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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1.
어느날 사람들이 모여 선언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권리가 되었고, 그것을 존중받게 되었다. 너무 낭만적인가? 하지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선언'은 권리 있음을 말함으로서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를테면, 제3계급이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테니스코트 선언을 보자. 그저 세금이나 뜯어볼 생각으로 제3계급의 의회 참여를 보장했지만, 그것이 더욱 큰 정치적 각성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루이16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았을 것이다.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선언>
비슷하게, 권리장전도 그렇다. 무혈혁명이었던 명예혁명에 이어, 1689년 영국 의회가 당시 국왕이었던 윌리엄 3세에게 승인하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권리장전의 풀네임은 "신하와 백성들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왕은 바지사장이 되었고 신하와 백성의 권리와 자유가 '선언'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선언된 것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책이 전하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풍경도 그러하다. 1948년 12월 10일의 저녁, 프랑스 파리의 샤이유 궁전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183번째 국제 연합 (UN) 총회가 열렸고, 이 날 밤 당시 58개 가입국 중 50개국의 찬성과 함께 하나의 선언문을 채택한다. 국제연합 총회 결의 217 A (III) 이라고 불리며 다른 말로 세계인권선언이라 불리는 것의 탄생이다.
<세계인권선언 회의 광경>
2.
<왜 분노하지 않는가>는 세계인권선언이 나온지 100년이 되는 해에 지금보다 더욱 구속력있고, 바뀐 현실에 부합되는 인권규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전세계의 사람들과 공동작업이 진행중이다.
앞서 언급한 선언의 풍경들을 보자면, 정말로 뭔가가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100년 인권선언이 가진 의미와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행동하자고 말한다. 어떤 정치적 과정보다 더욱 절실하고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위험, 여전히 광범위한 편견들로부터 인류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다보면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일종의 피상성이다.
2048 프로젝트는 인류의 1%에게 상류로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강을 따라 떠내려온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상류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단 1%의 사람만 상류로 올라가보고 나머지 99%는 상에서 사람들을 구하더라도 말이다. 59쪽
저자는 자신의 역할을 1%의 것으로 말하고 있다. 떠내려 오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사람들이 계속 떠내려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인권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2008년 이후, 1% 대 99%의 시대에 가장 쟁점은 경제적 부의 분배와 관련된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저자가 볼때 인권이 법률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반란에 기대어 사회격변을 이끌어 내려고 할 수도 있는 시대다(101쪽). 그래서 "사람들이 반란에 의지하지 않게 하려면 법에 의해 인권이 보호되어야만 한다."(102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가 부를 강화한다는 점"(100쪽)을 강조하면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과 결합된 자본주의와 시장을 통해서"(105쪽)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절실함이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말하는 파국, 즉 지금까지의 세계를 지탱해온 구조가 바뀌는 순간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완충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말이다. 혁명이든 반란이든 그것이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이 지탱해온 체제를 흔들기 전에 좀 더 강력한 형태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3.
이 책을 읽어보면 중요한 문제의식과 내용, 사례들이 나오지만 모든 것이 깔대기처럼 인권선언으로 수렴되는 일관성은 좀 질리긴 하다.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인권선언이 상류로 향하는 1%의 깨어있는 선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아는 인권의 역사는, 저자가 깔끔하게 정리하는 말보단 더욱 남루하고 삐뚤빼뚤한 것 같다. 테니스코트선언 이전에 수없이 죽어간 제3신분의 존재들을 떠올려 보거나 가까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국가 그 자체와 갈등을 보여왔는지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또한 지금 식물이 된 국가인권위원회를 보라. 인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그것을 수호하는 기구가 있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아무래도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선뜻 2048 홈페이지에 접속하기가 꺼려 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에서 벌어지는 치열함, 그리고 갈등, 그 남루함을 아는 입장에선 말쑥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회의장 속에 의논하고 토론하는 모습으로 인권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분명 2048년에 새로운 인권선언은 가능하고 실행될 테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좀더 그 운동이 지상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 누가 그 인권을 흔들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그와 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권을 위해 돈을 기부한다고, 문화적 패권의 상징인 테드 터너가 인권의 수호자가 되는 것은 왠지 어색하지 않은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