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자 긴장도 풀리고 긴장으로 눌러져있던 여독이 그 기세를 떨쳐 이후 내내 골골댔다. <에드워드 호퍼>1장 '갈등의 근원, 1882~1899년'부터 5장 '스타일을 찾아서'까지를 읽었다. "머리말"만 보자면 지은이 게일 레빈은 호퍼의 부인인 조세핀 호퍼를 비중있게 다룸으로써 기존의 호퍼 연구서들과 차별화하려 한 듯 한데 ("이제는 조 호퍼의 역할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 남자의 배우자와 모델로서만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난 동료를 자극하고 그에게 도전했던 지적 동료로서의 역할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총체적인 스토리'를 만들려면 두 사람 모두가 필요하다." 적어도 이 말대로라면 둘은 피카소와 그의 뮤즈들, 달리와 그의 아내 갈라, 조지아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만큼이나 미술사에 기록될만한 관계다. 하지만 저런 관계들을 집요하게 파고든 책들은 (적어도 번역본은) 많지 않았다. 예전에 민음사에서 출간했던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를 읽으며 그런 기대를 했는데 제목만큼 스티글리츠의 비중이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그런 부분은 나오지 않고 있다. 꼭 그렇지 않아도, 좋아하는 화가의 생을 엿본다는 건 꽤나 즐겁다. 처음 알게된 그의 생을 가늠할 수 있는 문장들을 모아보자면,
"엄격한 침례교도인 호퍼 가족은 어린아이의 훈육을 위한 체벌을 허용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보여 준 우울 증세는 어린 시절의 지나친 체벌인 경우가 많은 증세였다."(36)
"에드워드가 사춘기였던 1890년대는 미국 역사의 분수령을 이룬 시기엿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즐거운 90년대'는 시골이나 소도시의 엄격한 도덕적 원칙과 전통적 생활 방식이 서서히 파괴되고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도시화, 산업화가 시작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미국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믿음이 도전받고 있었다."(37)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지적 관심을 예로 들면서 랠프 우럳 에머슨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세계를 떠올렸다. 에머슨은 <대표적 위인론>에 수록된 여섯 편의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몽테뉴를 '회의론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회의론자'라는 개념은 호퍼가 종교적 성장 배경을 뛰어넘어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철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39)
"열 살에는 그림에 사인을 하고 날짜를 기입했다."(44)
"호퍼는 1899년 가을에 뉴욕 일러스트레이팅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오래된 잡지의 낡은 페이지 몇 장에 남아 있는 광고를 빼곤 미국의 미술 연대기에 자취를 남긴 게 별로 없다."(59)
"1900년 가을에 그는 부모에게 상업 미술이 아닌 순수 예술에 이르는 폭넓은 교육을 하는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설득했다. ...뉴욕 미술학교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가 '체이스 스쿨'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이 학교는 체이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던 화가 더글러스 존 코나가 운영하고 있었다. ...초보 학생들은 회반죽을 하는 전통 공부 방식 대신 곧바로 실기 작업을 했다. 드로잉과 채색을 같이 배웠다. 전과정이 비학구적이었다."(69)
"체이스는 호퍼의 첫 번째 미술 교사였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학교에 너무 오래 머무는 학생이 많다. ...학업의 평균 기간은 3년이다. ...학생의 10퍼센트 미만이 예술을 평생 직업으로 삼는데 이는 적절하다" ...호퍼는 상과 장학금에 고무되어 ...기간의 두 배인 6년을 학교에 머물렀다."(72)
"체이스의 가르침에 따라 호퍼는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많이 스케치...작품 전체보다는 세부적인 것을 더 자주 스케치하면서 무엇이든 자기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할스,루벤스,벨라스케스와 같은 오래된 대가들이었지만 19세기 작가들 ...에드윈 랜시어,알렉산드르 앙리 조르주 르뇨,마리아노 포르투니 이 카르보,프레데릭 레이턴 같은 학구적인 작가들과 함께 마네 같은 전위적인 화가들에게도 쏠렸다."(74)
"1902년 가을에 호퍼는 3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미술에 대한 호퍼의 생각에 새로운 정의를 내려 주었고, 이에 따라 호퍼는 학교에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체이스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가르쳤으나 헨리는 생활을 위한 예술을 가르쳤다. 그 차이는 뚜렷했다"(78)
"...혁신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체이스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마네를 존경했다. ...그는 또 마네가 벨라스케스,고야,할스를 존경했음을 강조했다." (79)
"호퍼는 스타일에서는 헨리로부터 자기 것으로 삼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의 영향으로 그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헨리의 핵심 원칙을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은 인행이다. 삶의 표현이며, 예술가, 나아가 예술가의 인생에 대한 해석의 표현이다""(82)
"부모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호퍼는 1906년 파리로 향했다"(91)
"미국과 영국 화가들은 몽파르나스에 있던 카페 뒤 돔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호퍼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카페 인생은 보헤미안 인생이었고 섹스 드라마는 단골 메뉴였다. 호퍼가 보헤미안 여인을 자기 작품의 주제로 자주 삼으면서도 글로 쓸 때는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111)
"그의 몸속에 있는 ...청교도 정신은, 1906년에 매춘에 대해 눈에 띄게 관대한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창녀들의 행동 역시 그에겐 인상적이었다. 호퍼는 서너 군데 카페에서 요염한 표정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창녀를 그렸다"(112)
"호퍼는 네덜란드에 4~5일 정도 있었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국립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야경>이었다."(126)
"에드워드 호퍼의 재능은 새로 발견한 파리의 유혹적 매력과 뉴욕에서의 미국 예술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반된 두 주장의 희생물이 되었다. ...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1907년 가을의 미국 경제 전망...그해 봄에 주가가 폭락했다...그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이상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인 상업 미술의 길을 찾아 뉴욕으로 왔다" (131)
"블랙웰 섬을 자기 식으로 그리면서 호퍼는 부드러운 회청색 물감을 사용해 자신이 휘슬러에게 관심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155)
"1913년 12월, 호퍼는 59번가를 떠나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작업함 살게 된다. ...상당히 노후했지만 공원 옆에 있는 데다, 지붕이 높고 임대료가 적당해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165)
이와 조금 다른 차원에서 그가 1913년부터 1967년 3월 23일까지 (금전관계를 위주로)자신의 일상을 꼼꼼히 장부에 기입해놓았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만하다. 지은이 말을 빌면 그는 이런 방식으로 "중요한 것이나 사소한 것들에 관계없이 ...자신의 운명을 기록해 나갔다"(164) 훗날 자신의 아내가 일기를 적어나가는 것에 대하여 그는 적잖이 냉소했는데 그것은 일기라는 글에서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감상적인 태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자기연민이든, 자기혐오든간에)부각시키게 되는 왜곡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지은이의 문장을 고쳐 쓰자면, "그는 일기장 대신 장부에 최소한의 단어들로 채워진 문장들로 하루를 담아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기록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