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닥치는 불행은 이겨내야 하는 법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있었다. 나는 파나마로 가기로 했다. 산토스와 카날 사이는 육로로 대략 4천 킬로미터의 거리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길을 만들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별로 멀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이다.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요즘 읽는 책들에는 행복한 주인공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행복하다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은 없는 거니까. 사람들은 불행에 더 끌리는 법이다. 나는, ...이야기에 끌린다.

기행문이자 자전적 소설인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는 길 위에서, 낯선 길 위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으로 남미라는 이름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주인공은 '나'이지만, 진짜 이야기는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시작된다. 마을을 찾아 밀림을 4개월간 헤매던 남매가 통정을 하고, 카톨릭 신부는 벌거벗은 원주민 여자들에게 홀려 다섯 아이를 낳고, 키가 너무 큰 시체를 운반하기 위해 경비행기 문짝을 뜯어내고 저공비행을 시도한다. 나치를 위해 싸웠던 과학자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으며 노벨상도 포기하고 틀어박혀 삶을 마친다. 길 위에서 넘쳐났던 그 무수한 이야기들을 몰스킨moleskin 노트에 기록하는 세풀베다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주인공이 책 내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여행자들만이 느끼는 특유의 정취에 대한 묘사 부분이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아, 어디까지나 고생하는 여행자들 얘기이긴 하지만.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묘사들이 있는 것이다.

라 키아카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었는데,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안데스의 싸늘한 냉기가 혹독하게 안겨 들고 있었다. 나는 배낭을 열어 외투를 걸칠까 했으나 발걸음을 놀리다 보면 온몸에 훈기가 발산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를 찾아 총총걸음으로 내달았다.

호텔의 침대는 숫제 냉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어쩌면 밖에서 이미 냉기에 젖은 탓일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온기를 모으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행에서 오는 피곤함에 노인과 함께 다섯 병이나 비운 포도주로 인해 취기가 겹치고 있었지만 기차를 놓칠까봐 잠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담배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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