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귀환
김정란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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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즘.

-김정란의 글속에 가장 강고하게 박혀있는 세계관이라면 엄결한 개인주의다. 그녀는 이념에 대해 그다지 매혹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 세계와 맞서 싸우기를 다짐한다. 고종석과 마찬가지로 김정란은 우리나라에 만연되어 있는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개인주의자라는 측면에서 김정란은 고종석과 궤를 같이하지만 둘의 뉘앙스는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고종석이 스스로를 '서얼'로 칭할정도로 자신에게 태생적으로 혹은 근원적으로 의식하는 결핍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존재틀을 내세우며 소수자들에게 연대를 표시하는 것과는 달리 김정란은 자신의 충만을 근거로 삼아 소수자들에게 연대를 표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김정란은 자신의 나르시즘적인 성격을 부정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살려낸다. 그녀는 문학에 대한 특별한 애정, 영혼, 존재의 고귀함같은 것에 대한 애정을 감추어내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변을 전개해나가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화사함이 곁들어진 문장으로 만들어짐과 동시에 나같은 속물적인 개인주의자의 미감을 부분적으로 거스른다.(고종석도 그 차이를 김정란의 글에 대한 평에서 언급했고, 그것은 예상외로 꽤나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물론 그 거스름은 그녀가 비판하는 대상에 대한 마찬가지의 역겨움과는 다른 일종의 '차이'라 해도 상관은 없지만.

2.여성

-그녀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말한다는 것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여자로 말한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폭력적인 남성의 말과는 다른 여성의 말을 찾기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남성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으로 볼때 그리 진보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녀의 글들을 보면서 나는 서구에서 100년전쯤에 일어났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대부분은 중산층이상의 여성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상류층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다.(달리말하자면 그들은 하층계급의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았으며, 설령 쏟더라도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된 뒤였다.) 그들이 내세운 주장의 핵심은 정치참여의 동등성과 교육의 평등성이었는데, 김정란의 여성에 관한 글들도 결국은 그 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대에 나타나는 시대에서 그녀의 여성에 관한 글들은 나름대로의 저항성과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그 글들이 '제한된 진보'라는 느낌 또한 가셔지지 않는다. 김정란(을 포함하는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일부 진보논객들에게 혹은 진보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비판,비난,혹은 푸념을 듣는 것은 바로 그 '제한적 진보'의 색채 때문이 아닐까.

 때때로 그녀의 글은 나르시즘이 지나치게 들어나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스스로 지나치게 높이평가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1인시위 체험담을 기록한 '벽앞에서의 한시간'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자신의 일기장에 그런 글을 썼다면 아무런 반감이 들지 않겠지만 그것이 공적인 장에 펼쳐진 글이었다는 것에 나는 약간의 곤혹스러움을 느겼다.(시위를 고작 한시간 해놓고서 '내면적인 기쁨'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글쎄...아무래도 좀 그렇다.)

 

3.차이,하지만 여전한 연대감

-하지만 여전히 , 그리고 큰 맥락속에서 나는 김정란에게 연대감을 느낀다. 그녀는 전체주의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소리를 찾는 희귀한 개인주의자이며, 억압당하는 여성의 현실을 느끼고 그것의 타파를 외치는 여성주의자임과 동시에 정치적 공정함(그녀의 정치적 공정함이 언제까지나 공정함으로 비칠지는 미지수지만)과 매력적인 문체를 갖춘 칼럼니스트, 평론가이다. 그녀가 자신의 위치에서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목소리를 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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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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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는 가볍다. 내 김영하의 '포스트 잇'을 읽을때 '이 보다 가벼운 수필을 쓸 수 있을까'라고 내심 궁금했는데 '무라카미 라디오'의 가벼움은 '포스트 잇'을 가뿐히 넘어선다.  물론 '가볍다'는 것이 단순한 '내용의 가벼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글 하나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속도, 그것을 되김질 하는데 필요한 노력의 정도..만으로 이 책의 '가벼움'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애써 비교하긴 했지만 '무라카미 라디오'의 가벼움과 '포스트잇'의 가벼움은 그 뉘상스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김영하의 에세이는 가볍지만 그 가벼움이 나오기 까지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개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마누라도 개띠다.'라 와 같은 문장은 가볍지만 그 문장을 짓기위해, 그리고 애써 '가벼움'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보인다. 이래저래 김영하는 영민한 작가인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의 수필은 그렇지 않다. 그의 문장에는 한 문장문장마다 고민해서 쓴 흔적이 안보인다. 하나하나가 허술하며,심드렁하기 그지 없다. 이를테면 A라는 소재로 시작했다가 B의 내용을 꺼내더니 C로 끝내버리는 식의 글이 이 책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허술함과 심드렁함이야말로 하루키식 수필, 좁혀서 말하자면 '무라카미 라디오'의 매력이다. 할일없이 방에서 이거저거 하다가 심드렁하게 말하는 듯한 그의 글은 보는이에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루키는 정말 경지에 올라있는 '백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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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
이남호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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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시간'의 문체는 담백하다. 고종석씨가 지적한대로 이남호는 '교과서적'이라 불릴 정도로 어떠한 수사적 화려함을 배제시킨채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옮긴다. 그런 문체속에서 내는 울림은 김훈의 화려한 단문과는 또 다른 문체의 미학을 선보이는데 글쓰는 것에 관심이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문장을 배우기 시작할 때 혹은,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 때 능히 하나의 전범으로 삼을만하다.

...하지만 그려한 교과서적인 문체에 담긴 그의 생각은 나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가져다 준다. 글속에서 그는 클래식과 순수문학과 같은 '고상한' 문화를 선호하는듯하며 환경주의적인 면모와 부분적으로(혹은 때때로 노골적으로)보수적인 면모를 내비친다. 클래식과 순수문학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에 나는 전혀 불만을 가지고 있지않다. 하지만 그러한 애정이 대중음악에 대한 폄하로 나타날때 , 이를테면 이런 문장-어떤 오디오, 어떤 날씨, 어떤 마음 상태, 어떤 연주라 하더라도 싸구려 대중음악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줄 수 있는 음악적 감동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때때로 대중음악의 멜랑콜리에 잠시 매혹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매혹은 일시적이다.-을 접할 때 나는 상당히 불편하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지미 헨드릭스의 'voodoo child'나 프린스의 'purple rain'에서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애호하는 클래식 역시 당대에는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에게 사랑받았고, 대중들에 의해서 살아남은 음악 장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악뿐만이 아닌 문학,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생각,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그것도 순결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때때로 매혹적이지만, 그만큼의 욕지기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은 분명한 판단아래 그러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게는 현문화장르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무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복고주의, 순결주의가 얼마만한 정치적 후안무치를 드러내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아마도 모르는 듯하다. 나는 몇년전인가 조선일보에서 벌어졌던 서정주논쟁에서 그가 보여준 철없음을 꽤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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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Oldboy 1
츠치야 가론 외 지음 / 아선미디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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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는 분명 뛰어난 작품이었다. 평론가나 신문에서의 평도 '올드보이'가 가지고 있는 윤리적 문제점을 걸고 넘어진 몇몇 보수신문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고, 그 호의라는 정도는 상당해서 대부분의 평속에서는 '원작을 뛰어넘는다'라는 칭찬이 꽤나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찬욱 감독의 발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영화 '올드보이'가 기본적인 설정을 제외하고는 원작과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영화와 원작의 내용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기본적인 설정이란 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10년간 구금된 남자가 복수에 나선다는 기본줄기 말고도 많은 요소를 영화는 원작의 것을 흡수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는 것, 그리고 만두의 맛을 통해 자신을 가두었던 곳을 찾아내는 것, 후최면, 악인의 최후까지..

 물론 영화 '올드보이'와 만화 '올드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틀리다. 그리고 둘이 기댄 정서도 상당한 차이를 띈다. 영화 '올드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당히 원형적인,그리고 설화적인 비극인 것에 반해, 만화 '올드보이'는 현재 시대의 일본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물론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시대적인 언급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만화 '올드보이'에서는 현재 시대, 그러니까 거품 경제 이후의 일본의 쇠락한 모습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띈다. 박찬욱감독이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을 빼고는 방향을 완전히 달리했다는 발언을 호의적으로 보아준다면, 그 발언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게다.

...영화 '올드보이'는 그러한면에서, 그러니까 비극성에 기반한 인물들 사이의 갈등의 효과 측면에서 만화 '올드보이'를 넘어선다. 후최면이라는 요소를 살려내 몇개의 내용을 더추가한것은 멋진 응용이라고 평가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에 반해 만화 '올드보이'는 영화 '올드보이'가 지니지 못한 스릴러적인, 그리고 다분히 묵시록적인 측면이 잘 살아나 있다. 비교적 복수하는 자와 복수받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고 사용 인물이 제한적인 영화에 비해 만화는 훨씬 다양한 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로 인해 만화 '올드보이'는 영화가 넘어서지 못하는 고유의 영토를 지니게 된다.

...영화 평론가들이 혹은 기자들이 만화의 이런 장점들을, 원작의 힘을 몰라서 일까? 그들은 대체적으로 반전의 효과를 들어서 영화 '올드보이'에 손을 들어주는듯 하다. 하지만 만화 '올드보이'의 마무리 역시 그것이 결코 상투적인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 보여진다. 추측컨데 아마도 그들은 '올드보이' 일본의 작품, 그것도 만화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무시하는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

 음악에서 원곡을 뛰어넘는 리메이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듯이, 영화에서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설령 뛰어넘을지라도 원작속에는 영화가 따라올수 없는 고유의 매력이 담겨있다.) 평론가들이나 기자들이 영화와 원작의 '질'을 따질때 앞으로 좀더 세심한 접근을 해주었으면 한다. 성급한 판단, 혹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일을 낼 수 있는지는 영화 '올드보이'에서 잘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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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냄새
이충걸 지음 / 시공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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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동인 문학상의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동인 문학상에 얽힌 정치적인 이야기들과 조선일보의 관계로 인해서 그 상에 대한 호오는 '오'에 가깝지만(아니, 거의 확실히 '오'지만), 그렇다고 그 상을 받거나, 후보작에 오른 작품들의 질을 '동인 문학상'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깎아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간에 그 작품들은 당대성을 반영하며,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인정받은 셈이니까. 딱히 소설로 구분되기 힘든(개인적으로는 엽편소설집정도가 적당할 듯 싶은데), 이 '슬픔의 냄새'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문학상의 후보로 올랐다는 것은 한국문단이 소설을 보는 관점, 혹은 소설의 장르성에 대한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 이상문학상에서 복거일이 SF단편으로 후보로 오른 뒤 두번째로 그러한 징후를 내비치니 경직된 소설판도 점차 좁아지는 위치를 깨닫고 새로운 탄력을 받기를 원함을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이 소설집, 혹은 에세이집이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슬픔의 냄새'는 이미지와 느낌의 이질거림으로 가득차다. '이충걸식 문장'으로 불리는 이충걸의 낯선 비유사용은 그의 생각과 겹쳐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됨으로써 파열음을 낸다. 그 파열음은 때때로 꽉 막힌듯한 느낌이 들지만, 대체적으로 매혹적이다. 고종석의 단아하고 적확한 문장과 대비되어, 이충걸의 문장은 이물질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물질들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 '고독'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물론 그런 이물질스런 표현은 하루키 이후의 소설, 혹은 90년대 이후로 보여진 한국의 젊은 소설들에서도 이미 보여진 수법이 아니냐 반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충걸의 이질적인 표현은 하루키의 영향권 아래 있던 90년대의 이질적 표현과는 그 결이 틀리다. 아카데미컬하게 판단하자면 그의 이질적 표현은 90년대 쓰는 자의 '의식'에 앞서는 이질적 표현을 넘어서 자신의 '의식'속에 그 표현을 삽입한다. 이질적 표현의 진화를 이룬 것이다. 물론 그 '의식'이 90년대,혹은 그 이전세대의 것보다 깊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할 말 없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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