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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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잡문'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내가 젊은 시절에 루쉰의 잡문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또래와 내 선배들 세대에게 루쉰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루쉰은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고 했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등 루쉰 잡문집이 여러 형태로 나와 있다. 그러나 루쉰의 잡문이란 그냥 잡문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시작해 사상의 담론에까지 이르는 글이다.

옛 문인들의 문집을 읽을 때도 나는 시, 논, 소, 차, 서, 서, 척독 등 정통적인 글쓰기보다도 대개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잡저를 눈여겨보았다. 잡저에는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엔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답사기'라고 해놓고 이 소리 저 소리 다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런 잡저와 잡문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에 나의 산문집을 아예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 이름 지었다.

유홍준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창비

서문에서 밝히는 대로 저자가 살아 온 인생만사가 다 들어있는 잡다한 글, 그런데 그 저자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인,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글의 완성도와 신뢰도가 보장된다는 건 크다. 기념비적인 교양 시리즈가 된 답사기의 역사적인 첫 권이 '남도답사 일번지'였고, 전라남도 장흥 출신인 아버지는 행복한 얼굴로 우리 가족을 차에 태워 고향으로 향했고, 아버지의 가방 안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당연하게 들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도 재미있게 술술 읽혔던 답사기가 품고 있던 힘은 강력했다. 책에 부록으로 실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력서'를 읽고 나면 오랜만에 답사기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진다. 일단 이 잡문집을 읽는다. 잡문집도 너무나 재미있다. 잡문집은 원래 재미있다. 한국의 봄꽃을 이야기하는 '꽃차례'나 바둑의 사례로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 '바둑 FTA', 아재 개그의 진수 '문화재청장의 관할 영역'은 재미있고, 답사 여적과 인연이 있었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 챕터는 전체가 아름답다. 부록의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과 '나의 문장수업'은 수식어를 더 붙일 필요조차 없는 글이다. 글쓰기 조언은 전국의 학교 글쓰기 시간에 가르쳐야 한다. 이미 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긴 하지만..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꼭 글을 잘 쓴다고 할 수는 없다.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교도소에 복역하고, 출역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취업하고, 한국미술 평론가로 등단해 한국미술 강의 및 답사를 이끌다 제안을 받아 답사기를 쓰게 되고,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되고, 문화재청장에 취임하고,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열심히 읽고 쓰고 답사하고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강의하고 이 모든 일들을 다시 또 글로 남긴다. 그렇게 쓴 잡문이 또 너무 재미있다.

작가님은 친절하게 15가지 항목으로 좋은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조목조목 달아 주셨지만, 글재주 없는 형편없는 제자로서 '이 책 너무 재미있고 훌륭합니다!'를 최대한 늘린 게 이 글이라 송구합니다. 저는 다시 '남도답사 일번지' 읽으러 떠나봅니다 총총-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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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 책세상 세계문학 2
안네 프랑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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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쪽, 나 외의 누군가가 미래에 이 일기를 읽을까? 나 말고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과연 생길까? 나는 너무나 자주 위로가 필요해.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아. 삶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보다 과한 것을 많이 요구해. 나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매일 스스로를 새롭게 단련하려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1943년 10월 30일 일기)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무럭무럭 자라 30대 후반의 여성이 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건, 학교 숙제로 일기 쓰기를 해야 했고, [안네의 일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축약본으로 편집된 [안네의 일기]를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내 일기장도 키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키티, 나는 오늘 안네의 일기를 읽었어, 그러고 보니 네게도 이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안네를 따라 키티라고 불러 볼게...라고 쓰지는 않았을 텐데(아마?), 지금까지 일기를 쓰는 건 사실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충격 속에서 관람한 뒤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서 [안네의 일기]를 꺼내 읽었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안네의 일기 출판 당시 편집했던 내용을 전부 복간하고, 추가로 발견된 다섯 장의 글까지 포함된 완전판으로 심지어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님이라 놀라워하며 구입한 판본이다. 읽으면서 더 놀랐다.


열세 살 생일을 맞이해 일기장을 선물로 받아 일기를 쓰기 시작한 안네, 은신처에서 2년 넘게 숨어야 했던 안네, 민감한 사춘기 시기에 가족과 타인과 하루 종일 붙어 지내야만 했던 안네, 엄마와 다르게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안네, 작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안네, 어떤 비극 속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말하는 안네는 어린 시절 읽은 안네와 달랐다. 독자인 내가 달라진 것일 테고, 완전판으로 전해진 일기 속 생생하게 되살아난 안네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그녀가 끌려갔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리와 연기의 어둠을 영화 속에서 느끼고 온 뒤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더 크게 느끼는 것도 있겠고.


-298쪽, 이 세상의 모든 근심에는 최소한 한 가지씩의 좋은 일이 깃들어 있어. 그걸 발견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거야. 행복한 사람은 타인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단다. 용기와 신뢰를 잃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야!(44년 3월 7일 일기)


그녀의 용기는 그녀보다 오래 더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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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 보부아르와 넬슨 올그런의 사랑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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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고, 나만의 별명을 붙이고,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한다 말하는 수백 가지의 표현법을 찾아내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조리 꺼내 보여주면서 너도 내게 숨기지 말고 다 말하라 명령하고.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넬슨 올그런에게 보낸 304통의 연애편지에 담긴 말들, 9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이 책은 펼쳐들기만 해도 페이지 틈 사이로 사랑이 쏟아져 독자의 손을 적신다. 편지의 발신자 '나'는 수신자 '너'를 분명 사랑한다.


-32쪽,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낀 기쁨은 사랑이었어요. 이제 고통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지닌 모든 얼굴과 마주해야 해요. 재회의 기쁨,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테고, 그것을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가질 거예요. 절 기다려 줘요. 저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제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아마도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늘 편지를 쓰겠어요. 당신도 그렇게 해 줘요. 저는 영원히 당신의 아내랍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을유문화사


우리는 사랑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기, 몸도 마음도, 어쩔 수 없이 잠시라도 이별하게 되면 온 몸과 마음으로 그리워하기, 재회를 갈망하기, 내가 떠올리는 사랑의 얼굴이란 이것이다. 항상 함께 있기.


나, 시몬 드 보부아르는 너, 넬슨 올그런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계약결혼한 사르트르를 떠날 수 없어.

나는 영원한 당신의 아내야.

하지만, 나는 너와 결혼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 껴안고 밤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나는 파리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고 싶지 않아.


연애편지를 읽으면서 자꾸만 떠오르는 물음표들, '나'는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가? 세상에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355쪽, 일하고 여행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제가 그 모든 것에 지나친 건 아닐까요? 그런데 원래부터 그렇게 생겼는지 미지근하게 일하는 것보다는 아예 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당신을 미지근하게 사랑할 수 없어요, 달링. 그리고 만일 여행하고 일하는 것을 잠시 멈출 수 있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멈출 수 없어요. 그러므로 제 방식대로 당신을 사랑하고, 제 방식대로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어떤 절제도 없이 잠을 자겠어요.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삶은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인식하고 정열적으로 노력했다. 당대 실존주의 작가이자 철학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이라는 독특한 삶의 형식을 창조해 서로를 보완하며 쉬지 않고 글을 쓰고 강연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번역과 각종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낸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를 거부한다. 둘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각자 새로운 사랑을 활발하게 찾아나선다. 보부아르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사랑을 발견한다. 304통의 편지가 사랑을 싣고 바다를 건너갔다. 그는 사랑하고, 넬슨의 청혼을 거절하고, 사랑하고, 불안해 하고,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은 잡초처럼 자라고 있으며, 자라는 걸 멈추지 않고 거목이나 괴물이 돼 버릴까 무서워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합시다.'(309쪽), 헤어지고, 우정으로 이어지고, 불쑥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의 작업을 응원하고, 성공을 축하하고, 애정하고, 위로하고, 넬슨이 보부아르의 책에 자신이 언급된 부분에 분노해 관계를 끊어버릴 때까지 편지는 계속된다.


이 강렬하고 아름다우며 위태롭고 불가해한 보부아르의 사랑은 사랑의 낯선 얼굴이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파리의 작가와 미국의 작가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그가 애쓴 사랑의 방법, 삶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향한 사랑 모두를 지키기 위한 한 여성의 분투를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랑을 거부하고 보부아르만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새로운 사랑을 창조한 노력이 비록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사랑이란 끝이 없는 것이기에 사랑의 과정 전체가 사랑이다.


-536쪽, 우리의 진정한 삶 속에 사랑이 살아갈 수 있게 합시다.


우리는 사랑의 어떤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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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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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쪽,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면.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낯모르는 타인들의 일기를 읽으며 내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 주는 걸까? 마치 세상이 나를 잘 알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북트리거

하루라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손가락에 가시가 돋고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나갈 때도 주머니에 수첩과 펜을 챙겨야 하는 일기 분리불안증을 30년 넘게 앓고 있는 내가, 작년 가을 '일기'를 주제로 한 고요서사 문체연구반에 참여한 건 뻔한 클리셰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일기를 읽고 자신이 쓴 일기를 공개하고 오직 일기 얘기만 하는 행복한 시간...! 을 주관한 금정연 작가님은 하루종일 일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아마?) 인간 일기이자 일기의 인간화로, 초록초록한 새싹이 돋아나는 봄 초록초록한 일기책을 출간하고야 말았다.


일기의 일기, 일기의 읽기, 금정연 작가님 본인의 일기이자 다른 작가의 일기를 인용한 일기 읽기이자 일기에 대한 고찰이 담긴 일기는 지금까지 책으로 출간된 타인의 일기를 실컷 읽고 즐길 수 있는 일기의 서적화로...일기는 원래 책이 맞긴 한데? 다만 보통의 인간인 우리는 일기를 쓸 때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쓰진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쓰는 글쓰기가 일기다. 내 일기의 독자는 오직 나 한 명 뿐이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이고 고독의 끝판왕일 일기 쓰기를 우리는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초등학생 때 숙제로 꼬박꼬박 쓴 일기 쓰기의 습관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자기계발적 사고관의 채찍질일까, '내가 아는 최고의 핑계'(270쪽)일까.


-42쪽, 잘은 몰라도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때때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이라도 어떤 종류의 답은 있게 마련이라고, 비록 그게 내가 바라거나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결국 나는 열심히 자라서 겨우 내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있다는 확신을 문장으로 옮겨 두 눈으로 똑똑히 읽고 싶은 마음이 매일 일기를 쓰게 한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발등에 불이 활활 붙은 나날이 이어지는데 몸은 너무 피곤하고 아이는 계속 자라고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아플 때 그는 일기를 썼다. 지금도 쓰고 있다(아마도?).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어쩌다 읽게 된 이 책이 당신을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아마...도). 세상이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뭐라도 쓴다. 이 글도 뭐라도 쓴 결과물이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면.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낯모르는 타인들의 일기를 읽으며 내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 주는 걸까? 마치 세상이 나를 잘 알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P269

잘은 몰라도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때때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이라도 어떤 종류의 답은 있게 마련이라고, 비록 그게 내가 바라거나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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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한 예술가의 초상 - 막심 뒤 캉론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이승준 옮김 / 비고(vigo)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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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하다(형) :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하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겐 낯선 일본 작가가 쓴, 막심 뒤 캉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19세기 프랑스 작가를 다룬 평전을 읽게 된 이유가 있다면? 제목의 '범용한'이 눈에 들어와서, 책 소개글에 인용된 본문 내용에 눈이 뜨여서, 결과적으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에 등극했다는 기쁜 소식.

-72쪽, 1850년이라는 시대는 재능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마치 문학이 자신의 천직임을 주장하듯 고지식한 태도로 문학의 숙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최초의 세대를 탄생시켰다. 자질과 재능에 못 이겨 문학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범용한 존재에게도 허락된 민주적인 특권이자 의무라 믿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자의 고립감은 이제 현실로서 살아있는 가혹한 체험이 아니라 널리 공유된 환상으로서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쾌적한 환경이 되었다.

책에서 다루는 막심 뒤 캉은 누구인가? 시와 소설을 썼고 사진이 실린 여행기를 최초로 출간한 사진가이자 여행 작가, 도시론을 집필한 저술가, 문예지 편집자, 무엇보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로베르가 어떤 소설가인지 잘 알고 그가 쓴 [보바리 부인]을 지금까지 읽으며 근대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고전이라 칭송한다. 막심 뒤 캉의 책은 대부분 절판되었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소설가로 태어나 소설을 쓴 예술가다. 막심 뒤 캉은 소설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소설을 썼고 작가로 타고나지 않았으나 일흔의 나이로 사망 직전까지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글을 쓰고 발표할 플랫폼이 넘쳐나고 혼자서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낼 수 있는 지의 민주주의 시대, 소설가로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다. 그 시작점을 이 책은 19세기 중반, 막심 뒤 캉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가로 '날조된다'.

-179쪽, '예술가'란 결코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엄밀하게 역사적인 존재다. '예술가'는 1851년 즈음에 대거 출현한 수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원한 아름다움 따위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렇다면 막심도 그 중 한명인 '예술가'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그들은 모방해야 할 모델 없이 갑작스럽게 생산된다. 즉 스스로를 날조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예술가의 개념이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에 떠밀리는 줄도 모르고, 소설가와 시인의 재능이 없음에도 성실하게 소설과 시를 썼던,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 수많은 책을 쓴, 플로베르의 재능을 질투한 '범용한' 인물로만 남아버린 막심 뒤 캉은 그 자체로도 '소설적인' 인물이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예술가로 상상하며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의 일생은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며 끝내 실패하고 마는 소설적 주인공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학술서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범용한 인물에게 나 자신을 투사해 깊이 감정이 이입된 상태로 읽게 되기 때문일수도 있다.

문학사는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뿐 막심 뒤 캉과 같은 범용한 예술가에겐 이름 하나 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플로베르가 아닌 막심 뒤 캉이다. 우리는 평범하다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대체로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범용한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범용함을 되새기고 연구해야 한다. '범용하다'는 단어가 특별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은 해내고야 만다. 그것조차 전형적인 해석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범용한 독서 감상문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나 자신도 범용하다고 쓰면서 범용함의 범용함에 대하여 반복하는 문장은 끝이 나질 않고...

-73쪽, 자신을 예외적이라 믿으면서도 전형적임을 그만두지 않는 막심. 그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인 '예술가'이다.

-138쪽, 일단 범용한 예술가란 바로 그러한 거리의식과 방향감각을 가지고 자신이 무언가를 대변하면서 예언할 수 있는 예외적인 비범함을 지녔다고 확신하는 존재다, 라고 정의해 두자.

-273쪽, 어쩌다 주변에서 발생한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을 사회적인 불행으로 확대시켜야 할 것처럼 느끼는 보잘것 없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보잘것 없는 전략. 이것이 근대소설이라 불리는 담론의 진짜 모습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19세기 중엽 이래로 이 보잘 것 없는 전략의 초라함을 은폐함과 동시에 그 초라함을 착각으로 확대시키려는 시도가 펼쳐지는 불확실한 환경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637쪽, 사람은 누구나 둘 또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아니 생활이란, 서로 모순되는 설화론적 이야기들에 동시에 몸을 맡기면서 그때그때 각각의 이야기를 끝맺음 없이 다른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과도 같다. 자기자신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단정짓거나 또는 타인에게 그러기를 요구하는 것은 삶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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