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피트 몬드리안의 <모든리안의 방-신조형주의, 새로운 삶을 위한 예술>(+) 중 '자연의 리얼리티와 추상적 리얼리티: 세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진 에세이'(이 책에는 모두 세 편의 글이 실려있는데 '일러두기'에 따르면 "몬드리안의 저작 중 그의 신조형주의 이론에 관한,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난해함이 보완된 글"들이다)를 읽었다.
'자연의 리얼리티...'는 X,Y,Z 세 사람이 대화하는 식으로 꾸며진, 일종의 대화편인데 X는 자연주의 화가, Y는 문외한, Z는 추상-실제 화가이다. 물론 몬드리안의 입장은 Z에 해당하며 중요한 코멘트는 모두 Z의 입을 통해 나오며, 특히나 자연주의 화가인 Y의 의견에 반박할 때 두드러지게 나온다.
"당신(Y)은 색조와 색채를 강조하고, 나는 거기에서 나온 것 즉 평온함을 강조했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 똑같은 대상을 관찰한 겁니다. 그러한 평온함은 관계들의 조화를 통해 조형적으로 나타납니다. ...조형적 표현은 색채와 선의 대립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대립이 바로 관계들입니다." (10)
"우리가 색채 그 자체보다 색채의 관계들을 더 많이 볼수록, 우리는 ...결국은 비극적으로 되는 표현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17)
"비극적"이라는 뜻은 조금 애매모호하지만 자연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이게 몬드리안이 생각하는 자연주의다)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우리 눈에 담기는 순간 그 눈에 맺혔던 상은 이미 사라지기 때문에 1차적으로 비극이 발생하고, 이 비극을 무마하기 위해 자연주의적 시도가 행해지지만 그 상의 본질을 살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2차적으로 비극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유추 가능하다.
"당신(Y)이 자연을 추구한다면 당신의 예술작품에 있는 비극적인 요소를 극히 일부분만 없앨 수 있어요. 자연주의 회화는 비극을 초월하는 조화로움을 느끼게 해주지만, 조화로움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평형상태에 있는 관계만을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자연의 외양, 자연의 형태, 자연의 색채, 자연의 리듬 등 대부분의 자연적 관계들은 비극적인 것의 조형적 표현입니다"(26)
비극의 순환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자연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는(그리하여 보편적인) "평형상태"를 잡아내야한다.
"...더 깊이 보아야 하고, 추상적으로 그리고 특히 보편적으로 지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순수 관계로서의 자연적인 것을 지각하게 되고, 외적인 리얼리티는 그것의 실재, 즉 진실을 반영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만 비극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평온함을 의식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변덕스러운 것들 속에서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26)
"자연은 ...우리를 우리 존재의 의식으로 데려갑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가장 내적인 부분이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은 우리를 관조로 인도하고, 보편적인 것, 즉 어떤 의미에서 더 위대하고도 할 수 있는 객관성과 합병되도록 이끕니다. 개인적인 사고와 감정, 인간의 의지, 특별한 욕구-모든 집착-는 비극적인 조형성으로 귀결되어 평온함에 대한 순수한 조형 표현을 방해합니다."(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