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8년 후 : 뼈의 사원」은 3부작 중 1부이며 전작 '28일 후'를 제작, 감독했던 스탭이 다시 뭉쳤다고 한다. 전작은 안 봤고, 「28년 후」만 봤음을 미리 밝힌다.


갑자기 좀비물 푸쉬가 씨게 와서 이 장르 명작이라는 '28일 후' 시리즈의 최신작 「28년 후」를 봤는데 '좀비물'인 걸 빼면 정보 없이 봐서 감독이 대니 보일인 줄 몰랐다. 러닝타임 내내 종종 의심하다 엔딩인 듯 쿠키인 듯 엔딩 장면에서 초기작 '록 스탁 앤 두 스모킹 배럴즈'의 MTV스타일이 확 터지는 걸 보고 대니 보일이 맞구나 했다.


엔딩 포함 줄거리


28년 전 감염자들을 피해 홀리 아일랜드(섬)으로 피신한 생존자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일군다. 간조가 되면 본토로 바닷길이 열리는데 이날 생존자들은 본토로 건너가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구해온다. 

섬의 아이들은 14세가 되면 본토로 가서 첫 사냥을 하는데(성인식) 아들인 스파이크가 열두 살이 되자 제이미는 스파이크를 데리고 본토로 간다. 아빠의 엄호 끝에 스파이크는 첫 사냥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무사히 본토에 귀환하지만 성공 축하 파티가 열린 그 밤에 스파이크는 아빠의 불륜을 목격한다. 뒤이어 본토에 의사가 있다는 정보를 아빠가 숨겼다는 사실을 알자 아빠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아빠가 아픈 엄마를 버렸다고 판단한 스파이크는 엄마를 데리고 본토로 가서 천신만고 끝에 닥터 켈슨을 만나지만 두 사람이 확인한 건 엄마가 암 말기이며 죽음이 임박했다는 진실이다. 그에 아일라는 안락사를 선택하고 스파이크는 닥터 켈슨의 도움으로 엄마의 제를 치른 후 엄마가 구조한 (감염자가 낳은) 아기를 데리고 홀리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아기에게 엄마 이름 '아일라'를 지어준 스파이크는 마을 입구에 아일라와 편지를 담은 바구니를 두고 다시 본토로 간다. 



1. 고립

'28년 후'에는 두 개의 공간이 등장한다. 본토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이 정착해 터를 일군 안전한 홀리 아일랜드와 감염자들이 장악한 위험한 본토 브리튼이다. 간조기에 생존자의 땅과 죽은자의 땅이 연결되면 생존자들은 죽은자들의 땅으로 가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구해온다. 

생존자들의 섬과 감염자들의 섬 중 고립된 섬은 어느 쪽일까.

  


2. 첫 사냥 혹은 첫 살인

아내 아일라의 반대에도 제이미는 열두 살이 된 스파이크를 데리고 본토로 간다. 홀리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스파이크에게 본토는 감염자들이 장악한 공포의 땅이기도 하지만 첫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스파이크는 사냥=살인을 배운다. 감염자라고는 해도 일단은 인간의 형상을 한 생명체이므로 소년에게 첫 사냥은 생존과 더불어 첫 살인의 순간이기도 하다. 기억할 것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생존방식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3. 오이디푸스

서양문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얘기할 때 '오이디푸스 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첫 사냥에 성공하고 무사히 귀환한 날 밤 아빠의 불륜과 거짓말을 목격한 스파이크는 분노한다. 하지만 제이미는 스파이크가 느낀 절망을 외면하고 이는 스파이크가 아빠에게서 보호와 책임이라는 '가장의 지위'를 뺏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스파이크는 아픈 엄마를 데리고 안전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본토로 향한다. 야만의 땅에 엄마를 고쳐줄 의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이미를 위해 변명해보자면 제이미가 스파이크를 사랑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방식으로 아일라를 사랑한 것도 어쨌든 사실이고. 



4.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역설

메멘토 모리는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아픈 엄마를 치료하기 위해 아빠에게 첫 사냥(첫 살인)을 배운 야만의 땅으로 엄마를 데리고 간 스파이크는 그곳에서 엄마에게 예정된 죽음을 확인한다. 이때 닥터 켄슬이 절망하는 두 사람을 위로하며 뼈를 쌓아올린 제단 앞에서 하는 얘기가 '메멘토 모리'인데 「28년 후 : 뼈의 제단」의 주제가 드러난 장면이다.

엄마를 살리기 위해 간 땅에 엄마를 묻는 스파이크. 엄마가 구조한 아기에게 엄마의 이름을 지어주고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오는 스파이크. 아버지가 죽음을 가르친 땅에서 어머니가 새 생명을 구조해 스파이크에게 안긴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 소년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5. 성장과 독립

스파이크는 본토에 세 번 가는데 처음은 아빠랑, 두 번째는 엄마랑, 마지막은 혼자 간다.

앞선 두 번은 첫 사냥과 엄마의 치료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세 번째는 목적이 없다. 어린 스파이크는 왜 그 위험한 감염자들의 땅으로 갔을까. 해석을 위한 해석을 해보자면,


1) 제이미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스파이크(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의 땅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다.

2) 본토에서 아기의 탄생과 엄마의 죽음을 연이어 목격한 스파이크에게 홀리 아일랜드는 갇힌 세계 즉 멈춘 세계이고, 본토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열린 세계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3) 이솝우화 '개와 늑대' 메타포로 본다면, 안전과 안정된 먹이가 보장되지만 묶여서 사육되는 삶 vs 굶주림과 생존의 위협이 있지만 자유로운 삶 중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건 아버지의 부정을 목격했고(낡은 세계의 붕괴), 엄마 아일라의 죽음과 아기 아일라의 탄생을 지켜본(삶과 죽음의 교차) 스파이크가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6. 후기

영국 본토에서 분노 바이러스가 퍼지고 28년이 지난 시점, 다른 대륙은 바이러스 진압에 성공했지만 영국은 실패했고 사실상 대륙봉쇄령이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일견 브렉시트를 연상케하는 상황이다. 

장르는 B급 좀비물인데 그 안에 담긴 스토리텔링이 생각보다 신화적이고 철학적이어서 의외였고 기술적으로는 대니 보일의 MTV 스타일이 2026년에도 여전히 통하는 게 놀랍다.


1부 엔딩과 쿠키만으로는 2부와 3부의 스토리 방향이 잘 가늠이 안 되는데 큰 틀은 장르의 전형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까 싶다. 똥촉 하나 던지자면 1부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한 스파이크가 스스로 고향을 떠나 척박한 땅으로 걸어들어가는 2부는 '오디세이아 신화'의 변형이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알려진대로 '오디세이아'는 오랜 세월 타지를 떠돌며 고난을 극복하고 운명과 맞서 싸우는 오디세우스의 성장기다. 만약 2부가 오디세이아 신화라면 3부는 의외로 홀리 아일랜드로 귀환하는 얘기일 수도?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아기 아일라다. 감염자의 태반에서 태어난 아기는 일단 눈동자 감식법에 의하면 비감염자로 보이지만 아빠가 무려 알파 좀비인데 탄생 비화 정도로 소비될 것 같지는 않다.


- 등급심의 때문에 국내 개봉이 2월 말로 미뤄진 2부는 시리즈 중 가장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니 나같은 고어 기피자는 눈감고 봐야 할 듯.

- 스파이크를 연기한 아역 배우 알피 윌리엄스가 정말 연기를 잘 한다. 어떻고 저떻고 수식 필요 없이 걍 연기를 잘함. 연기천재만재임. 그런만큼 지속적인 심리 케어가 필요해 보인다. 알아서 하겠지만. 영화 초반부터 엔딩까지 내내 아동학대가 걱정될 정도인데 그만큼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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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엘즈워스-존스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사람들은 종종 낙서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음, 틀림없이 예술이죠. 그 얼어 죽을 테이트에도 걸려 있잖아요?"


『뱅크시_ 벽 뒤의 남자』


뱅크시의 그래피티에서 느끼는 가장 큰 쾌감은 역시 패러디와 패러독스에 있다. 예전에 M과 '예술을 한다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선구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창작은 어려운 작업이고 선구적인 경향을 끌어내는 프론티어가 되는 건 순전히 '재능'의 영역이다. 세상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뱅크시는 명화에 변형을 주는 작업을 곧잘 했다. 이 책의 저자도 언급했지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인기가 좋은데 뱅크시의 작업에 국한하면 내 취향은 밀레보단 모네다. 콕 집어 수련 연못에 쇼핑 카트를 처박은 발상이 무척 재미있다. 뱅크시가 붙인 제목도 재미있는데 이를테면 밀레는 '직업소개(Agency job)', 모네는 '쇼 미 더 모네(show me the monet)' 하는 식이다.





(위)『벽 뒤의 남자』 ㅣ (아래)『Wall and Piece』


(아래) 'show me the monet' 왼쪽에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다. 제목 'Sunflowers'옆에 'Petrol station'을 덧붙였는데 뱅크시의 작업물은 보면 볼수록 선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말하지만 '선동'이 아니라 '선언'이다.


-


Banksy 『Wall and Piece』  





표지와 목차






'쥐'가 뱅크시에게 의미가 있는 건지, 그래피티 작업자들에게 의미가 있는지 가끔 궁금하다.

어쨌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쥐가 아닐까 싶은 뱅크스의 쥐(들).

'The human race is the most stupid and unfair kind of race'에서 뱅크시가 인간을 보는 시각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든다.


이하 책장을 훌훌 넘기다 손이 멈춘 몇 페이지.




Why would someone just paint pictures of revolutionary when you can actually behave like one instead?




I told her 'I'd had an epiphany that night and she told me to stop taking that drug 'cos it's bad for your heart'



뱅크시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웹서핑 중 sns에서 뱅크시의 글을 읽고서였다. 뱅크시의 육성이 궁금해서 원서를 주문하고 며칠을 기다려 마침내 읽은 'when i was eighteen'으로 시작하는 '그날밤의 일화'.




재미있는 우연인데 책을 읽기 며칠 전 S와 차로 이동 중에 이 페이지와 동일한 내용, 이른바 'Brandalism'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고 잠시 정차했을 때의 일이다. 정면 옥외 광고판이 번쩍이는 걸 보다가 갑자기 불만이 터져나왔다. 나는 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데 왜 도로 한복판에서 일방적으로 저 기업의 광고를 봐야 하는 거냐고!





뱅크시가 주목하는 사회담론을 쫓아가다보면 책의 제목인 'Wall'이 중의적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wall'은 뱅크시가 작업을 하는 담벼락일 수도 있고, 팔레스타인을 위협하는 장벽일 수도 있고, 편견과 불평등을 용인하는 인식의 부조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겐 뱅크시의 작업의 시작과 끝이 결국 작가주의처럼 느껴진다. 뱅크시는 저항하는 자일까 자유주의자일까.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처음엔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분명한 건 뱅크시의 관심이 늘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거다. 

뱅크시의 그래피티는 변방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주류에 안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변방에 있다. 변방에서 변방을 얘기하고, 변방에서 주류를 얘기한다. 


“The Bad artists imitate, The Great artists steal

- Picaso


예전에 봤을 땐 별 감흥 없었는데 이제 보니 피카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싶다.



그리고 외전_ 코로나 시대의 뱅크시 (출처.banksy.co.uk)




디테일이 위트가 넘치고 재미있는 작업물이다.

뱅크시가 하면 놀이도 작품이 되는 부러운 재능의 세계.


팬데믹으로 락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황을 견뎠다. 혹은 즐기거나.

뱅크시는 아마도 '즐긴' 쪽인 것 같다. 뱅크시에 의하면 부인이 질색했다고...

부인의 질색에 공감한다. 나라면 저 욕실에 절대로 안 들어갈거다.





여담_

1. 엊그제 페이퍼에 뱅크시를 언급한 김에 내처 뱅크시 하나 더! 까지는 좋았는데 페이퍼 하나를 썼을 뿐인데 즈질체력이 바닥났다.  

2. 사실 '뱅크시'는 예전에 작성한 글인데 이미지와 내용을 정리해서 새로 쓰려니 바늘이 소가 됐다.

3. 그나저나 T1은 어쩌고 있는지. 슈뢰딩거 고양이 같은 녀석들! 고백하건대 이 페이퍼의 목적은 월즈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2R를 관전할 용기가 없어 도피성 회피성이다.

4. 이대로 가을인가? 당황하기엔 벌써 9월 중순도 끝무렵이다. 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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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단토의 예술 철학에서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예술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통찰의 끝에 단토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 테제는 단토의 저서들에서 여러 번 논의된 바 있지만 그만큼 자주 왜곡되고 오인되어 왔다. 이 책은 그가 거듭 주장한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가 워홀 말고도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책 후면 표지 발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을 고함'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비견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선언'이라는 의미로는. 물론 단토가 선언한 '종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술과 함께 그 안에 요요히 퇴적되어 온 역사도 봐야 한다. 선언이라 함은, 그것이 지닌 무게란 무릇 그런 것이다.

예술문외한인 일반인으로서 한마디 첨언하자면 단토의 선언은 뱅크시의 퍼포먼스로 1막 1장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로 뱅크시의 근황이다.

최근 뱅크시가 영국 런던 왕립 법원에 남긴 벽화는 '피켓을 든 비무장 시위자를 법봉으로 때리는 판사'다. 현지 언론은 최근 영국 정부가 친팔레스타인 단체 '팔레스타인 행동'을 금지 단체로 지정한 것과 관련있을 거라고 해석한다는데... 

지난 6일 런던 도심에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고 약 900명이 체포됐는데 이에 시위 주최 측은 '법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면 저항은 꺾이지 않고 강해진다'고 했다고 하니 사법부의 권위? 신뢰? 정의? 그게 뭐든 사법부의 뭔가가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건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 듯.




출처_ banksy.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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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서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성서에는 소가 여자나 남자를 죽이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베르나르 성인은 윙윙거리는 소리로 자신의 업무를 방해한 벌 떼를 파문했습니다. 벌들은 또한 816년에 독일 서부의 보름스 태생의 한 남자가 사망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지방 의회는 그들에게 질식사를 선고했습니다. 1394년 프랑스에서는 돼지 몇 마리가 아이를 죽이고 잡아먹었습니다. 암퇘지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새끼 여섯 마리는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사형을 면제받았습니다. 1639년 프랑스 디종의 법정은 사람을 죽인 말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살인 뿐 아니라 자연에게 저지른 범죄도 심판받았습니다. 1471년 스위스 북부 바젤에서는 괴상한 빛깔의 알을 낳은 암탉을 상대로 재판이 열렸습니다. 암탉은 악마와 내통했다는 판결을 받고 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인간의 끝없는 잔인함과 무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유명한 재판은 1521년 프랑스에서 열렸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파괴와 손실을 야기한 쥐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신고로 법원 출두 명령이 내려졌고, 국선 변호사까지 선임되었습니다. 두뇌 회전이 빠른 변호사 바르톨로메오 샤스네는 의뢰인들, 즉 자신이 변호를 맡은 쥐들이 첫 번재 공판에 나오지 않자 재판소까지 오는 길에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재판연기 신청을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피고들이 법정까지 오는 동안 원고 소속의 고양이들이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도록 보장해 줄 것을 법원에 호소했습니다. 불행히도 법원은 그런 보장을 할 수 없었기에 재판은 몇 번이나 더 연기되었습니다. 마침내 피고측 변호사의 열렬한 변호 끝에 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659년 이탈리아에서는 애벌레들에 의해 황폐해진 포도원의 소유주들이 법원에 서면으로 소환장을 제출했습니다. 애벌레가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기소 사실을 기재한 종이가 인근 나무들에 부착되었습니다.[….] 


-pp. 265-266,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먼저 '생태주의' 용어부터 살펴보자. 단어에서 대충 의미를 유추할 수 있지만 이런 기회에 정의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므로. 

생태주의 사상은 여러 세부적인 갈래가 있는데 다음은 그중 심층 생태주의.


 심층 생태주의는 환경위기의 원인으로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을 지적한다. 이들은 서양 전통의 세계관에 내재된 인간 우월주의와 이원론적 분리주의에 반대하며 두 가지 규범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생명적 관점에서 인간이나 자연적 존재가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이고, 두 번째는 나를 나 이외의 타인과 동식물종, 지구로 넓혀서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는 경지의 자기 실현(self realization)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두셰이코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연쇄적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동물(혹은 짐승)을 의심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녀는 지방 경찰청에 민원을 넣는다. 발췌한 내용은 그녀의 두 번째 민원 내용 중 일부인데 읽으면서 깔깔 웃다가 이 내용이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창작인지 실화인지 궁금해 검색해보니 실화가 맞다.


'진실 혹은 거짓'에 등장할 것 같은 내용을 읽다 보니 드는 생각은 인간은 심심한 걸 못 견뎌하는 종족이라는 것과 동시에 참 유머러스한 종족이라는 것.

내용 중 개인적으로 가장 황당하고 엽기적이었던 건 악마와 내통했다고 누명을 쓰고 화형당한 암탉 얘기. 참고로 M은 쥐 얘기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오랜만에 전화 낭독을 함.


'화형당한 암탉'에 덧붙여,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우리와 다른 것'에 유독 경기를 일으키는 기질을 보인다.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부터 오랜 기간 서서히 고착된 집단주의의 영향인가 싶은데, '다른 것'을 확률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집단을 위협하는 징후로 보는 것이다. 한 예로 중세 유럽은 쌍둥이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동식물을 인간과 동일한 생명체로 인정해 공생하려는 생태주의의 마음은 가상하나 동일한 지위와 동일한 역할은 다른 영역인데 이건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유시민 작가가 <나의 한국현대사> 개정판을 내고 온라인 북토크를 몇 차례 했는데 그중 페미니스트 작가와 나눈 문답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묻는 내용인데 유 작가가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니 '휴머니즘 주의'는 진영 내부에서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라는 거다. 이유는 인간중심주의이기 때문이라는데 그에 유 작가가 그렇게 보는 건 협소한 의미이고 자신이 말하는 휴머니즘은 보다 광의적인 의미라고 대답한다. 예로, 진영이 주장하는 다양한 표어에 '여성'대신 다른 무엇을 넣어도 성립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도 두셰이코는 점성학에 심취했는데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변화를 별자리 영햑력으로 해석한다. 어차피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두셰이코는 제자인 디지오라도 설득하려고 열심히 점성술 얘기를 한다. 사실 이런 심리는 두셰이코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겐 원래 자기가 관심 있는 주제를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는 본성- 공감욕구가 있다. 하지만 선하고 인내심이 강한 제자도 스승의 끝이 없는 별자리 얘기에 결국 지친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베르길리우스가 말했죠. 점성가들에게 목을 끔찍하게 뒤트는 형벌이 내려졌다고요."

참다 못한 디지오가 나의 장황한 설명을 멈추기 위해 말했다.


-p.176,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만약 이 장면이 없었다면 나는 토카르추크가 점성술 광신도인가 오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펼쳐지는 기승전점성술에 직전까지 나는 작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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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

그때도 노래가 불릴까?

그때도 노래는 불릴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한 노래가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브레히트의 배경을 알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그리 서정적인가.

 

브레히트는 시론에서 서정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다.


*킨예브레히트를 지칭 


얼마 전 시인 킨예가 이러한 시기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써도 되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써도 된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를 썼는지 물어보았지요. 그는 못 했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어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드는 것을 내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몇 줄을 끄적거리면서도 나는 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를 모든 사람을 위해, 즉 비 오는 날 비를 피할 잠자리를 찾아다녀도 집도 절도 없어 빗방울이 그의 옷깃과 목 사이로 그대로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나는 그만 움츠러들었어요.”

예술이 오늘의 상황만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언제나 빗방울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서정을 노래하는 시가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짐짓 이렇게 떠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만약 옷깃과 목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면 그런 시가 쓰일 수 있겠지요.”

 

-pp.14-15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도 같은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칠장이화가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지칭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히틀러의 나치를 피해 브레히트는 가족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유럽과 미국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잃은 브레히트는 평생을 살아남은 자신을 의식하며 살았으며 <살아 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자조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신이 시를 쓰는 동력은 분노라던 브레히트의 강변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브레히트로 하여금 서정시를 쓰게 했을까.

고작 빗방울로도 이토록 마음을 수런거리게 하는 브레히트의 분노라니...

 

다시,

실존주의 작가 브레히트의 시는 어쩌면 이리 서정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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