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속에서 시인이 죽는다. 죽음-하다.
시 속에서 시인이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새-하다.
시 속에서 시인이 사막으로 간다. 모래-하다.
시인이 시-하다. 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음을 할 수 있다.
죽음 트릴로지를 읽는 시간은 죽음하는 시간이다.
내가 죽고, 엄마가 죽고, 아빠가 죽고, 아기가 죽고, 아기를 낳던 여자가 죽고, 여자가 죽고, 지구가 죽고, 우주가 죽고, 죽음하면 태어날 수 있다.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어 아기가 된 엄마를 낳는다. '엄마가 된 딸은 죽음과 짝이 된다'(597쪽, 산문 '죽음의 엄마') 나는 '죽음한다', 죽는 게 아니라 한다,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죽음 트릴로지는 아주 불편하고 고약하고 냄새나는 불쾌한 책일 것이다. 시작부터 여자가 지하철에서 쓰러져 죽고 아무도 그녀를 신경쓰지 않는데, 죽었는데, 사십 구 편의 시가 한 편마다 죽음하는데,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아니지, 네가 거부하는 건 죽는 거고 우리는 죽음하는 것, 그건 엄연히 다르지, 새가 되는 게 아니라 새하기, 모래되기가 아니라 모래하기, 시하기, 읽기하기, 노래하기, 노래하다가 어색하지 않은 단어인 건 기꺼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기꺼이 죽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
세상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무릎 위에 이 책을 한 권씩 올려놓고 다 읽을 때까지 감시하고 싶다. 죽음을 살아보라고 하고 싶다. 일단은 3천 명의 사람들에게, 허공으로 떠올랐던 삼천 궁녀의 숫자만큼이나, 내 순서는 이천백사십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