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조선조 27명의 왕 중에 독살설이 도는 왕이 여덟이라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왕이 아마 정조일 것인데 정조만큼이나 유명한 독살설의 주인공이 바로 소현세자다. 조선조를 거쳐 간 수많은 세자들 중 유독 소현의 이름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건 그의 죽음에 얽힌 의혹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전쟁에 패한 인조가 치욕적인 3배9고두(三拜九叩頭)를 하고, 두 세자를 청에 인질로 보내야 했던 치욕 때문에도 그렇지만, 9년에 걸친 볼모 생활 끝에 조선의 궁으로 돌아온 지 불과 2달여 만에 비명횡사한 왕세자 소현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역사로 남았다.
그럼 누가 소현을 죽였는가. 소현은 왜 죽었는가.
기록은 세자의 사망 원인을 학질이라고 남겼으나 세자의 사후에 처 강빈을 비롯하여 어린 두 아들이 유배지에서 차례로 사망함으로써 세자의 죽음에 숱한 의혹을 남기게 된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에 흥미를 가지고 책을 펼친다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를 소설『소현』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세자가 인질의 신분으로 보냈던 심양에서의 9년, 그 중에서도 마지막 2년에 집중한다. 또한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것도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독백은 이 소설을 역사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으로 읽히게 한다.
소설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
이는 김훈이 소설『남한산성』에서 한 말이다. 그것이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의 걱정이든 허세이든 막상 읽는 입장에선 실재하는 사건, 실재하는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이 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인물의 대사는 육성으로, 인물의 처지는 기록으로 매 순간 그것의 사실성을 드러내는데 그 앞에서 제아무리 "이건 그저 소설이야", "이건 역사적 기록에 작가의 상상을 덧붙인 얘기일 뿐이야" 해본들 그 뿐인 것이다.
그럼 역사소설에서 인물과 기록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김훈이 충고한 대로 이 소설을 소설로만 읽고 싶다면 소현이나 봉림, 심기원 등의 실존인물보다는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 만상과 막금에게 집중하며 읽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사실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애틋한 애정이 느껴지는 인물이 만상과 막금이었다. 조선을 떠나 변발을 하고 청인 행세를 하며 역관 노릇으로 먹고 사는 만상은 흔히 하는 말로 좋은 놈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을 등쳐먹고 사는 나쁜 놈 중에 나쁜 놈이다. 그리고 막금은 전란 통에 미처 신 내림을 받지 못한 무녀 아닌 무녀다. 더 오를 곳이 없는 소현세자와 달리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이가 이들 두 사람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두 사람은 대하면 대할수록 연민이 솟구친다. 어떡하든 살아남으려는 만상과 이제 그만 죽여 달라 애원하는 막금은 동장군이 점령한 황무지 아래 숨죽인 씨앗처럼 질기고 질긴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서로를 혹은 자신을 믿지 못하여 외로운 자들이다.
특히 소설의 중심에 있는 세자는 임금이 아들인 자신을 위하여 울어줄 것인가 번민하고, 석경이 자신의 편인가 아니면 적인가 믿지 못하여 외롭고, 봉림이 아직 자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구나 헤아리기 위하여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세자를 가장 외롭게 하는 이는 바로 아버지 인조다.
임금의 반정은 명의 재조지은을 잊은 광해를 내몬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임금의 자리가 거기에 있었으니, 임금이 수백 번 수천 번 적의 황제 앞에서 이마를 찧는다 하더라도, 임금이 명나라를 받들어 임금이 되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임금을 임금의 자리에 올린 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 그러나 명을 등지면 남는 것이 없었다. 광해를 치면서 씨를 말리듯 내몰았던 광해의 정파가 다시 일어선다면, 그들에게 돌아올 것은 한때 광해의 정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멸문과 죽음뿐이었다. - pp.160-161,『소현』
정리하면,『소현』을 나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읽었다.
1. 화자의 내밀한 독백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과 인물의 관계
2. 독특한 문장 구조에서 드러나는 개성적인 문체
문제는 2의 문체인데, 작가는 작가의 기존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문체를 이번 소설에서 보여준다.
『비평과 진단』에서 들뢰즈는「H.멜빌의 바틀비」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I would prefer not to'를 두고 비문법적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사의 상투성을 강조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사실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였는데 국내 작가 중에 비문법적 구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쓰는 이가 바로 김훈이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남한산성』
김훈을 김훈이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은 압축된(혹은 응축된) 단문 혹은 복문과 역설적인 어법으로 완성되는 문체에 있다. 한편 단문과 달리 장문은 역설적인 구조 탓에 중언부언이 매우 잦은데 그럼에도 문장이 수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내공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칼의 노래』, 김훈
말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소현』, 김인숙
『칼의 노래』서문에서도 밝혔지만 김훈은 조사 선택에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데 '꽃은'과 '꽃이'의 사이에서 고민한 산물이 위의 문장이다. 인용한 문장에서도 드러나지만 김훈의 단문은 칼로 자른 단면마냥 딱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 인용한 문장은 모두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김인숙의 신작을 읽으면서 김훈을 떠올리는 것은『소현』이 내용상 김훈의 장편『남한산성』을 잇는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문체의 유사성 탓이 크다. 그런 점에서 김훈의 문체가 버겁게 느껴졌다면『소현』은 김훈식 문체를 한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꼭꼭 씹을수록 단 맛이 도는 그리고 소화가 잘 되는 잘 지은 잡곡밥 같은 소설. 이것이『소현』을 읽고 난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