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부분 온라인서점에서 반값할인 중인 <주석달린 드라큘라>.

 

택배아저씨가 출판 관련 일을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하루가 멀다하고- 는 개뿔, 하루에도 몇 박스씩 책을 택배로 받고 있지만 그와중에도 책을 구입하는 기준은 늘 그렇듯 일관적이고 절대적이다. 바로 '읽을 책만 산다'는 것. 일단 내 수중에 들어온 책은 (차라리 새 책을 사서 줄지언정)남에게 주지도 빌려주지도 않고, 중고로 되팔지도 않기 때문에 내게 읽지 않는 책은 그야말로 처치곤란의 애물단지이기 때문. 

여튼, <주석달린 드라큘라>를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구입 전에 책을 읽어보려고 도서관에서 대출했으나, 빌려온 책이 늘 그렇듯, 반납을 하루 앞두고서야 간신히 펼쳤는데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 직후에 닐 게이먼의 소개글에서 현실웃음이 터졌다.

물론 닐 게이먼은 웃으라고 쓴 얘기는 아닐 테지만, 여튼 토요일 오후에 닐 게이먼이 웃음을 준 내용은 이러하다.

 

며칠 전 신문에서 기사 하나를 읽었다. 요즈음 영국 사회가 얼마나 형편없이 역사를 가르치고,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 주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영국의 십대들 중 상당수가 윈스턴 처칠과 사자왕 리처드가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믿으며, 절반 이상이 셜록 홈즈가 아서 왕처럼 실존인물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주석달린 드라큘라> 中

 

사이토 미나코의 <취미는 독서>에도 비슷한 얘기가 등장하는데 내용을 보면 과연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만도 하다.

 

며칠 전 시부야역 근처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생긴 일이다. 옆자리에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앉았다. "셰익스피어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군. 셰익스피어가 어쨌다고?
"……누구더라?"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 라는 말만 들어도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들어본 이름인데…"
"유명인이라는데, 영 이미지가 안 떠오른단 말이야."
"그러네.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누구인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랴.
아마도 그들은 개봉 중인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를 본 게 아닐까(설마 영화를 보고나서 나누는 얘기는 아니겠지).
- p.32『취미는 독서』

 

불행하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이런 일화는 내 현실에도 있다.

 

 내겐 '찰스 디킨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올리버 트위스트>도 '스크루지 영감'도 아닌, 앤 페디먼이 <서재결혼시키기> '낭독의 쾌감' 편에서 묘사한 '낭독하는 디킨스'다. 누군가의 윤색을 거치지 않은 작가의 실존적인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건 독자에겐 일종의 보너스가 아닐까. 여튼, 디킨스와 관련하여 우스개 소리 하나.
일전에 디킨스의 원서 몇 권을 구입했는데 직후에 책 안 읽는 대학생 사촌동생과 통화를 했다.

 

아낙: '찰스 디킨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 뭐야?
사촌: 베니스의 상인?

(어이, 사촌- 그게 아니지)

 

"찰스 디킨스가 누군데?" 되묻는 사촌에게 "올리버 트위스트 작가다" 했더니 "아~" 한다.

이후 화제가 바껴 다른 얘길 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아낙: 그럼 '베니스의 상인' 작가는 누군데?
사촌: 몰라
아낙: 장난하지 말고
사촌: 몰라
아낙: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사촌: 모른다니까!

(너 정말 모르는구나...)

 

절친 M의 말처럼 톨스토이가 누군지 몰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상식이 모든 이가 알아야 할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없다만,

독서를 상식과 지적허영의 문제가 아닌 즐거움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지 않는가. 분명한 건 문학의 내공이 쌓일수록 현대미디어가 쏟아내는 각종 문화부산물 - 영화나 드라마 혹은 그림으로부터 발견하는 상상력과 즐거움이 한층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리라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이 값싼 비용으로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산이 아닌가. 바로 지적재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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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만 딴짓 하고 싶다 - 중년의 물리학자가 고리타분한 일상을 스릴 넘치게 사는 비결
이기진 지음 / 웅진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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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로 '사물잡학사전'이라고 붙여주고 싶은 책이다.

읽던 도중에 종종 '아니 이 단순하게 보이는 물건에 이런 사연이?' 놀라곤 했는데, 이를테면 '유럽의 Tea' 얘기가 그렇다. 사실 이 에피소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은 '돈이 많고 볼 일이구나'지만 여튼.

 

가볍게 읽는 행간에서 언뜻 엉성한 듯 싶지만 실은 매우 꼼꼼한 태도가 읽힌다. 일례로 '물리학자의 연구실'을 시작하는 페이지의 그림 말인데, 본문에 들어가면 이 어수선한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거의 다 등장한다. 읽다 말고 그림을 뒤져보는 재미가 숨은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쏠쏠하다.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윤광준의 생활명품>이 떠오른다. 두 저자의 공통점은 책에 등장하는 물건들이 (적어도 두 사람에게 만큼은)명품이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한 사람의 명품은 구매를 부추기고 다른 한사람의 명품은 보는 걸로 만족한다는 것 정도일까.
실제로 중년의 물리학자의 보물을 쭉 둘러보는 기분은 황학동 만물시장을 구경하는 그것과 흡사하다. 일단 '만물상'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그것이 새 것이 아닌 하자 있는 중고품이라는 데서 그렇다. 하지만 황학동 중고와달리 '구매욕'을 부추기지 않는 건 여전하다(물론 주인은 팔 생각도 없겠지만).

 

사실 저자의 보물이 가진 가장 특별한 부분은 그것들이 대부분 멀쩡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자의 보물을 보면서 놀랍고 신선했던 것은 그것들이 대부분 깨지고, 일부를 분실한 결핍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들이어서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그러한 결핍 때문에 그것들을 품 안의 자식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물건이 품은 결핍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사연을 읽고, 상상하고, 그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릇에 국한시켜, 나는 깨진 그릇에 편견이 없는데 이는 중국 여행 이후에 생긴 태도이다. 중국에선 식당에서 깨진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는 일이 매우 일상적인 풍경인데 그런 문화를 경험하고 나니 내겐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 결국 물건은 물건 그대로인데 인간의 제각각 다른 마음이 물건을 이것, 저것으로 나누고 가치의 차이를 매기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랄까.

저자가 정성스럽게 내놓는 보물을 구경하고 사연을 읽노라면 '내게로 오라, 와서 꽃이 되어라.' 손짓했을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구든,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순간 그는 혹은 그것은 이미 보물인 것이다.

<윤광준의 생활명품>에서도 했던 얘기지만, 정말 귀한 것은 물건에 치른 가격이 아니라 긴 시간을 함께 하는 동안 그것에 깃든 유·무형의 나만의 흔적들이다. (예전엔 주로 지갑이었지만)최근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한결같이 '전화기는 또 사면 되지만 메모리에 저장된 사진은 되찾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걸 봐도 그렇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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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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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락사스'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세상에 툭 던졌던 '헤세'와 '여행'이라니, 처음 헤세의 신간 제목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상적인 조합이구나' 였다. 그리고 책을 펼쳐 그의 여행지를 확인하는 순간 웃고 말았다. 아, '인도'다. 헤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왠지 오리엔탈리즘을 느끼곤 했는데 이게 영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편, 내가 가진 작가의 배경이 이렇게 빈약했다니 하는 자괴감을 넘어 내가 한창 헤세의 소설을 읽어대던 때만 해도 헤세의 책이라고는 오직 소설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내 독서환경이 참 열악했구나, 뒤늦게 억울한 생각도 들고.

 

헤세의 소설은 대개 작가의 고백적 혹은 체험적인 인상을 받는데 이는 헤세의 소설이 대부분 성장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을 헤세의 소설과 보내고 한참이나 뒤늦게 헤세의 에세이 그것도 여행에세이를 펼치면서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의 감성적 배경에 영향을 미쳤을 작가 내면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겠구나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헤세의 저작 중 에세이로는 처음인 <헤세의 여행>을 펼친 직후의 첫 인상이 당연하달까 아이러니하달까 '헤세다움'이다.

가끔 말하는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데 말하자면 헤세는 두 목소리가 같은 유형의 작가인 것인지, 읽기 시작한 직후부터 밀려드는 이 낯익고 친숙한 반가움을 어찌하면 좋을꼬. 조곤조곤 수줍은가 싶으면 감각적이고, 반짝이는가 싶으면 소박한 문장들이 주는 기시감은 어느 모로 보나 헤세의 문장이다 싶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들.

 

나는 여관 집 딸에게 반한 어느 시골 총각과 권투 경기를 함으로써 그곳에 오랫동안 있지 않았지만 - 두 시간 정도 있었다- 아담한 소도시 초핑겐을 잊을 수 없다. 바덴 풍의 마을 블라운 남쪽에 있는 매력적인 마을 함머슈타인은 내가 언젠가 밤늦게 오랫동안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극히 우연히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지붕과 골목이 그토록 분명하고 아릅답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 - p.40, 본문

 

내게만 국한된 얘기일수도 있지만 헤세의 소설은 읽고 나면 제목 옆에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부제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게 든다. 그건 에세이인 이 책 <헤세의 여행>도 마찬가지인데, 에세이임에도 매 편이 끝날 때면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는 여운이 예전에 헤세의 소설 한 권을 읽은 직후 느꼈던 감동과 흡사하다. 사실 1부를 시작하는 '1. 여행에 대하여'와 마지막 '7부 뉘른베르크 여행'을 제외하면 적절한 제목까지 달고 있는 매 편은 마치 단편을 읽는 기분이 든다. '여행'이라는 분명한 동기를 지향하는 에세이임에도 매 편이 완벽한 이야기의 완결성을 가진 탓에 '여행지에서'라는 공통 주제를 가진 수 십 편의 단편선집을 읽은 것 같은, 기대하지 않았던 포식을 실컷 즐긴 포만감을 준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한결같이 좋으니 더 말해 뭐할까.

 

너무 흔해 이젠 식상한 표현이 됐지만 '정신을 살찌운다'는 말은 결국 외부, 그러니까 우리 정신의 바깥에 있는 (인공이든 자연이든)사물로부터 받은 인상이 사고(思考)하라고 이성을 자극하는 전기적 자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기적 자극은 당시에 즉각적으로 올 수도 있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날 기습처럼 올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기적 자극의 가장 전방위적인 형태의 극적인 예가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여행자에게 시각적, 감각적 자극을 주고 그러한 체험은 여행자에게 일종의 스키마(schema)를 남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헤세의 소설은 헤세의 여행이 헤세에게 남긴 스키마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에게 삶과, 내면의 성찰과, 세상은 어쩌면 그 자체로 하나의 문을 통해 드나드는 긴 여정이지 않았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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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 10]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대표적인 올빼미형인 나는, 그러니까 당일 잠들고 당일 일어나는 취침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만에 전날 자고 다음날 일어난 아침에 정여울의 책을 읽다 첫 페이지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녀의 문장에 격침당했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여행, 우주가 차린 만찬을 포식하는 시간'. 이어 등장하는 장면은 가부좌를 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소년의 모습.
하필 유럽을 제외한 이 대륙 저 대륙을 돌아다녔던 내 지난 여행을 돌이켜보면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는 시간이다. 새벽이 사위는 자리에 여명이 들어차는 그 시간의 공기, 냄새, 빛... 그것들은 언제나 경이롭다. 내가 내 영역을 떠나 낯선 곳에 있음을 가장 실감하게 하는 것은 이국의 풍광도 사람도 언어도 아닌 '잠에서 깬 첫 순간'이었던 것이다. 

정여울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여행에세이에서 읽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 확인한다.
장소를 소개하고,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들려주고, 그곳에 가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매뉴얼은 사실 가이드 책자로도 충분하다.

껍데기만 보면 일견 여행가이드처럼 보이는 정여울의 <나만 알고 싶은 유럽>시리즈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한 실용서 가이드와 차별되는 지점은 두 말 할 것 없이 지면을 가득 채우는 작가의 문학적인 내공에 있다. 그녀의 어느 인터뷰 기사처럼 '소재가 무엇이든 (정여울의)모든 글이 수렴하는 지점은 문학'이고, 그녀의 이러한 정서적 기질이 이번 여행에세이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일례로 목차 중 '달콤한 유혹 한조각'을 열어 보면 그녀는 로마 트레비 분수에선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리스 신화의 재현을 체험하고,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의 유명 과자점 라뒤레에선 남편 몰래 마카롱을 먹는 노라의 은밀한 즐거움에 공감하며, 런던의 뒷골목에선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속삭임을 듣는다. 

책 속의 표현을 빌려 '볼거리'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이 에세이는 참으로 기껍고 특별하다. 마치 진,선,미를 모두 갖춘 미인과 독대하는 기분이랄까.

어느 TV 프로그램명처럼 '문학과 함께 하는 기행'이라고 부제를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 책은 여행 갈 때 꼭 챙겨서 가고 싶은 책이다. 긴 기다림의 줄이 지루할 때, 낯선 장소가 문득 외로우냐고 물어올 때 그녀의 사색이 가득한 이 책은 좋은 동행이 되어 줄 것이 틀림없으므로.

자고 일어나면 소위 유명인사가 뻘 짓을 해대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제 이름 석자를 걸고 활동하는 타인을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말해야겠다. 난 정여울을 참 많이 좋아하고 그녀에게 푹 빠져있다고. 단적으로 '그녀가 꿈꾸는 런던의 하루 시간표'는 나의 그것과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같은 것을 꿈꾸고 바라니 어찌 그녀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글은 매번 정신 없이 흡입하듯 읽게 된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의 글쓰기 중독이 오래토록 계속 되길 욕심내본다.

며칠 전에 배송 받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국내편 몇 권을 발췌독 할 때도 했던 생각인데 중요한 건 역시 기획보다 컨텐츠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같은 재료라도 요리사에 따라 다른 음식이 나오는 것처럼 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글을 다루는 작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평하게도 베스트셀러는 많지만 스테디셀러는 드문 것일 테고.

 

덧> 이 책에서 유일한 흠은 제목이다. 그녀를 모르는 이들이 제목 때문에 자칫 이 책을 놓칠까 걱정이다. 나만 읽고 싶지만 한편으론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 모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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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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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에세이에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보는 순간 윤대녕의 에세이에 부제로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모든 공간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고, 이야기를 품은 공간은 제 앞에 멈춰 선 인간에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추측컨데 그 대부분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기억해?"
<사라진 공간, 되살아나는 꿈들>은 작가의 유년의 공간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작가의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는 최초의 장소가 유년 시절과 접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태어나서 자란 그 곳을 '고향집'이라고 명명한다. 이 공간은 작가의 성장과 함께 대전으로 평택으로 서울로 이동하고 사이사이 징검다리처럼 작가가 머물렀던 장소들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반복한다.
사람들은 옛 것을 대할 때 대개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다. 그러니까 옛 것을 그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기피하는 습성을 보이는 것인데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건 괜찮지만 현재에 재현하는 것은 꺼리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구경하는 건 괜찮지만 구태여 집에 가지고 오고 싶진 않은 무엇이랄까. 결국 추억은 어떤 의미에서 기억의 박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향수는 박제한 기억으로부터 얻는 작은 위안 쯤일 것이고. 
작가가 옛 공간을 더듬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공간과 장소의 의미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원래는 비었던 공간을 내가 채우면서 장소가 되고, 내가 장소를 떠나는 순간 그곳은 다시 빈 공간이 되지만, 그곳은 이미 예전의 그 빈 공간이 아닌  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며 어느 날엔가 내가 그곳을 찾으면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기억해?" 라고.
윤대녕의 에세이는 비유를 하자면 작가의 소설의 뒷풍경을 보는 기분이 들곤 하는데 이번 에세이 역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에세이이니 당연히 화자는 '나'지만 읽다 보면 작가의 얘기가 아니라 작가의 1인칭 얘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메라 밖에서도 배우로 사는 배우처럼 원고지 밖에서도 작가로 사는 작가가 있다면 윤대녕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나는 작가에게 편견이 없으니 이는 전적으로 책 속 병원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는 "과인이 ~말이외다" 하는 식의 작가의 화법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종종 제목을 확인하곤 했다.

과거의 장소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지 한때 내가 점유했던 장소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인가? 그렇게 단순한 얘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복기를 통해 꿈의 복원에 다가가고자 하는 쓸쓸한 열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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