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회>를 정리했다. 지은이 필 주커먼은 "세계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13)인 덴마크와 스웨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견해를 인터뷰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종교적 사회의 경향과 원인을 추적한다.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나눈 심층대화를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고 주변적인 사회에서 삶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자, 내가 지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지역에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새로이 배운 것들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15)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을 통해 지은이가 의도하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 "(종교)이 없는 사회가 단순히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점잖고 쾌적한 곳이 될 수 있다"(15)는 것. 둘째, "종교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16). 마지막으로는 "지극히 종교적으로 변해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유난히 비종교적인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18)

첫번째 목적(여기에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하는데)을 달성하기 위해 주커먼은 종교학(및 신학)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두 가지-하나는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원초적 종교성을 지니고 있으며 종교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보편적이 아님을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입증한다. 주커먼이 인터뷰한 스웨덴, 덴마크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삶의 의미를 애써 찾으려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종교(국교인 루터교)는 결혼이나 장례를 치를 때 관습적으로 따르게 되는 '하나의 문화'에 불과하며 생활에 별다른 의미를 끼치지 않는다(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반종교적 성향'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종교에 '무관심'하다). 그렇다 해서 이들이 (종교성을 전제로 하는 이들이 주장하듯) 윤리적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 세계질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유하고 있고, 낮은 범죄율을 보이고 있다. 흔히들 짐작하듯 자살률이 높지도 않다. "세계보건기구가 최근(2003)에 조사한 세계 자살률을 보면, 남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20개국 중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57)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덴마크와 스웨덴은 이토록 종교에 무관심하게 되었을까? 단 하나 뿐인 종교조직(국교인 루터)"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을 행사""매력을 잃어"버린 측면도 있고, 종교를 통해 위안을 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회가 안전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으며, 여성들이 임금노동 시장으로 편입된 비율이 타 국가와 견주어 월등히 높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주커먼은 이 세 가지 가설에 두 가지 정도를 추가하는데 하나는 특별한 외세의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그러하듯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을 일치시킬 일이 없었으며, 다른 하나는 20세기들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거나 희석시켰다는 것이다.

원초적 종교성이라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별다른 종교적 열정이 없다하더라도 사회가 원만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주커먼의 전략은 성공적이다. 종교적 열정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선진국인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곳곳에 근본주의자들을 의식한 문장들을 삽입하지 않고, 본인이 불가지론자임을 불필요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건조하게 인터뷰를 정리하고 차분하게 분석했다면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주커먼처럼 불가지론자, 혹은 비종교적 사회를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이가 동일한 인터뷰 자료를 가지고 '해석'을 시도한다면, 좀 더 세밀한 용어들과 분석틀을 가지고 인터뷰 자료들에 접근한다면 조금은 논조의 결이 달라질 수도 있을 법하다. 특히 종교성에 대한 두 번째 전제를 반박하는 부분(모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이 그러한데 인터뷰어들이 이와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 없는 사회"라는 과격한 제목을 쓰기는 했지만 주커먼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 본 스웨덴,덴마크는 '종교성이 없는 사회'라기보다는 '종교적 열정'이 사그라든 사회에 가깝고, 조금 더 들여다보면 '종교적 열정' 뿐 아니라 공공영역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정치적 열정' 또한 사그라든, 차가운 사회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종교적 열정' 뿐 아니라 '정치적 열정' 또한 강한 한국사회(흥미롭게도 주커먼은 한국(과 일본)을 종교가 별다른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국가로 분리했다.)와 대비되어 여러 생각꺼리를 안겨준다


. 이 책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읽는 이로 하여금(읽는 이가 기독교인이라면 충격적일 수도 있을) 웃음을 짓게 하는 몇몇 사례들을 남기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Q: ...혹시 친구분들 중에 진정한 기독교인이 있나요?

A: 아뇨. 친구들은 ...우리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은 친구 중에 그쪽을 믿는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밤 같이 술을 몇 잔 하고서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고백할 게 있어" 나는 "그래"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자기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 친구는 술에 상당히 취해서 갑자기 나한테 말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낀겁니다.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말하는 겁니다. "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아줘""(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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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도서관에서 A.N.윌슨의 <사랑에 빠진 단테>를 빌렸다.

"많은 독자들이 전체 3편으로 구성된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연옥편>에 이르기도 전에 중도 포기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가까스로 <천국편>까지 읽은 사람들도 대부분 머릿속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독자들은 단테가 역시 위대한 시인이라고 굳게 믿게 되겠지만, 다시는 읽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고의 미적,상상적,감성적,지적 경험들을 음미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분명 기회를 놓치고 있다. 여러분이 이런 범주의 독자나 단테를 읽지 않은 부류에 속한다면, 이 책은 특히 여러분을 위한 책이다."(1장 중)


일종의 입문서인셈인데 분량은 500페이지 정도로 꽤 두껍다. R.W.B.루이스의 <단테>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강의> 사이 어딘가 쯤에 위치해 있는 책이다. <단테>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은 뒤에 <단테 신곡강의>를 읽고, 혹은 읽으며 <신곡>을 읽어가면 <신곡>의 대략적인 내용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와 <신곡>'음미'하는 건 별개의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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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와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읽는 사람들화이트헤드의 <진화하는 종교>를 번갈아가며 읽었다. '시론들'을 모아놓은 <책읽는 사람들>은 몇 가지 메모해둘 만한 문장들이 있고, 나머지 두 책들은 따로 노트해둘 필요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에 따르면, 호메로스는 불쌍한 맹인이면서도 미래를 꿰뚫어보는 현인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특성에서 우리는 그의 서사시를 다양한 관점에서 읽어갈 수 있다. '맹인 호메로스'라는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삶의 상징으로 읽어내고, 삶을 전투이며 여행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호메로스가 두 서사시의 확실한 저자이고, 신비에 싸인 시의 아버지임을 뜻하며, 나아가 서사시에 권위를 더해준다. 우리가 호메로스를 <일리아드><오디세이아>의 실제 저자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서사시가 웅단한 저자를 나중에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하든 간에 이런 순환과정은 우리와 시적 행위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우리와 아득한 과거의 박학하고 창조적인 천재간의 관계까지 규정한다." (33-4)

"독자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시력을 잃어야 한다. 세상의 사물을 보지 못하고 세상 자체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행복과 공포를 보지 말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를 에워싼 겉으로만 번쩍이는 것에 유혹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중심적인 관점, 즉 우리가 세상 안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아 우리를 세상의 중심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관점, 또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관점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탐욕스러운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기준에 맞추어지기를 바란다. 심지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야기까지 우리 기준에 맞추기를 바란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 우리를 내면으로 끌어가 고민하게 만드는 치밀한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 살갗 한 꺼풀 깊이로 피상적이어서 쉽게 읽히고, 조금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금세 이해할 수 있는 모험담이면 충분하다. ...인간의 관점에서 신비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호메로스는 감각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 현실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요즘의 표현을 빌면) 정형화된 사고방식에 프로그램되지 않기 위해서 맹인이 되어야 했다. 책의 이면에 존재하는 독자인 우리에게도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 영국 시인 루퍼트 브룩이 정확히 표현했듯이, '우리 눈이 우리를 눈멀게 하지'않도록 해야 한다."(38-40, 부분수정)

"...문학에서 믿음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문학적 믿음은 상상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회의와, 실체적인 현실 세계를 거부하는 광기 사이에 존재한다.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단테, 조토의 유명한 초상화를 닮은듯한 인물,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고통와 즐거움을 겪었던 단테는 또 다른 단테, 즉 천국에서 ''라고 말하며 지옥에서 뜨거운 불 가까이에서 걸었던 탓에 수염이 그슬렸다는 단테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우리가 대서사시를 통해 알게 된 단테에게 <신곡>은 픽션이 아니다. 진실한 말로만 쓰인 기록이며,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기록이다. 한편 <신곡>은 여행일지, 낯선 땅에서 쓰인 여행 기록이다. 그곳의 지리적 특징들, 그곳 사람들과 나눈 대화, 그곳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의견, 개인적인 불운 등을 상사하게 기록한, 훗날 비슷한 여행을 독자들을 위한 안내서다." (98)

"이상적인 독자는 무한한 망각의 능력이 있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같은 사람이고, 쥘리엥 소렐이 참수당했으며,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인한 범인의 이름이 아무개라는 사실을 기억에서 지워낼 수 있다. ...이상적인 독자는 작가가 직관으로만 알아낸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상적인 독자는 몇 권의 책을 소장했는지 헤아리지 않는다. ....이상적인 독자는 모든 문학 작품을 익명의 저자가 쓴 것처럼 읽는다. ... 이상적인 독자는 책을 표지로 판단한다. ...이상적인 독자는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을 때까지 자신이 이상적인 독자인 것을 모른다. ...이상적인 독자는 밟아 다져진 길을 걷는다. "훌륭한 독자, 뛰어난 독자,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독자는 다시 읽는 사람이다." ... 이상적인 독자는 모든 책이 어느 정도까지는 자서전이라 생각한다. ...때때로 작가는 이상적인 독자를 만나기 위해 수세기를 기다려야 한다. 블레이크가 노스럽 프라이를 만나는 데는 150년이 걸렸다. ...이상적인 독자는 만약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독자는 책에서 쓰인 규칙과 법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는 사람이다. ... 이상적인 독자는 책을 끝까지 읽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는 결코 자신의 책에 대한 이상적인 독자가 될 수 없다"('이상적인 독자란?' 글 중 몇몇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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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과 버스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인터뷰집 <다시, 그림이다>를 드문드문 읽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화가 중 가장 선호하는 작가(라고 해봤자 내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은 다른 시기에 견주어 일천한 편이지만)일텐데, 그의 작품들이 그렇듯 너무 젠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Q: 당신은 세계라는 것이...앞으로도 영원히 탐구될 수 있는 미스터리라고 생각합니까?

A: , 그렇습니다.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많은 결정을 수반합니다. 3차원을 어떤 형태로든 양식화하고, 해석해야 하니 말이지요. (머리말, 11. 부분수정)"

"Q: ...왜 그렇게 나무에 매력을 느끼는 겁니까?

A: 나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생명력의 가장 큰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무도 서로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같지요. ...나무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당한 때에 그곳에 있지 않으면 나무의 형태와 부피를 간파해내기 어렵습니다"(29)

"우리는 미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엄청난 수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훨씬 더 의심스럽습니다.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52)

"분명한 것은 전시공간의 조건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마크 로스코가 1950년대에 뉴욕의 시드니제니스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을 때, 작품들은 전시장의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닿았고 벽의 반을 뒤덮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작품을 보았다면 그 붉은색에 압도당했을 겁니다. 그러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로스코의 방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80)

"모네는 당신이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반 고흐 역시 그렇습니다. 그는 당신이 주변 세계를 보다 열정적으로 살피게 만듭니다. ...그림은...(그 그림을 보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85)

"제약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극제가 됩니다. ...다섯 개의 선 또는 100개의 선을 사용해 튤립 한 송이를 그리라 한다면, 다섯개의 선을 사용할 때 훨씬 더 창의적인 그림이 나옵니다"(98, 부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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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브 불프 <삼위일체와 교회>중 한국판에 새로이 추가된 8장 '통일성의 삼위일체적 본성에 근거한 수위권'을 읽었다. 기존 내용을 보완하는 하나의 챕터라기보다는 책의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는 독립된 논문이라 할 수 있는데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담고있다. 그가 보기에 수위권에 대한 질문은 "교회의 정치-교회적 군주정 대 교회적 과두정 혹은 교회적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교회의 통일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471)이다. 그가 보기에 가톨릭의 교황 수위권 주장이 타종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통일성의 본성"에 대한 가톨릭적 해석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몇몇 냉소적 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직제의 개념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이미 주어진 개념에서부터 통일성의 직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472) 

형식적인 차원에서 "단일한 신앙과 사랑에 의해서 표현되는 신자들의 통일성이 "하나의 분리도지 않은"감독직을 요구"(475)에 맞추어, 실질적인 차원에서는 "영원한 목자는 사도들을 세상에 보냈고 이들이 하나되고 분리되지 않도록 복된 베드로와 그의 계승자들을 머리에 두셨"기에 가톨릭은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한다. 이러한 식으로 "한 분 하나님"에 상응하는 "신자들의 하나됨", 이를 매개하는 "하나의 교황"의 그림이 그려진다. 

불프가 보기에 가톨릭의 그림은 "통일성의 원리(하나)"는 살리고 있는 반면 통일성의 본질은 살리지 못하고 있다. "통일성의 본질은 삼위일체적"(476)이며, 이 삼위일체의 핵심은 "신적 인격들의 동등성"(482), 그 동등성이 내포하는 "사랑의 '자기를 내줌'의 실천'"에 있다. 현대 가톨릭의 교회론 및 교황의 수위권 확립을 기초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그리고 사실상 그 최대수혜자인)라칭어는 교회적 통일성의 본성이 삼위일체적임을 분명히 인식했으나 다시금 "하나의 책임 있는 인격"이라는 원리가 삼위일체적 신앙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이는 "통일성의 (삼위일체적)본질과 그 제안된 통일성 사이의 균열"을 보여줄 뿐이며, 결과적으로 통일성의 삼위일체적 본질 역시 신적 인격들간의 동등성과 이와 결부된 자기내어주는 사랑의 실천에 상응하는 교회론이 아닌 삼위일체에 대한 위계적 이해에 상응하는 교회론을 구성할 수 밖에 없다. 

"교회적 통일성의 가시적 원리는 바로 그 통일성의 본성"에 상응해야 하며, 교회적 통일성은 "하나"의 탁월함이 아닌, 다수가 행하는 자기 내줌의 사랑에 근거해야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 속에서, 모든 인격은 그 자체로 성령의 담지자로서 통일성의 구성적 작업에 참여한다"(487) 이에 상응해 "교회 지도권의 최고의 단계는 바로 공동체적 방식 가운데 신학적으로 이해되고 제도적으로 규정되고 실천적으로 행사되어야한다"(488) 이 형식적 조건이 "삼위일체적 삶의 핵심에 존재하는 자기 내줌이라는 일관된 실천을 동반"(490)해야한다는 것은 불프에게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수위권의 공동체의 공동체적 본성과 또한 자기 내줌의 실천으로서 수위권의 실행은, 통일성의 가시적 섬김이 삼위일체적 통일성의 본성에 상응도록...결합되어야 한다. 수위권이 한 인격의 단일성에 위치하고 전해진 형식적 권력에 힘입어 실행되는 한, 수위권은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에는 통일성을 위해서 섬기기보다는, 비통일성을 만들어낼 뿐이다"(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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