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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그때도 노래가 불릴까?

그때도 노래는 불릴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한 노래가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브레히트의 배경을 알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인가.

 

브레히트는 시론에서 서정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다.



얼마 전 시인 킨예가 이러한 시기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써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써도 된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썼는지 물어보았지요. 그는 못 했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드는 것을 내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몇 줄을 끄적거리면서도 나는 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를 모든 사람을 위해, 즉 비 오는 날 비를 피할 잠자리를 찾아다녀도 집도 절도 없어 빗방울이 그의 옷깃과 목 사이로 그대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나는 그만 움츠러들었어요.”

예술이 오늘의 상황만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언제나 빗방울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가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짐짓 이렇게 떠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면 그런 시가 쓰일 수 있겠지요.”

 

-pp.14-15

 

 

*킨예_ 브레히트를 지칭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도 같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칠장이_ 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지칭



히틀러의 나치를 피해 브레히트는 가족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잃은 브레히트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신을 의식하며 살았으며 <살아 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자조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신이 시를 쓰는 동력은 분노라던 브레히트의 강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브레히트로 하여금 서정시를 쓰게 했을까.

고작 빗방울로도 이토록 마음을 수런거리게 하는 브레히트의 분노라니...

 

다시,

실존주의 작가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일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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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이응준의 책을 몇 권 샀는데 아마 검색 알고리즘이 그걸 기억했던가 싶다. 

오늘 전혀 관련 없는 검색어 검색 결과에 조선 칼럼이 갑툭 껴서 나왔다. 와 눈새 보소. 

ㅈ 끄트머리만 보여도 머얼리 돌아가는데 이 무슨 갑분횡액인가 했더니, 칼럼 작성자가 작가 이응준이다.

기사 등록일을 보니 작년 6월이고요? 오매~행동력 보소. 

각 잡고 읽어보니 구구절절한 내용의 주제가 원전 찬양이네요? 

원전 반대하는 환경노조도 보기 싫고 저탄소 추구하는 정치인도 보기 싫고 

뜬금 무근본 코뮤니즘은 또 어쩔...

그놈의 원전이 대체 뭐길래 미친...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작가님 원전이랑 예쁜 사랑하세요~꼬옥~


마침 엊그제 울산 간절곶에 갔다 왔다. 서생면을 에워싼 송전탑이 참 휘황찬란하고 웅장하더라. 

조용하니 풍광 좋던데 작가님에게 작업실 별장지로 추천박아드림. 


그래.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지. 누군가에겐 특히 더 그렇겠지.

뒤따르는 후배가 이렇게 든든하니 김훈 작가는 외롭지 않겠네. 

아, 김훈 작가가 후발대인가. 알빠아니고요.


한차례 짜증웨이브가 지나간 뒤 구입한 책의 출간일을 확인해보니 조선 칼럼 이후 출간한 신간이 한 권 껴있다. 뭐 어쩌겠나. 그나마 한 권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지...ㅇㅅㅂ...

잠깐이지만 큰 웃음 주신 작가님, 조선한테 금일봉 넉넉하게 받으셨길 바랍니다. 

원전의 광휘 아래 연년세세 발뻗고 행복하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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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인지한 건 좀 됐는데 그에 비하면 책을 읽은 건 많이 늦은 편이다. 각설하고. 정희진의 첫 책으로 『혼자서 본 영화』를 고른 건 '영화 에세이'이니만큼 저자와 첫만남으로 무난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망픽인 것 같다.

 

책 전반에 걸쳐 느낀 정희진 작법은 이분법적 구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말하자면 '조건화 되지 않은 일반화에 의한 오류'와 '거짓 원인의 오류'로 층층이 우물을 쌓고 독을 푼다. 





미카엘 하케네의 2002년 개봉작 <피아니스트>는 54회 칸에서 그랑프리, 남우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원작소설은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혼자서 본 영화』에 수록된 스물여덟 편 영화 중 <피아니스트>에서 페이지가 유독 안 넘어갔던 이유는 내가 본 영화와 정희진이 본 영화가 너무 달라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에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나라면 '사드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로 했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이런 부제를 써야 한다면 말이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그러나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자들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공포요, 폭력이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p.054)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p.059)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라면 동시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운동이 유기적으로 진화하려면 함께 가는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특히, 젠더 운동가들은 이 부분을 종종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내부 사정이 있는 건지 철지난 꽃노래만 자꾸 부르니 시의성이 사라지고 공감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발췌문은 전형적인 일반화 오류로 야동이 더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시대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지금은 성별을 떠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 않는 시대이며 광장에서 몸과 성욕과 섹스를 떠드는 시대다. 시대가 변했으니 성 담론도 바뀌어야 된다는 얘기. 그런 점에서 '이성애자 여자가 남성의 시선으로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을 보며 성욕을 느낀다'는 정희진의 주장 혹은 의견이 확증편향 혐의를 벗으려면 이런 결론에 다다른 과정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시각적 자극이 성욕에 미치는 영향 어쩌고 하는 뇌과학은 다들 아는 얘기일 테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여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변태 성욕'이라고 규정 짓는 것도 마찬가지. 저자 본인의 주장인지 따로 출처가 있는지 궁금한 대목인데,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에리카의 불행은 에리카가 이상성욕자여서가 아니라 상대를 잘못 고른 데 있다. 역지사지 해보자. 호감을 주고받던 남녀가 호텔에 갔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자신은 피학 성향임을 밝히고 여자에게 자신을 묶고 입에 양말을 물리고 옷을 찢고 강간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성향이 아닌 여자는 남자의 제안을 거부하고 비난한다. 이 상황에서 여성은 가해자인가?

 

 

울면서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는 정희진은 월터 클레머에게 분노한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함께 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그 남자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같이 즐기는' 그 각본은 누가 짜는데? 네가 한 강간이 같이 즐기는 거야? 네 손은 일상적인 폭력으로 더러워져 있잖아? 만일 그녀가 미쳤다면 그것은 그녀가 단지 중년 여자이기 때문이고, 네가 미치지 않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단지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야. 만일 그녀가 변태라면, 넌 (성폭행)범죄자야. 그녀의 '변태성'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아. 하지만 넌 그녀를 대상으로, 물건으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미치고 안 미치고는 누가 결정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 주체는 삽입 섹스를 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안드레아 드워킨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pp.59-60)

 

  

안드레아 드워킨이 얼마나 빼어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젠더가 생계수단이라는 저자가 인용할만한 문장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득 진모 씨의 남근다발 어쩌고가 떠오르네.

 

정희진이 체리피킹한 클레머의 폭언은 연인 간 보통의 섹스를 기대했던 클레머에게 에리카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피학성향을 고백하고 기구들을 보여주며 편지에 목록으로 정리한 방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라고 부추긴 이후에 등장한다.

정희진이 성폭행 강간범이라고 분노의 플래그를 꽂은 월터 클레머는 그녀를 학대하고 물건(악기)처럼 다루어주길 원하는 에리카의 편지를 읽고 에리카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방식은 당신을 다치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  

 

소설은 에리카의 편지를 읽는 클레머의 심리를 보다 성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ㅣ문학동네

 

그가 큰 소리를 내어 편지를 읽는 건 단지 자신을 신명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원하는 걸 참아내려 했다가는 누구든 조만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종류를 열거한 목록일 뿐이다. "이대로 하자면 나는 당신을 완전히 물건처럼 다뤄야 해." (p.286)


"그건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에리카." 클레머는 자기의 어떤 부탁도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에리카의 당부를 읽으면서, 도저히 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p.287)


"그럼, 그렇게 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대가는 뭐지?" 클레머가 농담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란 그에게 아무런 재미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다. (p.288)


클레머는 편지를 보고, 그가 그녀를 꿀꺽 삼켜주기를 여자가 원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밥맛이 떨어져 그걸 정중하게 거부한다. 클레머는 '사람들이 네게 하지 않길 바라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격언으로, 자신이 거절하는 이유를 댄다. 그리고 그 역시 재갈을 물고 사슬을 몸에 감기는 싫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절대로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어.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가 없다구." 클레머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나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결코 편지에서 읽은 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건, 그에게는 이미 확고하게 결정돼 있는 일이다. (p.291)

 

정희진이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후 맥락을 생략한 정희진의 글만 보면 클레머가 갑자기 휙 나타나서 에리카를 강간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편지와 강간 사이에는 중간 과정이 있다. 정희진이 언급하지 않은 중간 과정은 이렇다. 에리카의 편지(피학 리스트)를 읽은 클레머는 에리카가 원하는 사드마조히즘 섹스를 거부하고 아파트를 떠난다. 이튿날 에리카는 클레머를 찾아가 (묶지도 때리지도 않는 정상적인)구강성교를 시도하지만 행위 도중에 에리카가 구토를 하고 그 모습에 클레머는 모욕을 느낀다. 그리고 그날밤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친 클레머가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겠다고 덤비는데 이어지는 장면이 정희진이 분노한 문제의 성폭행, 정확히는 동의를 강요한 비동의 강간이다. 행위 중에 클레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냐'였다.

 

문제의 장면에서 정희진의 주장처럼 클레머가 여성 성기에 삽입을 함으로써 강간 판타지를 이루었다고 느꼈다면, 단언하건데 정희진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이 장면은 에리카와 클레머 둘 모두에게 불행한 장면으로 에리카는 자신이 원했음에도 막상 피학에 놓이자 이상과 다른 현실에 절망하고, 클레머는 단호하게 거부했던 에리카의 리스트를 실행한 자신과 그녀를 조롱한다. 정서적 오르가즘이 배제된 사정은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배설의 충격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포르노 동영상이 에리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현실이다.


영화는 에리카와 클레머의 호흡과 표정, 움직임으로 폭력 혹은 폭행의 시작과 끝을 거칠게 보여주는데 같은 장면을 소설은 다소 차분하고 냉소적으로 서술한다. 소설이어서 가능한 서술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행위보다 더 격렬한 클레머의 자의식인데 자기긍정, 자기부정, 자가당착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클레머의 자아는 일견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클레머가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치는 장면부터 아파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이르는 동안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당위로 이어지는 클레머의 심리 변화를 강박적으로 묘사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를 마조히스트 에리카와 강간범 클레머로 단순 분류하지만 발췌에서도 볼 수 있듯 클레머의 서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정희진은 언급하지 않지만 에리카에게 클레머만큼 혹은 클레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에리카의 엄마다. 페미니스트에게 '여적여'가 금기어에 가깝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 영화는 에리카 모녀를 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에리카의 이상성욕과 편집증의 기저에 정상적이지 않은 모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 사망한 아버지 대신 남편 역할을 하며 엄마와 기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한 에리카는 서른 중반이 되도록 엄마와 심리적으로 감금, 종속된 관계다. 다양한 관계과 역할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화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엄마의 시선에 갇혀 거울 속 자아만 보며 성장한 에리카의 이상성욕은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그 정점이 월터 클레머다.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에선 에리카가 지긋지긋한 엄마 대신 클레머가 이상적인 엄마의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심리를 읽을 수있다.

 

정희진은 에리카를 마조히스트로 규정하는데 그런 규정만으로는 에리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에리카는 엄마와 클레머에겐 사디/마조히스트, 피아노 교습생들에겐 사디스트 성향을 보이는데 이런 차이는 에리카가 엄마와 클레머에겐 자신의 바닥을 보이는 걸 허용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전체적인 감상은 정희진은 괜찮은 영화 평론가는 될 수 없겠다는 거다. 

 

 

덧1. 정희진은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정희진이 쓰는 전통적 방식의 가부장제와 2000년 이후 그러니까 딸바보 등장 이후의 가부장제는 의미가 달라졌다. 생계노동은 남성, 가사노동은 여성으로 부부 역할을 고착화했던 기존의 질서는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다.

 

덧2. 정희진은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p.063)이라고 마르크스 주의를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실상 변증법의 핵심인 '낡은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말로 사회운동가들의 지향점이지 않던가? 

 

덧3.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옐리네크는 과격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반페미니스트로 배척받았다고 한다.

 

덧4. '에리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진단과 분석이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병리학적 고민도 같이 해야 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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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예로 비유하자면 서사는 없고 모티프만 있는 것 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한마디로 난해하다. 난해하다는 건 다른 말로 불친절하다는 의미. 그중에서도 특히 불친절한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을 본 건 중3 때인데, 무조건 봐야되는 걸작이라는 친구의 등쌀에 여름방학 때 친구네 거실에서 나란히 앉아서 봤다. 그리하여 졸리는지 지루한지 구분 안 가는 상태로 눈 뜬 장님처럼 멍하니 앉아서 본 <희생>이 그 여름 내게 남긴 건 '칸 수상작은 지리멸렬하고 재미없고 어렵구나' 였다.


위안이 되는 건 타르코프스키를 수면제로 삼은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거다. 


“최근에는 바디 럽이라는 베개 회사에서 상금 1000만 원이 걸린 잠 안 자고 오래 버티기 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대회가 시작되고 10시간 뒤 버티는 참가자들을 보내버리기 위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대회장에서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망할 롱테이크!


-p.77, 정지돈 『영화와 시』 







그러니까 영화를 서사와 플롯이 움직이는 활동사진이라고 정의할 때 <희생>은 영화적인 재미(=자극)를 느낄만한 요소가 딱히 없다. 영화를 텍스트로 읽고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 혹은 영덕들이야 환호할 요소가 있겠지만 지면 혹은 상상에 갇혀 있던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그것에 서사와 플롯이라는 날개를 달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 공식에 익숙한 일반 대중에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러니까 인간을 응시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불친절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일반 대중이라, 타인의 잠꼬대가 기억에 남지 않는 것처럼 줄거리도 플롯도 뭐도 기억 안 나는 불친절한 <희생>이 시간의 층층을 뚫고 내 기억에 남긴 건 단 한 장면이다. 영화 포스터이기도 한 황량한 대지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그것인데,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과 상실이 있겠지만 <희생>을 얘기하고자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장면 밖에 안 떠오른다. 아, 그 나무에 때때로 아버지와 아들이 물을 주던 장면도 기억에 있다. 그리고 기억하는 건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다는 거. 새삼 깨닫는다. 영화 <희생>은 내게 기억을 더듬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영화라는 걸.


그 여름 이후 <희생>을 다시 떠올린 건 대학 시절, 아트시네마를 쫓아다니던 학과 동기가 어느날 타르코프스키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내가 <희생>을 봤다 하니 동기가 무척이나 반가워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줄거리든 감상이든 내겐 영화에 대해 동기와 나눌 얘기가 없었다. 떠오르는 건 이미 썼듯 그저 앙상하고 어린 나무 한 그루 뿐이다. 그리고 동기에게 나무 얘기를 하다 깨달은 건 망명지를 떠돌며 외롭게 작업했던 감독의 유작이 내겐 활동사진이 아닌 회화의 이미지로 남았다는 거였다.




'활동사진'은 'Motion Picture'를 직역한 단어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관람료를 받고 최초로 활동사진을 상영했을 때 영사기가 뿜어내는 '움직이는 열차'에 모여있던 시민들이 격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렇듯 최초엔 움직이기만 해도 감동을 주었던 활동사진은 이후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듣고 보는 얘기'로 종합예술의 지위를 획득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Moving Picture' 즉 'Movie'다. 


대개 영화를 무비, 필름, 시네마로 구분하는데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트시네마를 찾아다니던 동기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 흥미를 느끼는, 말하자면 '필름'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이 친구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노라면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쇼트, 인서트, 롱테이크 등등. 지금은 공기처럼 익숙한 용어들이지만 대부분 이 친구에게 귀동냥으로 얻은 것들이다. 이 친구는 특히 장이머우를 필두로 하는 중국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이 친구에게 지금까지도 고마운 건 지극히 대중적인 내 취향을 비웃지 않고 개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영화를 극장에서 함께 봐준 거였다. 여담이지만 이 친구를 만나기 전의 나는 중국 영화와 홍콩 영화를 구분 못했다.



“나는 당신의 영화를 일주일 동안 네 번 봤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만 보려고 극장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몇 시간이나마 진정한 예술가들과 진정한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 내게 부족한 것, 내가 동경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구역질 나게 하는 것,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 내게 밝고 따듯한 것, 내가 살아 있게 하고 내가 파멸하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당신의 영화에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봤습니다. 내게는 처음으로 영화가 현실이 됐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화를 보러 가는 이유, 잠시 그 속에 들어가 살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22, 『시간의 각인』 

 
 

『시간의 각인』 작가 서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감독으로 사는 동안 받았던 많은 편지를 언급하는데 편지를 보낸 이들 대부분은 토목기사, 설비기사,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는 학생, 여교사, 정년퇴직한 늙은이 등이다. 위에 인용한 편지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어느 여자 노동자가 보낸 것인데 이쯤되면 속물적인 혼란이 온다. 내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즐기지(樂의 의미가 아님) 못하는 건 내가 속한 사회환경적 태생의 문제 때문인가. 좀 더 즉물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노동자(블루 컬러) 계급이 아니어서인가, 라는 원론적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다시 '노동자 계급'의 정의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은 엉뚱한 곳에 좌표를 찍기 시작한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골을 읽으며 제정러시아를 통과하고 고리키와 파스테르나크의 책을 손에 쥐고 혁명과 냉전을 치러낸 공산사회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밖에 모르는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기저를 갖고 있는 것일까.

결론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라는 거다. 그 여름의 나는 너무 어렸으니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그의 영화를 보면 답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노동자'를 보니 떠오르는 기억 하나. 

대학 신입생 때의 일. 교필에서 상상도 못했던 수학II 암습을 맞고(난 문과생이라고ㅠㅠ) 좀비 상태로 기어들어간 과방에서 구석에 누가 던져 놓은 책을 생각 없이 집어들었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꿈쩍도 않고 절반 정도를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카프카 식으로 말하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는데 책은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이었다.
 















스무 살의 새벽 노래
 
스무 살이 되기까지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다
새벽은 이미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으며
온몸으로 부르던 새벽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

나는 처음 노래했지만
노래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누구의 가슴에나 이미 있었고
누구라도 받아쓰지 않으면 안 될
우리들 가난한 사랑의 절규였다

p.12, 박노해 『노동의 새벽』


밤새워 일하고 지친 몸에 차가운 소주를 들이부으며 새벽과 맞서던 누군가의 스무 살과 맞닥뜨린 그 해 3월. 

나도 스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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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세트 - 전6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판형 안 작아요. 기존 열린책들 세계문학 판형보다 조금 더 큽니다. 가독성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양장이 아닌 건 아쉽네요. 그리고 박스 내구성이 정말 별로예요. 뚜껑은 금방 떨어질 거 같고 박스 표면은 접착불량으로 우글거리고. 그래도 전권을 다시 출간해주신 열린책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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