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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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쪽,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면.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낯모르는 타인들의 일기를 읽으며 내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 주는 걸까? 마치 세상이 나를 잘 알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북트리거

하루라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손가락에 가시가 돋고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나갈 때도 주머니에 수첩과 펜을 챙겨야 하는 일기 분리불안증을 30년 넘게 앓고 있는 내가, 작년 가을 '일기'를 주제로 한 고요서사 문체연구반에 참여한 건 뻔한 클리셰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일기를 읽고 자신이 쓴 일기를 공개하고 오직 일기 얘기만 하는 행복한 시간...! 을 주관한 금정연 작가님은 하루종일 일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아마?) 인간 일기이자 일기의 인간화로, 초록초록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 초록초록한 일기책을 출간하고야 말았다.


일기의 일기, 일기의 읽기, 금정연 작가님 본인의 일기이자 다른 작가의 일기를 인용한 일기 읽기이자 일기에 대한 고찰이 담긴 일기는 지금까지 책으로 출간된 타인의 일기를 실컷 읽고 즐길 수 있는 일기의 서적화로...일기는 원래 책이 맞긴 한데? 다만 보통의 인간인 우리는 일기를 쓸 때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쓰진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쓰는 글쓰기가 일기다. 내 일기의 독자는 오직 나 한 명 뿐이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이고 고독의 끝판왕일 일기 쓰기를 우리는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초등학생 때 숙제로 꼬박꼬박 쓴 일기 쓰기의 습관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자기계발적 사고관의 채찍질일까, '내가 아는 최고의 핑계'(270쪽)일까.


-42쪽, 잘은 몰라도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때때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이라도 어떤 종류의 답은 있게 마련이라고, 비록 그게 내가 바라거나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결국 나는 열심히 자라서 겨우 내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있다는 확신을 문장으로 옮겨 두 눈으로 똑똑히 읽고 싶은 마음이 매일 일기를 쓰게 한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발등에 불이 활활 붙은 나날이 이어지는데 몸은 너무 피곤하고 아이는 계속 자라고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아플 때 그는 일기를 썼다. 지금도 쓰고 있다(아마도?).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어쩌다 읽게 된 이 책이 당신을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아마...도). 세상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뭐라도 쓴다. 이 글도 뭐라도 쓴 결과물이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면.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낯모르는 타인들의 일기를 읽으며 내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 주는 걸까? 마치 세상이 나를 잘 알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P269

잘은 몰라도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때때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이라도 어떤 종류의 답은 있게 마련이라고, 비록 그게 내가 바라거나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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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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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쪽, 내가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소설을 쓰면서 계속해서 시달리게 되는 또다른 한 가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저항할 생각이 없고 되도록 저항하지 않는, 말을 가장 무용한 방식으로 쓰고 싶은 유혹 때문이고, 나는 말을 유용하게보다는 무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고 무용하게 사용할수록 더 흥미롭기도 하고, 이 소설은 말을 얼마나 무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보는 것이기도 하고,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소설에도 삶에도 핵심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옆으로 새는, 아무런 핵심이 없는 하나마나 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길게 하다보면 때로는 생각 자체가 없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되며 일종의 명상 상태에 들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런데, 라는 이 단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고 별로 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래서 무시해도 좋을 것 같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접속부사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꽤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까지 얘기할 것은 없는 것 같고, 그런데 나는 약간의 정신적 자유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칭으로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옆으로 새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칭을 과도하게 하는 것으로, 그 부작용으로 정신과 몸이 뻐근해지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나는 이 소설을 집 앞 한강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읽기 위해 챙겼는데, 이 소설을 읽다가 한 문단이 한 문장인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문장의 강물에 빠져 흘러가다보면 책 내용이 아닌 내 생각에 빠져 곁길로 새게 되는데, 서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하기엔 정영문의 소설은 서사랄 게 없고 핵심이 없고 도무지 주제랄 게 없어 보이는 애매모호함이 싫은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영문의 강물을 탈출하겠지만 나는 기꺼이 소설의 강물에 몸을 담가보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아닌 딴생각에 빠진 내 모습을 작가가 흐뭇하게 바라보지는 않겠지만, 본인이 본문에서 권유한 정신적 스트레칭을 정석으로 하는 독자를 귀여워하는 마음은 조금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서사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는게 작가이자 주인공인 나는 캐나다 벤쿠버에 갔고, 벤쿠버 해안에 떠내려오는 인간의 발에 대한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있고, 티라미수의 기원에 대한 탐구가 있고, 오므라이스와 오믈렛의 차이에 대한 연구 혹은 거대한 호박에 대한 고찰 혹은 프랑스 브르타뉴의 기억 혹은 캐나다에서 실종된 수입 낙타 혹은 야쿠자 혹은 예술가 혹은 19세기 소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앞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소설을 뒤적이며 눈에 보이는대로 주섬주섬 집어넣어 보았는데, 이 독후감을 아무도 읽지 않겠지만 혹 읽게 된다면 도대체 저 소재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만 있다면 꼭 본문을 읽어보라고 할 수 있고, 말을 가장 무용한 방식으로 쓰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옆으로 새고 또 새는 소설을, 핵심이 없는 소설을,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 속에서, '소설에도 삶에도 핵심이 없다'는 주제를 기어코 뽑아내 가지고 가는 주입식 문학 교육을 받았고 고대로 그런 교육을 하는 습관이 나와버려 작가의 의도에 벗어난 독서를 한 기록을 여기에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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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비치
레이철 요더 지음, 고유경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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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이트비치]는 밤의 해변, 이 아니라 밤의 개(같은) 년nightbitch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을 암캐로 지칭해 비하하고 모욕하는 유서 깊은 욕설 '비치'를 씹어 삼켜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날것의 이야기다. 소설 1부의 '여자'는, 예술가인 여자, 아들을 낳고 남편보다 소득이 적어 예술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된 여자는, 밤새 칭얼거리는 아들과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남편을 향한 분노에 휩싸인 어느 날 밤 '나이트비치'가 된다. 문자 그대로 커다란 개로 변해 한밤의 산책, 아니 사냥을 한다. 나를 개 같은 년이라고 해? 그래, 나는 진짜 개야. 단숨에 네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동물이야.


-139쪽, 여자는 개가 된다는 생각이 좋았다. 짖거나 으르렁거릴 수 있고, 그것을 정당화할 필요도 없으니까. 원한다면 자유롭게 달릴 수도 있다. 그녀는 몸이 될 수도 있고, 본능과 충동이 될 수 있다. 배고픔과 분노, 갈증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가슴이 두근대는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여자는 아들을 출산할 때 그런 자유를 누렸다.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욕을 퍼부었고,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레이철 요더, 나이트비치, 황금가지


나이트비치는 본래적 의미의 모성이다. 출산은 본래 동물적이다. 인간이 몸이 되는 순간, 피와 땀과 체액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짐승과 같은 비명이 난무하는 과정이다. 동물이 된 여자의 모습에 겁에 질린 남자들은 서둘러 모성을 신화화하여 여자를 거기 가둔다. 깨끗하게 관리되는 외모와 반짝거리는 집안, 점잖은 아이, 육아와 집안일에 본인을 동일시하며 자아를 잃은 인형과 같은 여자가 진짜 엄마라고 칭송한다. '여자들이 모든 일을 떠안게 하는 속임수,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속임수가 되었는지 말이다(31쪽)' 여자는 속임수를 알아챈다. 여자는 분노를 느낀다. 여자는 나이트비치가 된다.


-279쪽, 예술가이자 여자이자 괴물 엄마가 되고 싶다. 괴물이 되고 싶다.


여자는 나이트비치가 되고, 아이는 나이트비치가 된 엄마를 기꺼이 따라 자신도 개가 되고, 개가 되는 놀이에 열중하고, 남편은 점점 변화하는 여자를 보며 당황하고 끝내 매혹된다. 개가 된 여자가 느끼는 새로운 감각들을 세밀한 묘사를 통해 따라가다 보면 나이트비치가 우리 눈 앞에 나타난다. 여자는 다른 여자들 앞에서 나이트비치로 변신한다. 변신은 하나의 행위 예술이 된다. 여자는 예술을 되찾는다.


나이트비치는 왜곡된 모성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죽은 토끼와 날고기가 내뿜는 피와 야성과 죽음의 냄새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나이트비치는 자신이 사냥한 동물을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물려준다. 모성은 동물이다. 나이트비치는 예술이다. 우리는 나이트비치다. 무서운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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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한 예술가의 초상 - 막심 뒤 캉론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이승준 옮김 / 비고(vigo)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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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하다(형) :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하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겐 낯선 일본 작가가 쓴, 막심 뒤 캉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19세기 프랑스 작가를 다룬 평전을 읽게 된 이유가 있다면? 제목의 '범용한'이 눈에 들어와서, 책 소개글에 인용된 본문 내용에 눈이 뜨여서, 결과적으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에 등극했다는 기쁜 소식.

-72쪽, 1850년이라는 시대는 재능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마치 문학이 자신의 천직임을 주장하듯 고지식한 태도로 문학의 숙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최초의 세대를 탄생시켰다. 자질과 재능에 못 이겨 문학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범용한 존재에게도 허락된 민주적인 특권이자 의무라 믿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자의 고립감은 이제 현실로서 살아있는 가혹한 체험이 아니라 널리 공유된 환상으로서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쾌적한 환경이 되었다.

책에서 다루는 막심 뒤 캉은 누구인가? 시와 소설을 썼고 사진이 실린 여행기를 최초로 출간한 사진가이자 여행 작가, 도시론을 집필한 저술가, 문예지 편집자, 무엇보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로베르가 어떤 소설가인지 잘 알고 그가 쓴 [보바리 부인]을 지금까지 읽으며 근대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고전이라 칭송한다. 막심 뒤 캉의 책은 대부분 절판되었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소설가로 태어나 소설을 쓴 예술가다. 막심 뒤 캉은 소설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소설을 썼고 작가로 타고나지 않았으나 일흔의 나이로 사망 직전까지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글을 쓰고 발표할 플랫폼이 넘쳐나고 혼자서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낼 수 있는 지의 민주주의 시대, 소설가로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다. 그 시작점을 이 책은 19세기 중반, 막심 뒤 캉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가로 '날조된다'.

-179쪽, '예술가'란 결코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엄밀하게 역사적인 존재다. '예술가'는 1851년 즈음에 대거 출현한 수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원한 아름다움 따위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렇다면 막심도 그 중 한명인 '예술가'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그들은 모방해야 할 모델 없이 갑작스럽게 생산된다. 즉 스스로를 날조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예술가의 개념이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에 떠밀리는 줄도 모르고, 소설가와 시인의 재능이 없음에도 성실하게 소설과 시를 썼던,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 수많은 책을 쓴, 플로베르의 재능을 질투한 '범용한' 인물로만 남아버린 막심 뒤 캉은 그 자체로도 '소설적인' 인물이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예술가로 상상하며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의 일생은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며 끝내 실패하고 마는 소설적 주인공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학술서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범용한 인물에게 나 자신을 투사해 깊이 감정이 이입된 상태로 읽게 되기 때문일수도 있다.

문학사는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뿐 막심 뒤 캉과 같은 범용한 예술가에겐 이름 하나 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플로베르가 아닌 막심 뒤 캉이다. 우리는 평범하다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대체로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범용한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범용함을 되새기고 연구해야 한다. '범용하다'는 단어가 특별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은 해내고야 만다. 그것조차 전형적인 해석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범용한 독서 감상문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나 자신도 범용하다고 쓰면서 범용함의 범용함에 대하여 반복하는 문장은 끝이 나질 않고...

-73쪽, 자신을 예외적이라 믿으면서도 전형적임을 그만두지 않는 막심. 그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인 '예술가'이다.

-138쪽, 일단 범용한 예술가란 바로 그러한 거리의식과 방향감각을 가지고 자신이 무언가를 대변하면서 예언할 수 있는 예외적인 비범함을 지녔다고 확신하는 존재다, 라고 정의해 두자.

-273쪽, 어쩌다 주변에서 발생한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을 사회적인 불행으로 확대시켜야 할 것처럼 느끼는 보잘것 없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보잘것 없는 전략. 이것이 근대소설이라 불리는 담론의 진짜 모습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19세기 중엽 이래로 이 보잘 것 없는 전략의 초라함을 은폐함과 동시에 그 초라함을 착각으로 확대시키려는 시도가 펼쳐지는 불확실한 환경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637쪽, 사람은 누구나 둘 또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아니 생활이란, 서로 모순되는 설화론적 이야기들에 동시에 몸을 맡기면서 그때그때 각각의 이야기를 끝맺음 없이 다른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과도 같다. 자기자신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단정짓거나 또는 타인에게 그러기를 요구하는 것은 삶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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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변이 -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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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요즘 종이를 찢는 행위에 재미를 붙여 자기 방 안에 꽂아 둔 그림책이란 책은 다 찢어버리는데, 어느 날 식탁 위에 올라온 엄마의 책을 발견했고 책 표지가 종이로 되어 있어 힘을 크게 주지 않아도 쭉 잘 찢어졌는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아온 엄마는 반쯤 찢어진 표지를 보고 크게 화를 냈고 아이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는데, 그렇게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불안의 변이]는 불안한 표지를 불안하게 달고 제목과 어우러진 리미티드 에디션이 되어버렸는데.


리디아 데이비스라면 자신의 작품집 표지가 찢어진 일련의 사건만으로 글 한 편을 뚝딱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툰 번역투로 평전을 쓴다는 아이디어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마리 퀴리, 너무나 고결한 여인), 초등학생들이 병으로 입원한 같은 반 친구에게 쓴 위문 편지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글을 쓰는 흥미로운 사람이기에(보고 싶다: 4학년 어느 반 학생들의 위문 편지 연구), 보통의 단편소설부터 단 한 줄로 된 작품까지(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는 딱 한 줄이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리디아 데이비스 뿐. 그는 세상 모든 것으로 글을 쓴다. 그의 글은 세상 그 자체다.


우리가 어떤 사상가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것을 더욱 명료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제 막 생각하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지면 우리가 머지않아 생각하려는 것을, 또는 우리가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훨씬 나중에 생각할 것을, 또는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또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었을 테지만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디아 데이비스, 친밀감 전문, [불안의 변이], 봄날의 책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는 우리를 당황시킨다. '이게 뭐야?' 작가에게 최고의 찬사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게 뭐야?'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면서 한 편의 철학적 성찰에 이를 수 있는 글쓰기(당신이 아기에 대해 배우는 것), 광고 이메일 한 줄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 이게 글이야? 이것도 글이다. 나는 방금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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