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가 이전에 다 못 읽은 에드워드 호퍼 평전과 얼마전에 신청한 가브리엘 마르셀의 <존재와 신비 I>(누멘,2010), 미진사에서 나온 가우디 책을 빌렸다. <어머니의 품을 설계한 건축가 가우디>(현암사, 2002)를 갖고 있고 꽤 많은 정보량을 담고있는 책이지만 도판이 충분치 않아 조금은 불만족스러웠는데 미진사에서 나온 책은 내용은 논외로 치더라도 도판이 많고 도판의 색감이 선명하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잘 지었다(<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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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신곡 연옥편 12곡을 소리내어 읽은 뒤 발터 니그의 <렘브란트>를 드문드문 읽었다. 니그에 의하면 (미켈란젤로와 고흐 사이에 위치해있는) 렘브란트는 "그리스도교 단일 문화가 서서히 무너지고, 삶이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던 시대"(14)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와해되는 곳에서는 삶이 중심을 잃고 세상은 본질 없는 껍데기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17세기의 탁월한 종교적 인물"이다. 렘브란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니그는 "모든 작품을 전문가로서 감정"하고자 했으며 "지난 시대를 훌륭하게 대변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경외심"을 갖지 않았던 (야콥 부르크하르트로 대변되는)"19세기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한다. "19세기는 렘브란트가 예술로 말하려 했던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11). 렘브란트의 가치가 살아난 것은 "충격적인 방식으로" 부르주아 문화가 완전히 무너진, 그리하여 "삶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새롭게"(10) 열린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이다.

 

무수한 시들과 편지들을 남긴 미켈란젤로나 고흐와는 다르게 렘브란트는 "그레 대해 문서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17)는데 덕분에 니그의 신학적 해석(과 그 해석이 지향하는 바가)이 앞선 두 책들보다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렘브란트는 "상류 사회에서 추방"되어 생의 후반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외적으로 몰락" 했을 뿐 "영혼의 단련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39) "늙은 렘브란트는 영혼의 성숙과 정신의 완전한 정화 상태에 도달했고, 이는 그가 견뎌 내야 했던 모든 어려움을 상쇄해 주었다" (40) 이러한 렘브란트의 삶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과정으로 볼 수 있다(43).

 

"하느님이 이 예술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신 것은 그로 항금 영원하신 분과의 관계에서 더 높이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화가는 그 깊은 구덩이에서 겪은 경험으로 새로이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43)

"만년에 그는 불행을 겪으며 정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가장 낮은 곳에 가 닿은 사람만이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영원한 표징이다. 낮아짐과 높아짐, 이 둘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44)

 

감동스러운 해석이지만 동시에, 주어진 자료를 압도하는 해석이다. 이쯤되면 렘브란트의 삶이나 작품보다 이를 해석하는 니그의 시선이 렘브란트의 삶과 작품을 향하는 내 시선을 가로막는다. 저 해석의 밑바탕에는 목적론과 인과율이 섞여 있는데 니그는 저런 식의 해석이 무수한 가능성 중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경우에 대한 해석일 뿐임을 간과한다. 렘브란트가 사회적으로 불행진 이후 작품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면 어떻겠는가? 그 삶은 유치한 삶, 혹은 타락한 삶인가? 그 삶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았나? 그것이 실제로는 보다 뼈저린 종교적 각성을 통한 '침묵'의 실천이었다면? 니그가 저런 식으로 찬미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렘브란트가 그가 불행한 삶을 살기 이전의 작품들보다 종교적으로 고양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니그가 주창한 "내적 인간"(인간은 그의 현실적인 모습이나 행동으로 평가받을 일이 아니라 그 영혼의 핵을 봐야한다는)의 말을 스스로 배반하는 해석이기도 하다(혹은, 그 사이에 몇가지 제한 조항을 숨겨두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셈이다). 저런 해석을 따른다면 결국 한 영혼의 핵심은 그의 행위가 아니더라도 작품(음악이든, 텍스트든, 미술작품이든)을 통해서 '드러나야'하고, 그 작품의 탁월성을 통해 그 영혼의 핵심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니그는 침묵해야할 부분에 대해 침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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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긴장도 풀리고 긴장으로 눌러져있던 여독이 그 기세를 떨쳐 이후 내내 골골댔다. <에드워드 호퍼>1'갈등의 근원, 1882~1899'부터 5'스타일을 찾아서'까지를 읽었다. "머리말"만 보자면 지은이 게일 레빈은 호퍼의 부인인 조세핀 호퍼를 비중있게 다룸으로써 기존의 호퍼 연구서들과 차별화하려 한 듯 한데 ("이제는 조 호퍼의 역할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 남자의 배우자와 모델로서만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난 동료를 자극하고 그에게 도전했던 지적 동료로서의 역할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총체적인 스토리'를 만들려면 두 사람 모두가 필요하다." 적어도 이 말대로라면 둘은 피카소와 그의 뮤즈들,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 조지아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만큼이나 미술사에 기록될만한 관계다. 하지만 저런 관계들을 집요하게 파고든 책들은 (적어도 번역본은) 많지 않았다. 예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했던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를 읽으며 그런 기대를 했는데 제목만큼 스티글리츠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그런 부분은 나오지 않고 있다. 꼭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는 화가의 생을 엿본다는 건 꽤나 즐겁다. 처음 알게된 그의 생을 가늠할 수 있는 문장들을 모아보자면,

 

"엄격한 침례교도인 호퍼 가족은 어린아이의 훈육을 위한 체벌을 허용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보여 준 우울 증세는 어린 시절의 지나친 체벌인 경우가 많은 증세였다."(36)

 

"에드워드가 사춘기였던 1890년대는 미국 역사의 분수령을 이룬 시기엿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즐거운 90년대'는 시골이나 소도시의 엄격한 도덕적 원칙과 전통적 생활 방식이 서서히 파괴되고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도시화, 산업화가 시작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미국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믿음이 도전받고 있었다."(37)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지적 관심을 예로 들면서 랠프 우럳 에머슨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세계를 떠올렸다. 에머슨은 <대표적 위인론>에 수록된 여섯 편의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몽테뉴를 '회의론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회의론자'라는 개념은 호퍼가 종교적 성장 배경을 뛰어넘어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철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39)

 

"열 살에는 그림에 사인을 하고 날짜를 기입했다."(44)

 

"호퍼는 1899년 가을에 뉴욕 일러스트레이팅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오래된 잡지의 낡은 페이지 몇 장에 남아 있는 광고를 빼곤 미국의 미술 연대기에 자취를 남긴 게 별로 없다."(59)

 

"1900년 가을에 그는 부모에게 상업 미술이 아닌 순수 예술에 이르는 폭넓은 교육을 하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설득했다. ...뉴욕 미술학교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가 '체이스 스쿨'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이 학교는 체이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 더글러스 존 코나가 운영하고 있었다. ...초보 학생들은 회반죽을 하는 전통 공부 방식 대신 곧바로 실기 작업을 했다. 드로잉과 채색을 같이 배웠다. 전과정이 비학구적이었다."(69)

 

"체이스는 호퍼의 첫 번째 미술 교사였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학교에 너무 오래 머무는 학생이 많다. ...학업의 평균 기간은 3년이다. ...학생의 10퍼센트 미만이 예술을 평생 직업으로 삼는데 이는 적절하다" ...호퍼는 상과 장학금에 고무되어 ...기간의 두 배인 6년을 학교에 머물렀다."(72)

 

"체이스의 가르침에 따라 호퍼는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많이 스케치...작품 전체보다는 세부적인 것을 더 자주 스케치하면서 무엇이든 자기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할스,루벤스,벨라스케스와 같은 오래된 대가들이었지만 19세기 작가들 ...에드윈 랜시어,알렉산드르 앙리 조르주 르뇨,마리아노 포르투니 이 카르보,프레데릭 레이턴 같은 학구적인 작가들과 함께 마네 같은 전위적인 화가들에게도 쏠렸다."(74)

 

"1902년 가을에 호퍼는 3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미술에 대한 호퍼의 생각에 새로운 정의를 내려 주었고, 이에 따라 호퍼는 학교에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체이스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가르쳤으나 헨리는 생활을 위한 예술을 가르쳤다. 그 차이는 뚜렷했다"(78)

 

"...혁신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체이스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마네를 존경했다. ...그는 또 마네가 벨라스케스,고야,할스를 존경했음을 강조했다." (79)

 

"호퍼는 스타일에서는 헨리로부터 자기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의 영향으로 그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헨리의 핵심 원칙을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은 인행이다. 삶의 표현이며, 예술가, 나아가 예술가의 인생에 대한 해석의 표현이다""(82)

 

"부모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호퍼는 1906년 파리로 향했다"(91)

 

"미국과 영국 화가들은 몽파르나스에 있던 카페 뒤 돔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호퍼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카페 인생은 보헤미안 인생이었고 섹스 드라마는 단골 메뉴였다. 호퍼가 보헤미안 여인을 자기 작품의 주제로 자주 삼으면서도 글로 쓸 때는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111)

 

"그의 몸속에 있는 ...청교도 정신은, 1906년에 매춘에 대해 눈에 띄게 관대한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창녀들의 행동 역시 그에겐 인상적이었다. 호퍼는 서너 군데 카페에서 요염한 표정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창녀를 그렸다"(112)

 

"호퍼는 네덜란드에 4~5일 정도 있었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국립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야경>이었다."(126)

 

"에드워드 호퍼의 재능은 새로 발견한 파리의 유혹적 매력과 뉴욕에서의 미국 예술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반된 두 주장의 희생물이 되었다. ...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1907년 가을의 미국 경제 전망...그해 봄에 주가가 폭락했다...그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이상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인 상업 미술의 길을 찾아 뉴욕으로 왔다" (131)

 

"블랙웰 섬을 자기 식으로 그리면서 호퍼는 부드러운 회청색 물감을 사용해 자신이 휘슬러에게 관심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155)

 

"191312, 호퍼는 59번가를 떠나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작업함 살게 된다. ...상당히 노후했지만 공원 옆에 있는 데다, 지붕이 높고 임대료가 적당해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165)

 

이와 조금 다른 차원에서 그가 1913년부터 1967323일까지 (금전관계를 위주로)자신의 일상을 꼼꼼히 장부에 기입해놓았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만하다. 지은이 말을 빌면 그는 이런 방식으로 "중요한 것이나 사소한 것들에 관계없이 ...자신의 운명을 기록해 나갔다"(164) 훗날 자신의 아내가 일기를 적어나가는 것에 대하여 그는 적잖이 냉소했는데 그것은 일기라는 글에서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감상적인 태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자기연민이든, 자기혐오든간에)부각시키게 되는 왜곡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지은이의 문장을 고쳐 쓰자면, "그는 일기장 대신 장부에 최소한의 단어들로 채워진 문장들로 하루를 담아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기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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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오리의 <기독교 조직신학개론>을 훑었다. 이전에는 나단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을 읽었는데(검색해보니 그 사이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도 출간한 적이 있었다) 서문에 의하면 "모든 장들을 다시 쓰고 확대하고 갱신했으며", 9'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고백하기', 13'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과 종교다원주의'가 추가되었지만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고전적 신학 전통을 비판적으로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신학의 새로운 목소리와 강조점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기본틀-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고전적인 교의학의 순서를 따르면서 '삼위일체'에 강조점을 두며 현대적인 논의들을 소개하는 방식-은 새판에서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입문서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읽기나, 깊이 있는 읽이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통찰은 엿보이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하다(때문에 부록 I에서 III까지 이어지는 대화형식의 글은 맛보기로만 봐야한다. 멋모르고 읽던 학부시절 저 부록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다시 훑어보니 사족이다.). 꼼꼼한 편집 덕분에 제대로 된 입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예전 국내 출간본들과는 달리 주제색인, 인명 색인, 성경 색인을 모두 달아놓았음은 물론 각주에 달아놓은 참고문헌이 국내에 출간되었을 경우 모두 명시해놓아 책을 읽은 뒤 연장선에서 다른 책을 읽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부록 IV.신학 용어 해설도 내용이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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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피트 몬드리안의 <모든리안의 방-신조형주의, 새로운 삶을 위한 예술>(+) '자연의 리얼리티와 추상적 리얼리티: 세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진 에세이'(이 책에는 모두 세 편의 글이 실려있는데 '일러두기'에 따르면 "몬드리안의 저작 중 그의 신조형주의 이론에 관한,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난해함이 보완된 글"들이다)를 읽었다


'자연의 리얼리티...'X,Y,Z 세 사람이 대화하는 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대화편인데 X는 자연주의 화가, Y는 문외한, Z는 추상-실제 화가이다. 물론 몬드리안의 입장은 Z에 해당하며 중요한 코멘트는 모두 Z의 입을 통해 나오며, 특히나 자연주의 화가인 Y의 의견에 반박할 때 두드러지게 나온다.

"당신(Y)은 색조와 색채를 강조하고, 나는 거기에서 나온 것 즉 평온함을 강조했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 똑같은 대상을 관찰한 겁니다. 그러한 평온함은 관계들의 조화를 통해 조형적으로 나타납니다. ...조형적 표현은 색채와 선의 대립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대립이 바로 관계들입니다." (10)

"우리가 색채 그 자체보다 색채의 관계들을 더 많이 볼수록, 우리는 ...결국은 비극적으로 되는 표현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17)


"비극적"이라는 뜻은 조금 애매모호하지만 자연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이게 몬드리안이 생각하는 자연주의다)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우리 눈에 담기는 순간 그 눈에 맺혔던 상은 이미 사라지기 때문에 1차적으로 비극이 발생하고, 이 비극을 무마하기 위해 자연주의적 시도가 행해지지만 그 상의 본질을 살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2차적으로 비극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유추 가능하다.


"당신(Y)이 자연을 추구한다면 당신의 예술작품에 있는 비극적인 요소를 극히 일부분만 없앨 수 있어요. 자연주의 회화는 비극을 초월하는 조화로움을 느끼게 해주지만, 조화로움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평형상태에 있는 관계만을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자연의 외양, 자연의 형태, 자연의 색채, 자연의 리듬 등 대부분의 자연적 관계들은 비극적인 것의 조형적 표현입니다"(26)


비극의 순환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자연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는(그리하여 보편적인) "평형상태"를 잡아내야한다.


"...더 깊이 보아야 하고, 추상적으로 그리고 특히 보편적으로 지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순수 관계로서의 자연적인 것을 지각하게 되고, 외적인 리얼리티는 그것의 실재, 즉 진실을 반영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만 비극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평온함을 의식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변덕스러운 것들 속에서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26)


"자연은 ...우리를 우리 존재의 의식으로 데려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가장 내적인 부분이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은 우리를 관조로 인도하고, 보편적인 것, 즉 어떤 의미에서 더 위대하고도 할 수 있는 객관성과 합병되도록 이끕니다. 개인적인 사고와 감정, 인간의 의지, 특별한 욕구-모든 집착-는 비극적인 조형성으로 귀결되어 평온함에 대한 순수한 조형 표현을 방해합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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