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Calvin(1509.7.10-15

깔뱅의 깔뱅신학 - 신학자 깔뱅-  

*2009년은 종교 개혁가이자 신학자인 장 깔뱅(영문명은 존 칼빈)이 태어난지 500주년이 된 해이다.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이를 기념해 깔뱅에 관한 다양한 연구서와 번역서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러한 책들을 읽기 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월간 <기독교 사상>(5월호는 깔뱅 탄생 500주년이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에 실린 글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출간된 <기독교 강요>의 번역자인 문병호 박사가 깔뱅의 신학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글인데, 그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한 그의 저작들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지침 정도로 읽으면 좋을듯 하다.

 

신학자로서의 삶 
 

 

 

 



 

 

저명한 깔뱅 신학자 스타우퍼는 『인간 존 깔뱅』이라는 책에서 깔뱅의 삶을 남편과 아버지, 친구, 목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 책이 깔뱅의 “인간성”에 중점을 둔 탓은 있겠지만 “신학자” 깔뱅에 관해서는 아무 장(章)도 할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아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깔뱅을 목회자 혹은 당대 새롭게 전개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 개화된 교사 정도로 여기는 듯한데, 과연 신학자로서의 깔뱅의 삶은 주목 받지 못하는가? 깔뱅의 삶은 그와 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가톨릭신학자들, 재세례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 이성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자연주의나 실존주의에 빠져 있었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론과 성찬론을 비롯한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비성경적 입장을 견지했던 루터란 신학자들에 의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루어져 왔음이 사실이다. 이들은 역사상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깔뱅의 신학에 의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던 만큼 비신학적인 깔뱅 혹은 탈신학적인 깔뱅을 그려내기에 몰두했다. 과연 깔뱅은 신학적 주견 없이 그저 논쟁만을 일삼던 어느 한 종교주의자였는가? 

깔뱅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났던 첨예한 신학적 논쟁들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러한 논쟁들을 통하여서 생애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더하였다. 그는 1509년 7월 10일에 났으며 1535년 8월 23일, 불과 스물여섯 살을 막 넘겼을 즈음,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책을 써서 당시 철권(鐵拳)을 휘둘렀던 불란서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 강요』라는 이름으로 헌정했다. 그것은 당대 교황주의 신학자들을 겨냥한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서책이었다. 가톨릭주의자들에게 깔뱅이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처음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을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콥 총장의 연설문을 쓴 신학자로서였다. 재세례주의자들 역시 깔뱅을 자신들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며 영혼창조설을 주장한 신학자로서 인식했다. 이신칭의의 교리로 새로운 시대의 기치를 내건 루터를 추종한 루터란들은 오직 성경적 진리에 기초하여 성찬론을 전개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구원론의 핵심으로 여기는 신학자 깔뱅으로서 그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깔뱅의 전기학자 가녹지가 언급했듯이 깔뱅의 생애(주관)는 그의 작품들(객관)을 통하여서 읽혀져야 한다. 깔뱅은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아꼈다. “나는 나에 대한 말을 맘 놓고 하지는 않는다.(De me non libenter loquor)” 제네바에서의 깔뱅의 직무는 정치적이거나 사법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이며 교리적이었다. 깔뱅은 한 번도 정치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단지 성경의 교사요 해석자요 수호자로서 제네바를 영적으로 지도했을 뿐이다. 세르베투스(Servetus) 공판은 목회자 혹은 정치가 깔뱅이 아니라 신학자 깔뱅의 모습을 조명한 사건이었다. 세르베투스가 처형된 1553년은 깔뱅 자신조차도 권징 시행권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네바 의회로부터 극도의 고난을 치르던 때였다. 당시 깔뱅은 세르베투스의 반삼위일체적 단일신론과 율법 폐지론과 유아세례 반대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개진했을 뿐이었다. 깔뱅은 15세기 말부터 유럽을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말했다. 그의 삶을 통하여서 계속된 신학적 긴장은 정립된 교리로서, 문건으로서, 책으로서 해소되었다. 신학자로서의 깔뱅의 삶은 오히려 아버지, 친구, 목회자로서의 삶을 압도한다. 따라서 깔뱅의 삶의 가치는 신학적 전승이라는 측면에서 논구되어야 한다.  

 

깔뱅의 신학은 그 자체 개혁주의의 기초, 본질, 정수로서 작용했다. 깔뱅의 신학은 깔뱅신학자들 혹은 깔뱅주의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신학화” 된 것이 아니었다. 깔뱅은 성경의 진리로써 자신의 신학을 수립한 신학자였다. 역사적 깔뱅주의는 깔뱅신학의 역사적 적용이었다. 깔뱅의 작품들은 깔뱅의 신학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지 단지 그것의 자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깔뱅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초기 ‘신학적’ 작품들과 기독교 강요 

깔뱅의 초기 작품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구속사적 의의를 논술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1533년 11월 1일에 있었던 콥(Nicholas Cop)의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에서 깔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유일하신 진실한 중보자,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감화하시는 가장 위대하신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세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독교 철학”을 “그리스도의 철학”이라고 명명한다. 1535년에 출판된 올리베땅의 불란서 성경 번역에 붙인 서문에서 깔뱅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며 완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간략하게 설명한다. 율법은 어떤 사람도 완전함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제시했다. 율법은 마치 선생과 같아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했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깔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한 다음해에 기독교 신앙의 조목으로서의 전체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신앙교육서를 제네바 교회에 제출한다. 이 작품은 가히 “깔뱅의 가르침의 문을 여는 열쇠”요 기독교 강요의 정수(精髓)를 모은 책이라고 할만하였다. 이 작품의 서문에서 깔뱅은 신앙교육의 목적은 “날카롭고 고상한 지식보다 경건에 유익한 것으로” 행하여서 “교리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가르쳐서 “복음의 순수함”을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  

  

 

 

  

 

 

 

1536년 깔뱅의 대작(opus magnum)『기독교 강요』 초판은 신약 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가 되는 작은 분량이었다. 이는 절의 구분없이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율법 교리에 기본적으로 할애 되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이신칭의 교리 등 주요한 신학적 논제들이 망라되었다. 제2장은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루는데 집중되었다. 제3장은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제4장은 성례를 개론, 세례, 유아 세례, 성찬의 순으로 다루었다. 제5장은 잘못된 가톨릭의 성례를 비판하는데 할애되었다. 마지막 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 돌려졌다. 여기에서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입법권, 사법권, 재판권이라는 측면에서 비교적 정치(精緻)하게 전개되었다. 
『기독교 강요』는 그 초판에서부터 이미 교훈적이며, 고백적이며, 변증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다. 순수한 근본 교리를 전하는 서책으로써 그것은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신학적 교본으로써 작성되었다. 중세 성도들은 단지 예배를 보기만 하였을 뿐 듣지는 못했는데, 이제 만인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서서 배우게끔 추구되었다. 또한 본서는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受納) 감동 받은 성도들의 고백의 서책이었다. 그곳에서는 공허한 사색이 배제되고 참다운 경건의 경험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책의 말미에서 말하였듯이 본서는 이미 충분히 변증적이었다. 그것은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를 비판하였으며 당시 재세례파주의자들의 신비주의도 배격하였다.  『기독교 강요』는 깔뱅의 생애를 통하여서 라틴어와 불어로 계속 증보 편집되었던 바, 라틴어로만 5판이 나왔다. 특히 1539년 제 2판에서는 후에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렸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을 신설하여 “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서 성도의 삶의 요체를 제시하였다. 1543년에 출판된 제 3판과 1550년에 출판된 제 4판에서는 교회론과 시민정부론에 관한 교리들이 교부들의 작품들로부터의 인용을 통하여 획기적으로 추가되었다. 1559년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는 무려 80장에 달하는 큰 책이 되었다. 장을 묶는 “권”을 넷으로 했다. 그리하여서 권-장-절의 구조를 취하게 했다. 이제 책은 성경 전체와 맞먹는 분량이 되었다. 여기에서 깔뱅은 전체 교리체계를 사도신경에 따라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제 1권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한 후 일반계시(자연법)와 특별계시(성경)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삼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논구한다. 제2권에서는 먼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다루고 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논한다. 여기에서 깔뱅은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지 않고 먼저 율법과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해서 몇몇 장들을 할애한다. 이로써 깔뱅은 전체 성경의 실체가 그리스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3권에서 깔뱅은 먼저 성령에 관한 논의에 한 장을 할애하고 이어서 믿음-회개-기독교인의 삶-이신칭의의 원리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깔뱅은 따로 장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교리를 전체 구원론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위에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장을 바로 이어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다룬 장을 두고 이를 “칭의의 부록”이라고 불렀다. 제 3권의 나머지 부분은 예정론과 기도론 그리고 최후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종말론에 할애된다. 예정론이 은혜의 한 방편인 기도와 함께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깔뱅이 이를 단지 선택자와 유기자를 나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교리로서만 경직되게 이해하지 않고 구원 받은 백성의 삶 가운데서의 확신이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종말론적 언급이 구원론의 마지막에, 교회론 이전에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깔뱅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의미 있는 교리로서 이해된다. 이렇듯 제 3권은 구원론과 종말론에 할애되었다. 제 4권은 교회론과 시민국가론을 다루었다. 교회와 국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관점에서 논구되었다. 특히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함께 논의하면서 참교회는 양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통하여서 그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전체 문맥 가운데서 도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수직적인 진리와 수평적인 사랑이 모이는 바로 그 점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서 성례의 언약성과 공동체성이 함께 강조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시민국가에 대한 교리도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수직성과 수평성이 함께 깔려서 전개되었다.

깔뱅신학의 중심 교리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작품에 나타난 깔뱅의 신학과 『기독교 강요』의 판별 특징을 일별했다. 그렇다면 깔뱅의 신학은 어느 특정한 교리에 터 잡아서 발전한 것인가? 과연 그 동안 등식화되던 깔뱅=예정론은 합당한가? 깔뱅신학의 중심 교리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깔뱅의 신학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 전제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계시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깔뱅신학의 중심 주제로 “깔뱅의 깔뱅주의”라고 명명된 예정론과 섭리론이 주로 논해졌다. 깔뱅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루터란들과 가톨릭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일부 언약신학자들이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으로 주장하듯이 그가 엄격한 하나님의 의지만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서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 깔뱅신학의 중심으로 전체 축자 영감 성경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론, 교회론 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나, 필자는 깔뱅신학의 요체를 다음과 같이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1.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며(존재), 스스로 진리시며(지식), 스스로 의로우심(도덕)
2.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일하심, 즉 살아계심
3. 일반계시와 일반은총 강조
4.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자로 삼으셔서 육신 가운데 구원을 계시하시고 이루심
5.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 받은 심령이 믿음으로 수납(受納)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부요한 지식에 이름
6.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함께 강조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다 전가하셔서 성도의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의롭다고 받으심
8.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영으로 중생한 성도가 그 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자라감-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전체 율법의 과정을 은혜로써 주장하심
9.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 분과 함께 후사된 성도의 삶-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10.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그리스도인의 자유
11. 거저 택함 받았음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감사와 기도의 삶
12.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된 백성들의 연합체로서의 교회
13.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 참 성례신학-영적이나 실제적인 임재
14. 공평을 강조하는 시민 국가의 삶

깔뱅신학의 중심 주제를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듯이 깔뱅신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획일화할 수 없다. 필자는 깔뱅신학의 부요함, 역동성, 보편성, 그리고 윤리성을 그가 제 신학적 견해들을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전개하였음에 기인한다고 여긴다. 깔뱅의 신학에는 삼위내적 진리와 삼위와 우리간의 외적 진리가 함께 논구된다. 삼위내적 진리는 삼위 하나님의 진리로서 그리스도시며, 삼위와 우리간의 외적 진리는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진리로서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in se)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우리를 위하신(pro nobis)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 분께서 우리 구원의 전체 과정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주장하심이 곧 하나님의 주권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말함으로써 전체를 말할 수도 있으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 그리스도를 함께 말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심을 동시에 파악한다. 즉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동시에 구원 받는다.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서 우리는 단지 관념적인 신관이나 인식론에 편향된 실존주의적 기독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관점하에 계시론,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론, 성령론, 교회론의 순으로 깔뱅신학을 간략하게 고찰한다.

깔뱅신학의 정수

 

 

 

 

 

계시와 성경,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 사역

깔뱅은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천명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기 때문에(행 17:28) 이 두 지식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부터 주어진다. 깔뱅은 성경의 권위(autoritas)를 논하면서 그것이 저자(autor)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계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며,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구원의 길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함이 참 신지식의 길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참 지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주이시며 내적 교사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제외하고는, 성경 계시의 은총을 논할 수 없다. “우리 밖에(extra nos)”계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in nobis)” 중보하신다는 사실이 성경 가운데서 자신의 거룩한 입술로 친히 말씀하시는 성령의 은밀하고 내적인 증거와 함께 확증된다.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친히 말씀하심은 그의 말씀이 믿음 가운데서 우리 속에 인쳐짐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학교에서 겸손하고 가르칠만한 독자가 된다.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경은 “신성한 어떤 것을 숨쉰다.” 말씀의 확실성과 믿음의 확신이 아버지께 받은 것을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고리 가운데 하나로 묶여져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역사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이해 가운데 깔뱅이 전개한 “오직 믿음으로(sola Scriptura)”라는 원리의 신학적 지평이 획득된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   

깔뱅에게 있어서 내재적 삼위일체적 이해와 경륜적 삼위일체적 이해는 상호 지향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고 실체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아들의 중보가 없으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세상의 빛”(요 8:12)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원천”(시 36:9)이신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눅 10:22)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끌림을 받은 자(요 6:44; 12:32; 17:6)만이 아버지를 알게 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깔뱅은 중보자의 필연성을 구속사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계속적인 중보의 의의와 관련해서 설명함으로써 개인 구원 과정에 전체적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없이는(absque mediatore)”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며, 구원이 없고, 하나님께 이를 길이 없다. 깔뱅은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지금도 중보하시는 역사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서의 은혜를 논하며 특히 강조한다. 깔뱅은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장만이 진정 자신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다스리심을 부각시킨다. 그리스도의 무름의 범위는 복음의 범위와 일치한다. “완전한 구원의 전체”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포괄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무름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의의 전가를 받는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서 생명에 이르는 언약에 기초한다.(롬 5:19)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므로(히 9:15), 언약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의 보호자 되심에 이른다.

성령의 일반은총적, 특별은총적 사역
깔뱅은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필리오께(Filioque) 교리에 기초하여 성령의 신위격을 다룬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영으로 계심으로 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한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역은 다음 두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로 창조주 성령(Spiritus Creator)으로서 성령의 영원성이 창조 전과 후를 통한 그의 사역을 통해서 적시된다. 성령께서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존하실 뿐 아니라, 창조 전의 혼돈의 덩어리도 돌보셨다. 둘째로 중생주 성령(Spiritus Regenerator)으로서 성령은 고유한 생명력으로 새 생명을 지으시는 분으로서 제시된다. 성령의 위격적 특성이 여기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으로서 부각된다.
성령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그들의 영혼에 인친다. 대체로 깔뱅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중보로 전가하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적시하기 위하여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특정해서 말한다. 살리는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의 작용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죄와 의와 심판에 미친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로 임마누엘의 약속이 성취된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 행하는 능력을 전가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전체 과정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칭의와 함께 성화가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을 부어주심으로써 그가 우리 속에 우리가 그의 속에 거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며 자신의 의와 은혜를 충만히 베풀어 주신다. 이것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거룩하고 신비한 연합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칭의에 관해서는 단회적이며 성화에 관해서는 계속적이다.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받으신다. 그리하여서 성도는 불완전한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큰일의 도구로서 헌신하며 또한 그만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그것의 한 점(點)이라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라감  

 

 

 

 

 

 

 

깔뱅은 교회의 신학자였다. 교회의 기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 교회 공동체가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일치되어서 한 머리에 의지함으로써 한 몸으로 자라가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섭리의 극장이라고 불리는 바, 이는 선택된 사람들의 총수가 오직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의 손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곳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영으로 연합하여 함께 자라감이 곧 교회의 보편성과 거룩성의 표이다. 교회는 어린 아이에게는 어머니와 같고 좀 더 자란 사람들에게는 학교와 같다. 
깔뱅은 교회의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을 교회의 표지로 삼고 권징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참 교회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음, 그리고 기타 합당한 경건의 원리들”에 대한 선포와 들음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권징은 이러한 말씀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 그리스도의 구원 교리가 교회의 영혼과 같다면 권징은 교회의 힘줄들과 같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표지는 머리이신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의 하나임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감(aedificatio, 건덕)”이며 이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써 성도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로 날마다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복음의 사역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성령의 은사는 직분에 앞서며 성령의 은사로서 직분이 표현된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직분을 합당하게 감당해서 지체들을 서로 세워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영은 하나인 것과 같이, 직분들은 다양하지만 몸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사역의 신비이다.

결론: 깔뱅의 깔뱅신학
지금까지 우리는 깔뱅의 신학은 단지 신학적 자료를 제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성경 진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후 개혁신학의 토대가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깔뱅신학의 심오함과 역동성은 그것이 sola Scriptura의 원리에 확고하게 서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되었다. 보수 장로교단의 신학으로 대표되는 한국 개혁주의는 깔뱅의 교리들을 신앙의 조항들로 여긴다. 오늘날 많은 경우 깔뱅은 단지 이용될 뿐 신앙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이 시대의 요청이 다시금 말씀을 들음으로써(ex auditu) 성도와 교회가 마땅해지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깔뱅신학에 대한 시대적 요청은 더욱 더하다고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분량의 한계상 깔뱅의 주요 교리들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았다. 예정론, 섭리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 성찬론 등이 상론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 교리들이 터 잡고 있는 깔뱅 신학의 기초를 이 글은 분명히 제시했다.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내재적-경륜적 이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나아가는 교리로서 파악되었다. 깔뱅은 성도와 교회의 본질, 의의, 삶을 이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합당하게 파악함으로써 이후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책임, 복음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은혜 언약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개혁주의의 길을 열었다.
깔뱅은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데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신학이 어떠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신학은 참되고 확실해야 하며 성도를 세우는데 유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악으로부터 선을 분별하고 그 선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성도의 양심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신학자로서 깔뱅은 말씀 가운데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서 오직 들은 것만을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기록하기에 힘쓴 주님의 일꾼이었다. 신학자는 주님의 일꾼으로 주의 남은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일은 모든 것을 다 이루신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전가해 주신다는 오직 은혜, 절대 은혜의 선포이며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의 공로만을 찬미함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전체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서 그것이 “그의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전 1:30) 만약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의 기름부음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순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에;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의 나심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심으로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난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 형벌로부터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의 징계에;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갈 3:13);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 제물에;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 화목을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 삶의 새로움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 영생을 구한다면, 역시 그곳에; 하늘 왕국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의 하늘로 들어가심에; 만약 보호, 안전, 모든 축복의 부요함을 구한다면, 그의 왕국에; 떨림 없는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능력에 있다. 요약하면, 모든 종류의 선함으로 부요한 곳간이 그에게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자.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히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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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corn 2022-11-0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한 댓글을 쓰시지 소논문을 쓰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