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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성서의 기도서>(대한기독교서회, 2010)가 떠올랐다. 학부시절에 '신학실천'의 과제도서로 이 책을 보긴 했으나(그 때는 본회퍼 선집이 나오기 전이어서 문익환역본으로 읽었다)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말과 목차를 훑었다.

 

<신도의 공동생활>'공동체'-'함께하는 날'-'홀로있는 날-'섬김'-'고해와 성만찬' 순으로 전개되며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려는 문제는 본질상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이 문제는 사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에 부과된 과제이기 때문에 개개의 우연적인 해결책들이 아니라 공동의 교회적 책임이 중요하다. ...수없이 생겨나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 형태들은 책임 있는 사람들의 사려 깊은 동역을 필요로 한다" (19)

 

'공동의 교회적 책임', '사려 깊은 동역'에 밑줄을 긋고, 책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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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책을 도서관에 신청했다. 구입신청목록은 다음과 같다.

 

1.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 로빈 마이어스,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2.괴테의 친화력, 발터 벤야민, ,2012

3.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발레리 라르보, 아카넷, 2012

4.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그린비, 2012

5.속물교양의 탄생, 박숙자, 푸른역사, 2012

6.한 권으로 읽는 그리스 고전, 샬롯 히긴즈, 이론과실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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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밤, <아우구스티누스> 평전을 읽으려다 다시 가방에 넣고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지호, 2001) 중 몇 개의 글을 드문드문 읽었다. 책을 즐기기에는 최적의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좋을 지은이(그녀의 아버지는 <평생독서계획>의 저자인 클리프턴 패디먼이고,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동안 '타임''라이프'에 글을 실었던 애널리 패디먼이다)의 앎과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에세이들로 채워져있지만 다시 읽게되는 글들은 (처음 이 책을 읽게되면 눈이 자연스레 가는)그녀가 자신의 스노비즘을 은밀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들('책의 결혼' '책벌레 이야기' '너덜너덜한 겉모습' '당근 삽입'이 대표적이다)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그녀의 삶을 담담히 묘사하는 글들이다.

 

탐독가들, 애서가들(혹은 '탐독가'들처럼 보이고 싶은 이들, '애서가'인양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책과 책에 관한 지식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열거하고 싶은 욕구는 애연가들이 담배를 찾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떨쳐내기 힘들다. 정도의 차이지, 아무리 담백하게 쓰더라도 그 속에 담긴 욕구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글 자체를 쓰지 않을테니까. 좋은 '책 관련 에세이'는 그 욕구들을 적절하게 조율하면서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삶의 순간들과 연결하느냐에 달려있다.

 

"소네트의 ...위로하는 힘은 2년 전, 여든여덟인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평생 겪었던 즐거운 일과 실망스러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감상적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읽어나 쓰지 못한다면 나는 끝난 것이라고 봐도 좋다" ..."밀턴도 실명한 다음에 <실락원>을 썼잖아요"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이 캄캄하고 넓은 세상에서 반생이 끝나기도 전에'-그 다음이 어떻게 되더라? 빛 이야기가 나오던가?" ...어둠 속에서 우리는 14행 가운데 6행 반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었다. "뉴욕에 돌아가거든 만사 제치고 그 소네트부터 찾아서 전화로 읽어다오" ...그날 밤 마이애미에서는 밀턴의 소네트가 계기가 되어 아버지의 그 불굴의 지적 호기심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지적 호기심이 아버지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아버지에게 그 소네트를 읽어드렸다.

 

'이 캄캄하고 넓은 세상에서 반생이 끝나기도 전에

내 빛이 꺼져 버린 것을 생각하며,

또 감추어 두면 죽음이 될 한 달란트,

창조주가 돌아와 꾸짖지 않으시도록

그것으로 그 분을 섬겨 내 참 계산서를 제출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쓸모없이 내게 묵어 있는 한 달란트를 생각하며

나는 어리석게도 묻는다.

"하느님은 빛을 허락치 않고도 낮일을 하라 하실까?"

그러나 그 물음이 입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인내가 대답한다.

'"하느님에게는 인간의 일이나 재능이 필요없다.

부드러운 멍에를 가장 잘 견디는 자, 그가 그 분을 잘 섬기는 것이니...오직 참고 기다리는 자, 그 역시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렇지, 그렇지" 평소 비관적이고 비종교적이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떻게 내가 그걸 잊었을까?" "('소네트를 멸시하지 말라', 60-1)

 

"나 자신이 받아본 최고의 헌사, 비록 그 스코틀랜드인의 헌사만큼 눈부시지 않지만 그것하고 절대 바꾸지 않을 헌사는 조지 하우 콜트의 <자살의 수수께끼> 속표지에 적힌 것이다. 나는 그 책하고 같이 잔 적은 없지만, 그 저자하고는 여러 번 같이 잤다. 그 헌사는 이렇다(조지, 진정한 새 친구 관계 이후로 우리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이것은 당신의 책이기도 해. 내 삶 역시 당신 것이듯이""('면지에 적힌 글'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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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서 <14회 부산 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 두기봉>(주성철 등 지음, 2010)과 알렉산더 슈메만의 <하나님 나라의 성찬>(새세대, 2012)를 빌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보다는, 두 책 모두 비교적 얇은 편이어서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로 가득찬 가방에 넣기가 다른 책들보다 수월했기 때문이다. 까페에서 <두기봉>을 훑어보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자신의)영화가 두 편 있는데, 첫 번째 영화가 <유도용호방>이고, 두 번째 영화는 <참새>입니다. <유도용호방>이 만들어진 2003년의 홍콩은 경제가 좋지 않아 실업률이 놓았고, 사스가 발생하여서 분위기가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70년대 홍콩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기운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오랜 전통이 깃든 건물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의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된 거리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문화의 산물입니다. 새로운 것은 금방 탄생할 수 있지만 예전의 것들은 한 번 없어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영화는 시대를 기록하는 매체입니다. ...영화를 통해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고, ...무언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유도용호방><참새>는 저의 홍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35-6)

 

"호금전은 후기에 한국에서 <공산영우>를 찍었습니다. 제작비 부족으로 상당히 어려웠고, 이는 촬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감독은 최대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작품을 찍어 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장철의 영화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화라면, 호금전의 영화는 지금 보더라도 말이 안 되거나 어색한 부분이 없는 작품입니다"(69)

 

"구로사와 아키라는 굉장히 존경하는 감독입니다. 그분의 영화 세계와 스타일을 많이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디테일을 중시하는데, 그 분의 영화를 보면 어떤 사물은 눈에 보이고 나서야 존재한다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71)

 

"제가 자연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 자연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77)

 

"Q: 만약 감독님이 무인도에 감독님의 영화 세 편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을 가져가고 싶으신지요?

A: 일단 무인도에 간다면 제 영화는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가져가서 뭐에 쓰겠습니까?"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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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의 <다시, 프로테스탄트>(복있는 사람,2012)를 일독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이왕이면 '지금, 여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책을 읽고팠고, 때마침 눈에 들어온게 <다시, 프로테스탄트>였다. 책 제목이 매력적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프로테스탄트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울렁이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개신교에 대한 소란스러운 진단과 부적절한 처방에 대한 하나의 항의"(15)로 쓰여졌다는 이 책은 240페이지 가량 되는, 그리 두껍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분량을 지니고 있는데 거슬리는 부분없이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수월하게 읽힌다. '무난함과 수월함'이 때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이 책은 전자에 가깝다. 이 책은 하나의 '제안'을 하고 있으며, 제안은 명징할수록 좋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위치에서("나는 개신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썼다. 그러나 내가 보수나 진보 측의 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아마도 이 책은 '복음주의'로 지칭되어 온 그룹의 비교적 젊은 세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16)) 기본적 논지를 미리 밝힌 채("이 책의 기본적 논지는 "한국 개신교가 의지했던 지난 30년간의 패러다임은 그 시효가 다했으며, 2007년이라는 상징적 해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주장이다"(17)) 이 위에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현재 한국 개신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여러 종료의 연구자료와 사건들을 통해 묘사"하고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세 가지 대표적 '오해'(한국 개신교의 개신교 정신에 대한 오독)"을 열거한 뒤 3부에서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책들이라면 대게 이런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 본 다른 한국 개신교 비판서적들(대체로 이런 책들은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한국 기독교'의 문제로 비약해 다루며 예언자적 열정을 불타오르나 분석은 성긴, 인상비평 선에서 그친다)과 견주어 이 책은 차가운 편이다. 이를테면 1부에서 지은이는 "종교인구 센서스"의 지표를 가지고 분석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1995-2005)개신교는 ...확연한 감소세를 보였다. 144,000명이 줄어들었고, 성장률은 -1.4%였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천주교의 대약진이다. 인구 대비 6.7%에서 10.9%를 차지하는 규모가 된 것은 불과 10년 사이에 2,195,417명이 늘어나면서 성장률 74%를 기록한 덕분이다"(28)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비판서적들도 하고 있다(이 책의 지은이도 언급했듯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의 수평이동을 이야기하는 선에서 멈춘다). 지은이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고 본다"(29)).

 

"2005년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도시 종교'. 특히, 압도적인 '수도권 종교'인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전국 평균과 달리 불교를 5% 정도의 격차로 앞서고 있다. 대전과 충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개신교는 10년 전에 비해 감소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종교 현실은 단순히 전국 평균치만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지역별 분포 상황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현실감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30)

 

2'오해'역시 논지가 분명하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논의는 한 가지로 수렴된다. 바로 '목사'. ...나는 현재 한국 개신교에서 목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핵심을 '개신교 성직주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87)

 

'만인사제설'을 들어 중세 위계구조를 깨뜨린 프로테스탄트는 다시금 성직자 중심주의에 들어섰고(이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별다른 제도적 기반을 갖추진 못한 한국 개신교 토양에서는 더 나아가 그 전문성마저 상실했다. '성장주의'와 맞물려 한국 개신교 전반은 목회자의 수적 증가에만 힘을 쏟아부었고, 결과적으로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현재는 목회자의 전문성 부족은 물론 "목회 현장의 부실과 치열한 생존경쟁 양상"(95)만을 낳았다. 게다가 지적 토대가 취약한 한국 개신교는 '승리주의'에 갖힌 나머지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채 악화일로를 걷는다. "근대화 2기쯤으로 불러야 할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제는 한국 개신교가 일종의 용도폐기 상태인 것이 아니냐는 위기국면"(157)에 접어든 것이다.

 

(2부에서도 부분적으로 나오지만)3부에서 지은이가 내놓는 대안은 패러다임 전환("목회자로 하여금 개신교 전체가 대표하게 하는 방식"(75)'교계 패러다임'에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전문적 소양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 자기 영역에서 대표성과 발언권을 갖게 하는"(76) '기독교 사회 중심 패러다임'으로)에 입각한 로고스,파토스,에토스의 조화(정재현 교수식으로 말하자면 삶이라는 지평에 근거한 지성,감성,의지의 조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개신교 생태계'의 구축이다. 목회자수는 줄이고, 대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 평신도들의 지,,의의 조화를 가능케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출 수 있도록 다양한 인문교양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 시민운동과의 연계를 해 사회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등은 그 구체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내부자든, 외부자든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 대해 일정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공감아래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의 틀을 갖게될 수도 있다. 특히나 "교권체제에서 자유"(167)로우나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다시금 "교권체제"로 되돌아가거나, 아예 세속화된 직업을 택하는, 혹은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거칠게 분류하면 내가 여기에 속한다) 연세대 신학과 학부생들은 졸업 하기 전,혹은 특정 영역에 발을 담기 전 한번쯤 꼼꼼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책의 세목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도 있었으나(하나 언급하자면 지은이는 프로테스탄트 이념과 이에 입각한 근대화의 역사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실상 그 역사는 피비린내나는 역사였으며 쓰라린 역사였다. 프로테스탄트 이념은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하여 '다시, 프로테스탄트', 즉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갱신은 '지금,여기' 뿐이 아닌 과거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이 책이 지닌 장점과 견주면 그 부분은 이후, 대화의 장에서 논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의 말맞따나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은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믿음을 가지고 버티어 내는 것"(40)이며, 함께 버티기 위해서는 대화를 이루기 위한 넓은 차원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틈틈이 <맥베스>를 읽었다. 번번이 읽는데 실패했던 예전과 달리 조금씩 대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고 야심도 없지는 않지만 그에 따른 사악함이 없어요." (15, 레이디 맥베스의 대사 중)

"내 의도의 옆구리를 찌르는 박차는 오직 하나 치솟는 야심 ..."(17, 맥베스의 대사 중)

이렇게 인간은 부풀어오르고, 스스로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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