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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오마주
박찬욱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1.영화감독으로서 그 이름을 알리기 전에(물론 그 전에도 몇 개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므로) 그는 (그의 인터뷰에서 그 자신을 정의한 것을 빌리자면) 정직한 비평가였다. 이 책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은 영화 매니아를 사칭하던 때 내가 종종 빌려 보던 책이었다. '오마주'의 머리말에서 그가 언급한대로 그 책은 몇몇 영화들에 대해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좋은 면'을 말하고 있었고, 그것은 꽤나 유용한 정보들이었다.(게다가 그는 그가 본 영화의 핵심을 간결한 레토릭으로 정리해내는데 상당히 탁월하다.)그리고 그 유용함은 이 책에서도 유지되는데, 만약에 'JSA'가 흥행에서 실패해 그가 영화 평론가 생활을 유지했더라도, 나는 그가 꽤나 신뢰할만한 글들을 발표했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무수한 영화잡지들이 있고, 그 안에 무수한 평론가들이 평론을 실어대지만 내가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글을 쓰는 이는 4명-정성일, 허문영, 김영진, Djuna(서동진을 넣을 수도 있지만 그는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영화관련 글을 쓰지는 않는다.) 정도다.) 물론 이것은 그가 바랬던 생활이 아니었을 테지만.
2.절판된 것을 다시 찍어낸다는 일차적인 목적 말고도 꽤나 많은 평이 추가되었다('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력'이 출간된 시점이 94년이니, 이 이후 개봉한 영화들에 대한 평은 다 추가된 것 같은데 약 40개 정도 된다.). '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력'의 속편을 기대한 이들에게나, 'JSA'이후의 영화들을 접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 모두 다 일정 이상의 만족감을 줄만한 책이다. 나같은 경우는 전자에 속하는데, 이제 더이상 영화 매니아를 사칭할 필요를 못느끼므로-사칭한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영화들에 대해 남다른 식견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 매니아를 사칭하기에 이제 내 영화감상 시간은 기준치에 미달이며 , 미감 역시 아주 좁다는 것을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다.- 내가 본 영화들에 대한 평만 골라서 읽었다. 몇 개의 노트를 달아 놓자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스페인이라는 토양에서 정치적 부패와 부르주아적 위선, 무정부주의적 허무감을 자양으로 해서 자라난 독버섯이다. (p40, '마타도르')
무엇보다도 '분노의 주먹'은 이기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자의 고독에 관한 영화이다.(p45, '분노의 주먹')
'히치콕의 주인공이 미래의 화성에서 벌이는 모험'을 찍고 싶다는 버호벤의 야망은 성공했다. 히치콕적 인간형은 '오인된 사나이'와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의 두 가지로 대표되는 바, 전자는 자기가 아닌 사람이 되어 영문도 모른채 쫓기면서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자기정체성 때문에 현실에 빠지게 되는 사람이다. '토탈 리콜'에서 슈워제네거는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기억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자기가 오인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쫓겨다닌다.(p86 '토탈리콜')
...고의적인 시/공간의 구체성 무시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첫째, 이것은 재현된 세계가 아니다. 즉, 특정 시/공간에 전속된 이야기가 아니다. 둘째, 따라서 이 상상적 세계는 보편적이다. 종합한다면, 언제 어디도 아니기 때문에 , 동시에, 언제 어디서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것은 동화일 수밖에 없다. 룰라 모녀와 세일러, 바비 페루가 현대 영화의 주인공들답지 않게 지극히 전형적이고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도 이제 설명 가능하다. '광란의 사랑'을 두고 영화에 역사가 없고 인물에 깊이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신데렐라'에 토마스 만을 요구하는 꼴과 같다.(p153~4 '광란의 사랑')
데릭의 영특함, 청결함, 남성적 매력, 마약에 대한 혐오,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편집증적 노력, 애국정신,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는 태도, 노동에의 예찬, 종교적 경건함 따위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청교도적인 것이다. 결국 스킨헤드의 폭력숭배, 마초주의, 인종주의는 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데릭은 백인 지배계급 이라는 동전의 어두운 이면이다.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이 백인 쓰레기 집단은 자기들이 KKK와 동일시되기를 거부한다. 그따위 무식한 시골뜨기 농사꾼 무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가소로운 소리만은 아닌 것이, 남부의 그 백가면들이 부유한 농장주 내지는 자영업자였던 데 반해, 우리의 주인공들은 유색 인종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오갈 데 없어진 룸펜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이다.(p233~4 '아메리칸 히스토리X')
로보캅은 스스로 머피임을 선언하지만, 그는 여전히-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공학 3원칙'을 연상케 하는-'로봇 경관 3지침'에 우선하는 '제4지침:OCP의 간부는 체포할 수 없다'의 프로그램이 내장된 반기계일 뿐이다. 그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중간자'다. 갑옷이 피부가 되어버린 중세/미래의 전사, '메트로폴리스'의 여성 로봇의 남성 모조품이면서 성별 정체성을 상실한 중성인, 그리고 영화 고아고 문안대로 '반인-반기계', 이것이 로보캅니다. 그에게 어느 한쪽을 선택할 권리란 이미 없다.(p249 '로보캅')
어른들의 죄악의 결과로 탄생한 프레디를 아이들이 대신 상대해야 하는 현실, 마이너리티 집단만이 희망이라는 주장, 그것이 천대받는 싸구려 공포영화 '나이트메어'시리즈의 핵심이다.(p272, '나이트메어3')
'양들의 침묵'이 불길한 것은, 렉터의 자유 때문이 아니라 클라리스의 부자유 때문이다. 어느 정사 장면보다 더 에로틱한 저 '손가락 통정을 보고서도 누가 이들의 사랑을 플라토닉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p280, '양들의 침묵')
사실 이 영화의 재미는 새뮤얼 잭슨의 오델과 로버트 드니로의 루이스, 브리지트 폰다의 멜라니, 마이클 키튼의 니콜렛 같은 흥미롭고 사실감 넘치는 캐릭터 그룹과 그들 사이에 낀 두 덤덤한 남녀 사이의 긴장에서 나온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인간들 틈에 던져진 조용한 남녀. 영화가 끝날 때쯤 되면 정말 일을 저지른 쪽은 바로 그들임을 알게 된다. 고분고분한 척함녀서 몰래 양다리 걸치고 가다가 막판에 양쪽 뒤통수를 다 치고 빠지는 재키의 행보, 거기서 오는 통쾌함은 대단하다.(p307~8, '재키 브라운')
그(이스트우드)가 존 웨인 이래 최고의 서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얼굴 때문이다. 그의 안면은 그대로 하나의 풍경이다. 그것도 와일드 웨스트의 풍경이다. 그의 눈두덩은 계곡과 같이 움푹 들어갔고 콧등은 산맥처럼 준엄하다. 눈가 주름은 강줄기처럼 갈라졌으되 그 강은 이미 말라버린지 오래다. ...요컨데 그의 얼굴은 황량하다.(p341, '용서받지 못한자')
...르네상스에서 팝아트에 이르는 서구 회화의 '시선의 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 시점의 일대 역전극은 결국 페미니즘의 패배로 일단락된다.(p351, '드레스 투 킬')
이(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의 영화 스타일)를 일러 , '영화 독학자의 스타일'이라 할 만하다.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멋대로 찍어버린다는 뜻이다. 정교하게 연출할 자신이 없어 그런지, 다른 감독이라면 공들여 촬영할 장면을 대충 생략해 버린다. 거기서 엉뚱하게도 예술이 삐져나온다. 남이 버릴 장면은 기어이 붙여서 쓰고 남이 반드시 넣었을 신은 아예 안 찍어버리는 데서 생기는 예술.(p382, '하나비')
정치에 무관심한 영화일수록 정치적이고(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들), 정치문제를 직접 다루는 영화일수록 거기서 정치적 의미는 증발된다('JFK').(p438,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어쨌든 전통적으로 미국의 정치 성향 영화들은 그 근본적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의도적 모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작가도 자기가 좌파로 분류되는 일을 피해야 했고, 자본과 대중 역시 철저하게 급진적인 영화는 애당초 원하지 않아왔다. 차라리 그런 종류의 양심은 앨런 파큘러('대통령의 음모','암살단')식의 냉정함과 '로보캅'유의 상업적 냉소주의, '대부'시리즈가 보여주는 은밀한 비유 등에서 더욱 비타협적으로 견지되었다는 역설조차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리버 스톤 개인의 이데올로기라든가 '7월 4일생'이 갖는 부분적 진실/허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더 작은 것, 미국과 할리우드의 사회 성격, 자본 매커니즘을 연구하거나, 원하는 바를 때론 분명하게 때론 모호하게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영화적 기술을 공부하는 편이 이롭겠다.(p460, '7월 4일생')
덧.
부록으로 실린 것 같은 '우상의 영화, 우상이 된 영화'는 반진담 반농담으로 쓰여진 것 같다.(진정으로 사랑하는 19283편의 영화 중에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순서대로 썼다고 하는 능청이란.) 박찬욱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다면 그 언젠가 키노에 실렸던 10대 외국영화/아시아계 영화 를 고려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