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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영성 -

  우리가 웃을 수 없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평화롭지 않으면 우리는 평화운동에 공헌할 수 없다. 평화의 영성은 평화를 위한 행동 이전에 우리의 존재가 평화로운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샬롬은 전쟁의 부재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잇는 건강, 안전, 우정, 구원을 포괄하는매우 넓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는 참 평화를 위해 거짓 평화를 유지시키는 관계를 분열시킨다고 선포한다. 평화의 영성은 오늘날 평화라는 단어 속에 숨긴 거짓을 들추어 낸다. 이것이 전혀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의 삶에 적합한 평화를 위해 선행될 수 밖에 없다. 예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눅12: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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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한 번은 주님께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은 불공평합니다. 수많은 죄인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당신은 그들을 용서하고 되돌려 보냈지요. 사실 어떤 사람은 수없이 왔다갔다 했지만 그때마다 당신은 그들을 반겼지;요. 그런데 저를 보세요.

저는 딱 한 번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영원히 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언제 회개하고 내게 용서를 구한 적이 있느냐?"

 

용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용서는 어떤 느낌이나 마음먹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용서는 일회적인 행동으로 끝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용서받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용서는 치유의 과정이며 그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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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지네를 본 개미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발을 여섯 개 내딛는데도 어느 발이 어떻게 먼저 나가는지 생각해보면 신기한데 발이 수십개인 저 지네는 어떻게 헷갈리지 않게 차례대로 발을 내밀면서 기어갈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그 개미는 옆에 기어가는 지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개미의 질문에 지네는 난감했다. 그 자신이 한 번도 자신의 발 중 어떤 발이 먼저 나가고 뒤에 나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맘먹은 대로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였기에 돌아다녔을뿐이다.

개미의 질문을 받은 지네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어떤 발을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이발? 그 다음발은?'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불행히도 그 지네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 우리의 영성이 자연과 깊이 교류될 수 잇는 이유도, 자연과 만남을 통해 성숙될 수 있는 이유도 영성 그 자체가 자연세계만큼이나 인간의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변화와 움직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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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가 우리를 불가촉천민으로 만들었고, 힌두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우리가 가촉민이 될 유일한 길이다. 인도의 독립운동과 우리 개종운동의 근본적인 추진력은 모두 자유를 향한 열망인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한 게 아니다. 불가촉천민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며, 공용 우물에서도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종교로 불릴 가치가 없다. - 신도 버린 사람들 중 바바사헤브가 인도 민중에게 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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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명시적인 교의가 아니라 태어나면서 갖는 정의와 도덕의 감각이고, 그 능력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내재하는 것이다.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중  

로저 윌리엄스 : 유럽 출신의 아메리카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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