 있어 주관적인 최고의 근거가 인간성 자체 속에(그것이 무엇을 통과하려고 하든지 간에) 얽혀있지 않고, 또한 그 속에 뿌리 박혀 있지 않다면 인간의 도덕적 악은 이 악의 보편성과 또 다시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가장 높은 주관적 근거를 악에 대한 자연적 성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 자체를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근본악 내지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는 악’(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유발시킨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있어, 악의 보편성 측면에서 본다면 악에의 성벽은 인간성자체 속에 섞어져 있으면 인간성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것으로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것이요 따라서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적 생구적(生久的)-악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종교론에서 자유의지가 선의 법칙 즉 도덕법을 의식하면서도 오히려 부도덕적인 동기에 중점을 두는 준칙, 즉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도덕적 심술의 근저에 있는 부패와 도덕적 질서의 전도가 모든 반(反) 법칙적 행위의 형식적 근거가 되는 악의 근원이며, 그것이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악에 대한 의지의 사역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악에의 성벽과 관련해서 악을 다음과 같은 3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2) 악에 대한 성벽의 3단계
1단계는 인간 본성의 유약성인데,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탄식에 표현되어 있다. 즉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나 그 성취가 결여되어 있다. 즉 나는 신을 나의 의지의 준칙 속에 채택한다. 그러나 이 선이 객관적으로 이념에 있어서의 정복될 수 없는 동기이지만 주관적으로 준칙이 수행되어야 할 때에는 보다 악한 동기(경향성과 비교하여)가 된다.
이것은 선, 즉 도덕법을 자기의 의지의 준칙 속에 수용하면서도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이념에 있어서는 도덕법을 어쩔 수 없는 동기로 삼고 있으면서도, 주관적으로 정작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는 여기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의지적 결여에 의한 악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도덕적 유약(幼弱)이라고 할 것이며, 차라리 적극적인 선에 대한 무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칸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고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의 탄식이 바로 인간성의 이 같은 도덕적 유약성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제2단계는 "인간심정의 불순"인데 "인간의 마음의 불순성"이란 것으로서 준칙이 객관적으로 볼 때, 의도한 법 이행에 있어서 선하고 아마도 그것을 수행할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녔을 지라도 순수하게 도덕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실 준칙은 법만을 충분한 동기로 자체 내에 채택하여야 한다. 그러나 준칙은 이렇게 하지 않고 의무가 요구하는 것임에도, 의지를 규정하는 데 있어 대부분 저 동기(법)이외에 다른 동기를 필요로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의무적인 모든 행위가 순수하게 의무로부터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무와 자애의 원리의 밀회에 의한 사생학적 도덕 내지 혼합의 윤리로서 준칙이 도덕법을 준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또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도덕법만을 의지 규정의 동기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동기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말한다.
제3단계는 인간의 마음의 악성 혹은 더 잘 표현하면 부패성은 도덕법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를 보다 더 좋아하는 의지가 준칙에 대한 성벽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마음의 강팍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의 동기에 관한 한 도덕적 질서를 뒤덮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있어서 아직 법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있을 수가 있으나 이미 그로 말미암아 사고방식이 그 뿌리에 있어서 부패했으며, 이런 까닭에 인간은 악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제3단계는 이미 언급된 바 이것은 도덕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도덕법에 배반되는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것으로써, 칸트는 이것을 도덕적 질서의 전도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칸트의 말대로 모든 악한 준칙 채용의 주관적 제1근거로써 근본악이라 할 것이다. 제3단계에 있어서는 고의적인 악이요, 의지의 의도적인 적극적인 악이다. 이것은 도덕적 자각의 최고 차원적 단계에 있어서 발생하는 악으로서 그것은 고차원적인 책임 따르기 때문에, 악의 심각성의 측면에서도 보아도 과연 근본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
심술이 부패되었고 그것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 위태롭게 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가 현상으로 나타난 모든 특수한 악과 제 아무리 열열한 싸움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도덕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온갖 양상의 행동의 보이지 않는 어떤 밑바닥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인간 심술의 혁명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근본악 극복의 문제가 절실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3) 근본악의 극복의 어려움
근본악의 극복의 어려움이 어려운 과제이면서 절실한 문제임을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악의 사상을 가지고는 적이 눈에 보이는 적대자로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그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아무런 기술적, 심리학적, 내용적인 지시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대상적(對象的)으로 알 수도 없고 유의적으로 눈 앞에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절실하게 다음과 같은 두번째 근본문제가 제기된다. 즉 우리는 악의 올가미로부터 혹은 저 전도(傳導)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야스퍼스의 말과 같이 근본악은 밖으로 나타난 낱낱의 악한 행위나 혹은 낱낱의 악한 준칙을 제거함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예지적(叡智的) 차원에 속하는 것이요, 모든 악한 준칙 성립의 제1근거로써 자유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원히 암흑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요, ‘눈에 보이지 않게 이성의 배후에 숨어있는 적’으로써 인간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깊은 비밀이 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 악은 근본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준칙의 근저를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한 그것은 자연적 성벽으로써 인간적인 힘을 가지고는 근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선한 준칙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준칙의 최상의 주관적 근거가 부패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칸트는 악에 대한 성벽은 "자연적 성벽으로서 인간의 힘에 의해서는 근절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보다 선한 인간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그의 준칙의 근저에 있어 부패하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 심술의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하나의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칸트는 “그것은 준칙의 기지가 불순한 상태로 있는 한 점차적 개혁에 의해서는 이루워 질 수 없고 인간 심술의 혁명, 즉 ‘심술의 신성’이라는 준칙에의 이행에 의해서 이루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일종의 ‘재생’이라고 했고 또는 새로운 창조라고 했으며 ‘심정의 변화'라고 했다. 여기에 있어서 칸트는 새로운 창조를 신약성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새사람을 입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사실 칸트가 말하는 심술의 혁명은 부패한 심술로부터 선한 심술에로의 전회(轉回)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인격적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에 있어서 칸트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다시 사는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율과 인간에 있어서의 선에 대한 소질(素質)의 본원적 초월을 믿는 그는 이 혁명의 해결을 다시 인간의 도덕적인 자율적 결심에 의한 전회력(轉回力)으로 돌리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Sollen(도덕적 의무)은 Können(가능)이 대응할 때에만 그 의의를 가진다. 인간 이성의 도덕적 자율에 의한 확신이야말로 그의 진보적 철학을 일괄하고 있는 신념이다. 따라서 그는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써 도덕법이 우리가 지금 선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Sollen)고, 명령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Können)는 것이 따라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의무가 그것(스스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 자력에 의한 심술의 혁명은 어떻게 해서 이루워질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악인이 된 그의 준칙의 최상 근거를 단 한번의 불퇴전(不退轉)의 결심에 의해서 전회될 때에 이루워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그와 같은 불퇴전의 결심에 의해서도 당장에 현실적으로 완료적인 의미에 있어서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의지의 최상의 준칙으로 수용하는 원리의 순수성 및 그 원리의 견고성에 의해서 악인으로부터 선인에로의 부단히 노력하는 선한 길(좁은길이기는 하지만)에 있음을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도덕심술의 내적혁명을 위한 일대결의를 함으로, 사고방식과 기질에 있어서 혁명을 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결코 악을 완전히 극복한 완성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선에의 일대결의를 기점으로 해서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선인(善人)에 대한 희망적 근거를 붙잡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심술에 있어서 혁명된 인간은 심정(의지의 모든 준칙)의 예지적 근거를 통과하는 자 이다. 따라서 자신과 일체로 하는 신이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선한(신의 뜻에 합당한) 인간이다고 말하고 있다. 심술에 있어서 혁명된 인간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하는 신성한 법칙으로 보아, 현상적으로는 그의 선 다시 말하면 행위에서 본 그의 선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법칙에 적합하려는 무한한 진보가 그 진보를 이끌어 내는 초감각적인 심술 때문에,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신에 의해서 그 순수한 예지적 직관이나 행위로 보아서도 완성된 전체로서 평가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끝으로 칸트는 악인으로부터 선인에로의 부단한 진행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자기 보다 더 높은 것에 협력함으로써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기독교 신앙이 은총의 세계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도덕적 자율과 도덕적 당위를 강조하는 칸트가 은총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이러한 협력이 어떤데서 이루워지는가를 안다는 것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며 또 실제로 하였는가? 하는 것은 본질적인 질문으로 아무에게도 필연적으로 알려질 수는 없으나, 아마도 도움을 받을 만 하게 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알려질 수 있으리라 고 말하고 있다. 이같이 칸트는 은총의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 신학의 은총개념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적 자율의 입장을 고수했다.
2. 근본 악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칸트의 근본악은 얼핏보기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원죄론과 동일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근본악이라 하는 말은 기독교의 신앙 내용과 대단히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의 이 종교론이 나왔을 때, 당시 신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칸트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사색자체를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과 관련시켜 볼 때,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는 왜 우리 속에 악이 있는가? 어째서 최상의 준칙이 부패하는가 하는데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정녕 우리들 자신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하나의 근본 특징이라는 것밖에는 그 이상 원인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루이스 벌코프도 그의 죄의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大 철인 칸트도 인간에게 근본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였으나 그 기원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깊이 접근해오지 못한 사상으로 남겨 둔 것 같다.
혹자는 근본악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적 신성을 믿고, 칸트가 '순수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를 출간했던 당시의 소란과 항의를 말하며,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실망과 절망을 도덕적으로 준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근본악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첫째, 우리가 보다 선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어떤 지식을 얻기를 기대하거나 현재의 악을 시정하고 악의 발생원인을 제거하고 어떤 방도를 기대한다면 칸트의 근본악은 우리에게 선망(先望)을 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악의 발생 원인을 조건율(條件率), 윤리학, 심리학, 사회과학 등으로 규명하고 제거한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마음이 부패된 그대로 있는 한, 우리는 근본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심술의 밑에 자리잡고 나타내지 않는 모든 악의 발원처(發源處)에 수술을 가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악의 철학은 의지자체의 혁명과 변화를 문제삼는 것이라 하겠으며 칸트의 근본악은 인간에게 속해있는 하나 하나의 악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주체로의 인간 자신이 선해지는 것, 심술자체에 있어서 혁명적인 심정의 정화(淨化)를 문제로 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자유 자체 속에서 부패를 보는 칸트는 인간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자기의 선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 현실적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는 선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인간에로의 부단한 진행을 의미한다. 인간은 초월적이면서도 유한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진리나 정의는 일시적 성격을 면치 못한다.
Ⅲ. 결 론
이상에서 처럼 칸트는 도덕성을 넘어 종교적인 방법에서의 악의 해결을 논하였다. 웨스트민스터고백서는 인간은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선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2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는 인간으로 하여금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었는데, 인간은 거역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진노의 대상은 도덕적 죄악이다. 종교가 참되지 못할 때 모든 도덕적 죄악이 나오게 된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도덕적 죄를 얼마든지 범하게 된다. 이 죄들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결국은 멸망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칸트의 악의 성벽 중 제1단계에 도덕적 심정의 유약성과 제2단계인 불순성 그리고 3단계인 도덕법에 대한 반역을 준칙으로 삼는데, 인간은 이 악을 끊임없이 선에 대한 노력으로 전환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인가? 펠라기우스가 말하기를 인류는 원죄의 오염 없이 세계에 출생되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행할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죄 없이 생활할 수 있고, 또 다수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한 심술자체의 혁명, 그리고 선한 인간에도 부단한 진행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러한 인간들의 문제에 예수님은 자신의 품으로 돌아와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 받는 것인데, 곧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때에 성립된다. 사도 요한도 이것과 관련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