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송의 <다시, 프로테스탄트>(복있는 사람,2012)를 일독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이왕이면 '지금, 여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책을 읽고팠고, 때마침 눈에 들어온게 <다시, 프로테스탄트>였다. 책 제목이 매력적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프로테스탄트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울렁이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개신교에 대한 소란스러운 진단과 부적절한 처방에 대한 하나의 항의"(15)로 쓰여졌다는 이 책은 240페이지 가량 되는, 그리 두껍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분량을 지니고 있는데 거슬리는 부분없이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수월하게 읽힌다. '무난함과 수월함'이 때로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이 책은 전자에 가깝다. 이 책은 하나의 '제안'을 하고 있으며, 제안은 명징할수록 좋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위치에서("나는 개신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썼다. 그러나 내가 보수나 진보 측의 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아마도 이 책은 '복음주의'로 지칭되어 온 그룹의 비교적 젊은 세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16)) 기본적 논지를 미리 밝힌 채("이 책의 기본적 논지는 "한국 개신교가 의지했던 지난 30년간의 패러다임은 그 시효가 다했으며, 2007년이라는 상징적 해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주장이다"(17)) 이 위에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현재 한국 개신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여러 종료의 연구자료와 사건들을 통해 묘사"하고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세 가지 대표적 '오해'(한국 개신교의 개신교 정신에 대한 오독)"을 열거한 뒤 3부에서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책들이라면 대게 이런 구성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 본 다른 한국 개신교 비판서적들(대체로 이런 책들은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한국 기독교'의 문제로 비약해 다루며 예언자적 열정을 불타오르나 분석은 성긴, 인상비평 선에서 그친다)과 견주어 이 책은 차가운 편이다. 이를테면 1부에서 지은이는 "종교인구 센서스"의 지표를 가지고 분석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1995-2005년)개신교는 ...확연한 감소세를 보였다. 약 144,000명이 줄어들었고, 성장률은 -1.4%였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천주교의 대약진이다. 인구 대비 6.7%에서 10.9%를 차지하는 규모가 된 것은 불과 10년 사이에 2,195,417명이 늘어나면서 성장률 74%를 기록한 덕분이다"(28)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비판서적들도 하고 있다(이 책의 지은이도 언급했듯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의 수평이동을 이야기하는 선에서 멈춘다). 지은이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고 본다"(29)).
"2005년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도시 종교'다. 특히, 압도적인 '수도권 종교'인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전국 평균과 달리 불교를 5% 정도의 격차로 앞서고 있다. 대전과 충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개신교는 10년 전에 비해 감소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종교 현실은 단순히 전국 평균치만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지역별 분포 상황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현실감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30)
2부 '오해'역시 논지가 분명하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논의는 한 가지로 수렴된다. 바로 '목사'다. ...나는 현재 한국 개신교에서 목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핵심을 '개신교 성직주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87)
'만인사제설'을 들어 중세 위계구조를 깨뜨린 프로테스탄트는 다시금 성직자 중심주의에 들어섰고(이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별다른 제도적 기반을 갖추진 못한 한국 개신교 토양에서는 더 나아가 그 전문성마저 상실했다. '성장주의'와 맞물려 한국 개신교 전반은 목회자의 수적 증가에만 힘을 쏟아부었고, 결과적으로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현재는 목회자의 전문성 부족은 물론 "목회 현장의 부실과 치열한 생존경쟁 양상"(95)만을 낳았다. 게다가 지적 토대가 취약한 한국 개신교는 '승리주의'에 갖힌 나머지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채 악화일로를 걷는다. "근대화 2기쯤으로 불러야 할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제는 한국 개신교가 일종의 용도폐기 상태인 것이 아니냐는 위기국면"(157)에 접어든 것이다.
(2부에서도 부분적으로 나오지만)3부에서 지은이가 내놓는 대안은 패러다임 전환("목회자로 하여금 개신교 전체가 대표하게 하는 방식"(75)인 '교계 패러다임'에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전문적 소양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 자기 영역에서 대표성과 발언권을 갖게 하는"(76) '기독교 사회 중심 패러다임'으로)에 입각한 로고스,파토스,에토스의 조화(정재현 교수식으로 말하자면 삶이라는 지평에 근거한 지성,감성,의지의 조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개신교 생태계'의 구축이다. 목회자수는 줄이고, 대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 평신도들의 지,정,의의 조화를 가능케할 수 있는 토양을 갖출 수 있도록 다양한 인문교양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 시민운동과의 연계를 해 사회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등은 그 구체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내부자든, 외부자든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 대해 일정한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공감아래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의 틀을 갖게될 수도 있다. 특히나 "교권체제에서 자유"(167)로우나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다시금 "교권체제"로 되돌아가거나, 아예 세속화된 직업을 택하는, 혹은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거칠게 분류하면 내가 여기에 속한다) 연세대 신학과 학부생들은 졸업 하기 전,혹은 특정 영역에 발을 담기 전 한번쯤 꼼꼼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책의 세목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도 있었으나(하나 언급하자면 지은이는 프로테스탄트 이념과 이에 입각한 근대화의 역사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실상 그 역사는 피비린내나는 역사였으며 쓰라린 역사였다. 프로테스탄트 이념은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하여 '다시, 프로테스탄트', 즉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갱신은 '지금,여기' 뿐이 아닌 과거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이 책이 지닌 장점과 견주면 그 부분은 이후, 대화의 장에서 논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의 말맞따나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은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믿음을 가지고 버티어 내는 것"(40)이며, 함께 버티기 위해서는 대화를 이루기 위한 넓은 차원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틈틈이 <맥베스>를 읽었다. 번번이 읽는데 실패했던 예전과 달리 조금씩 대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은 위대해지고 싶고 야심도 없지는 않지만 그에 따른 사악함이 없어요." (1막 5장, 레이디 맥베스의 대사 중)
"내 의도의 옆구리를 찌르는 박차는 오직 하나 치솟는 야심 ..."(1막 7장, 맥베스의 대사 중)
이렇게 인간은 부풀어오르고, 스스로를 파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