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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평점 :
'아프락사스'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세상에 툭 던졌던 '헤세'와 '여행'이라니, 처음 헤세의 신간 제목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상적인 조합이구나' 였다. 그리고 책을 펼쳐 그의 여행지를 확인하는 순간 웃고 말았다. 아, '인도'다. 헤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왠지 오리엔탈리즘을 느끼곤 했는데 이게 영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편, 내가 가진 작가의 배경이 이렇게 빈약했다니 하는 자괴감을 넘어 내가 한창 헤세의 소설을 읽어대던 때만 해도 헤세의 책이라고는 오직 소설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내 독서환경이 참 열악했구나, 뒤늦게 억울한 생각도 들고.
헤세의 소설은 대개 작가의 고백적 혹은 체험적인 인상을 받는데 이는 헤세의 소설이 대부분 성장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을 헤세의 소설과 보내고 한참이나 뒤늦게 헤세의 에세이 그것도 여행에세이를 펼치면서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의 감성적 배경에 영향을 미쳤을 작가 내면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겠구나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헤세의 저작 중 에세이로는 처음인 <헤세의 여행>을 펼친 직후의 첫 인상이 당연하달까 아이러니하달까 '헤세다움'이다.
가끔 말하는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데 말하자면 헤세는 두 목소리가 같은 유형의 작가인 것인지, 읽기 시작한 직후부터 밀려드는 이 낯익고 친숙한 반가움을 어찌하면 좋을꼬. 조곤조곤 수줍은가 싶으면 감각적이고, 반짝이는가 싶으면 소박한 문장들이 주는 기시감은 어느 모로 보나 헤세의 문장이다 싶다. 이를 테면 이런 문장들.
나는 여관 집 딸에게 반한 어느 시골 총각과 권투 경기를 함으로써 그곳에 오랫동안 있지 않았지만 - 두 시간 정도 있었다- 아담한 소도시 초핑겐을 잊을 수 없다. 바덴 풍의 마을 블라운 남쪽에 있는 매력적인 마을 함머슈타인은 내가 언젠가 밤늦게 오랫동안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극히 우연히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지붕과 골목이 그토록 분명하고 아릅답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 - p.40, 본문
내게만 국한된 얘기일수도 있지만 헤세의 소설은 읽고 나면 제목 옆에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부제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게 든다. 그건 에세이인 이 책 <헤세의 여행>도 마찬가지인데, 에세이임에도 매 편이 끝날 때면 감정이 찌꺼기처럼 남는 여운이 예전에 헤세의 소설 한 권을 읽은 직후 느꼈던 감동과 흡사하다. 사실 1부를 시작하는 '1. 여행에 대하여'와 마지막 '7부 뉘른베르크 여행'을 제외하면 적절한 제목까지 달고 있는 매 편은 마치 단편을 읽는 기분이 든다. '여행'이라는 분명한 동기를 지향하는 에세이임에도 매 편이 완벽한 이야기의 완결성을 가진 탓에 '여행지에서'라는 공통 주제를 가진 수 십 편의 단편선집을 읽은 것 같은, 기대하지 않았던 포식을 실컷 즐긴 포만감을 준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한결같이 좋으니 더 말해 뭐할까.
너무 흔해 이젠 식상한 표현이 됐지만 '정신을 살찌운다'는 말은 결국 외부, 그러니까 우리 정신의 바깥에 있는 (인공이든 자연이든)사물로부터 받은 인상이 사고(思考)하라고 이성을 자극하는 전기적 자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기적 자극은 당시에 즉각적으로 올 수도 있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날 기습처럼 올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인간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기적 자극의 가장 전방위적인 형태의 극적인 예가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여행자에게 시각적, 감각적 자극을 주고 그러한 체험은 여행자에게 일종의 스키마(schema)를 남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헤세의 소설은 헤세의 여행이 헤세에게 남긴 스키마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에게 삶과, 내면의 성찰과, 세상은 어쩌면 그 자체로 하나의 문을 통해 드나드는 긴 여정이지 않았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