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한 예술가의 초상 - 막심 뒤 캉론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이승준 옮김 / 비고(vigo)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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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하다(형) :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하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내겐 낯선 일본 작가가 쓴, 막심 뒤 캉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19세기 프랑스 작가를 다룬 평전을 읽게 된 이유가 있다면? 제목의 '범용한'이 눈에 들어와서, 책 소개글에 인용된 본문 내용에 눈이 뜨여서, 결과적으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에 등극했다는 기쁜 소식.

-72쪽, 1850년이라는 시대는 재능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마치 문학이 자신의 천직임을 주장하듯 고지식한 태도로 문학의 숙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최초의 세대를 탄생시켰다. 자질과 재능에 못 이겨 문학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범용한 존재에게도 허락된 민주적인 특권이자 의무라 믿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자의 고립감은 이제 현실로서 살아있는 가혹한 체험이 아니라 널리 공유된 환상으로서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쾌적한 환경이 되었다.

책에서 다루는 막심 뒤 캉은 누구인가? 시와 소설을 썼고 사진이 실린 여행기를 최초로 출간한 사진가이자 여행 작가, 도시론을 집필한 저술가, 문예지 편집자, 무엇보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로베르가 어떤 소설가인지 잘 알고 그가 쓴 [보바리 부인]을 지금까지 읽으며 근대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고전이라 칭송한다. 막심 뒤 캉의 책은 대부분 절판되었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플로베르는 소설가로 태어나 소설을 쓴 예술가다. 막심 뒤 캉은 소설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소설을 썼고 작가로 타고나지 않았으나 일흔의 나이로 사망 직전까지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글을 쓰고 발표할 플랫폼이 넘쳐나고 혼자서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낼 수 있는 지의 민주주의 시대, 소설가로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다. 그 시작점을 이 책은 19세기 중반, 막심 뒤 캉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가로 '날조된다'.

-179쪽, '예술가'란 결코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엄밀하게 역사적인 존재다. '예술가'는 1851년 즈음에 대거 출현한 수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원한 아름다움 따위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렇다면 막심도 그 중 한명인 '예술가'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그들은 모방해야 할 모델 없이 갑작스럽게 생산된다. 즉 스스로를 날조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예술가의 개념이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에 떠밀리는 줄도 모르고, 소설가와 시인의 재능이 없음에도 성실하게 소설과 시를 썼던,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 수많은 책을 쓴, 플로베르의 재능을 질투한 '범용한' 인물로만 남아버린 막심 뒤 캉은 그 자체로도 '소설적인' 인물이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예술가로 상상하며 성실하게 글을 쓴 범용한 예술가의 일생은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며 끝내 실패하고 마는 소설적 주인공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학술서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범용한 인물에게 나 자신을 투사해 깊이 감정이 이입된 상태로 읽게 되기 때문일수도 있다.

문학사는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뿐 막심 뒤 캉과 같은 범용한 예술가에겐 이름 하나 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플로베르가 아닌 막심 뒤 캉이다. 우리는 평범하다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대체로 평범한 재능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범용한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범용함을 되새기고 연구해야 한다. '범용하다'는 단어가 특별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은 해내고야 만다. 그것조차 전형적인 해석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범용한 독서 감상문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나 자신도 범용하다고 쓰면서 범용함의 범용함에 대하여 반복하는 문장은 끝이 나질 않고...

-73쪽, 자신을 예외적이라 믿으면서도 전형적임을 그만두지 않는 막심. 그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인 '예술가'이다.

-138쪽, 일단 범용한 예술가란 바로 그러한 거리의식과 방향감각을 가지고 자신이 무언가를 대변하면서 예언할 수 있는 예외적인 비범함을 지녔다고 확신하는 존재다, 라고 정의해 두자.

-273쪽, 어쩌다 주변에서 발생한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을 사회적인 불행으로 확대시켜야 할 것처럼 느끼는 보잘것 없는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보잘것 없는 전략. 이것이 근대소설이라 불리는 담론의 진짜 모습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19세기 중엽 이래로 이 보잘 것 없는 전략의 초라함을 은폐함과 동시에 그 초라함을 착각으로 확대시키려는 시도가 펼쳐지는 불확실한 환경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637쪽, 사람은 누구나 둘 또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아니 생활이란, 서로 모순되는 설화론적 이야기들에 동시에 몸을 맡기면서 그때그때 각각의 이야기를 끝맺음 없이 다른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과도 같다. 자기자신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단정짓거나 또는 타인에게 그러기를 요구하는 것은 삶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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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영향력 -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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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쪽, 나는 글을 쓸 때 본능을 따라가는 편이고, 내 충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을 고쳐 쓰고 싶으면, 이걸 고쳐 써봤자 쓸 데도 없다고 되뇌지는 않는다. 그냥 본능을 따라간다. 내가 어떤 일을 한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그 순간에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다.


리디아 데이비스, 형식과 영향력, 에트르


이제니 시인님의 첫 에세이 [새벽과 음악] 출간기념 북토크에서, 같은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인 '말들의 흐름' 다른 책을 집필한 금정연 작가님과 윤경희 작가님이 함께 참석했고, 세 작가님 각각 추천하실 책이 있냐 묻는 독자의 질문에 입을 모아 한 권의 책을 강력 추천하셨다. 그게 이 책이다.


한국에는 아직 낯선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 관련 글을 모인 책 [형식과 영향력]의 부제는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 자신감 넘치는 부제에 걸맞는 독특한 형식의 산문을 창조한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면 봄날의책에서 출간한 작품집 [불안의 변이]를 꼭 읽어보면 된다. 나도 이 작품집에 반했고, [형식과 영향력]을 샀고, 작가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추천한 날 책을 읽었다.


직업적 특성 때문에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건 아니다. 글쓰기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게 하는 좋은 기술이다. 나는 나를 알고 싶어 글을 쓴다. 일기를 쓰고 블로그에 비공개 글을 올리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나 소설을 완성한 뒤 감춘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변을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흘려들을 누군가의 대화를 노트에 기록한다. 수첩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메모한다. 짧은 글 한 줄이 시 한 편이 되거나 소설이 된다.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더 나은 내가 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도 비슷하다.


-256쪽,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독창적이려고 애쓰지 마라. 그보다는 당신 자신에, 당신의 정신에 공을 들이고, 그런 다음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 이것은 스탕달이 한 조언이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재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개성에 공을 들이고 매번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 내가 이 인용구를 어디서 찾았냐고? 내가 가진 [새로운 기본 요리책]에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조언을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맞게 각색한 것을 더 좋아한다.독창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자신을 갈고닦고,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만들고, 공감 능력과 다른 인간 존재들에 대한 이해력을 키우고, 그런 다음 글을 쓸 때는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하라.


리디아 데이비스, 형식과 영향력


스탕달의 조언을 리디아 데이비스 버전으로 다시 쓴 버전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 쓴다면, 독창적으로 살고 싶다면 글쓰기로 나를 갈고닦고,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공부하면서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고, 공감 능력과 이해력을 키우고, 더 나아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말을 글로 써라. 그 글이 곧 내가 되고 나의 삶이 된다.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성장한다. 성장기는 끝나지 않는다. 글을 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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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영향력 -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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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 퍼주시면 남는 게 있습니까? 책 귀퉁이를 하도 접어서 책이 닳아 없어질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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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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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이제니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과 수첩과 만년필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버스를 탔다. 도망치듯 도달한 카페는 작고 포근하고 훌륭한 모서리 자리를 가졌다.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동그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어느 의자에 앉든 벽과 마주보아야 하는 모서리는 편안하게 고일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고여 있던 두 시간에 대해 뭔가 써 보려 노력한다. 뭔가 쓰려 애쓴 시간,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듯 책을 펼쳐 읽은 순간, 칼바람에 베인 두 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흐릿하던 마음이 커피로 또렷해지고 어둠밖에 보이지 않던 눈 앞에 빛이 스치던 기억에 대하여.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때의 시간을 정확하게 되살릴 수 없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죽어가며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느라 여유가 없던 새벽에 우연히 가닿은 음악과 같은 책에 대하여, 나는 설명하려 노력하고 실패한다. 이 글은 이 책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마음에 든다.



-23쪽, 어떤 음악은 눈물처럼 쏟아진다. 군더더기가 될 것이 뻔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불과 몇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처럼. 그러나 문자가 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물성으로. 이 추상적인 물성에 대해, 언어화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늘 명확한 언어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매번 실패로 귀결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는 음악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배음으로 흐르는 음과 색을 언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음 하나 모음 하나를 조합해나가면서 이 티끌의 시간을 모아 음과 색에 언어를 덧입히는 것은 언제나 늘 뒤늦고 허망한 일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말해질 수 없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무엇을, 그럼에도 끝끝내 써나가는 일이란 무엇일까.

새벽과 음악, 이제니, 시간의흐름


-54쪽, 어둠으로 기우는 마음을 전적으로 다 믿지 말고, 그 감정의 결을 보다 세심하고 다정하게 들여다보면서, 어두운 감정에 속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섬세하고도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새벽과 음악,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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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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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쇼펜하우어의 '소품집'을 번역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으며 새해를 시작했다.

올해 끝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이 책이 내게 끼친 영향이 어찌나 크고 깊은지 글 한 편으로 그 모든 생각과 감정과 복잡한 마음들을 담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시간과 공간 바깥에 존재하는 의지,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인간, 삶을 의욕하는 의지, 절대 지치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의지, 세계는 나의 표상, 의지는 표상의 세계를 통해 의지 자신이 삶을 의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지는 지치지 않고 채찍질한다, 원하라, 계속해서 원하라, 욕망하라, 멈추지 말아라...


-236쪽,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력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언제나 의욕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게 하는 인간의 노력과 소망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달성되지마자 더 이상 최종 목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그 때문에 곧 잊히고 폐기되며, 공공연한 것은 아니라 해도 언제나 사라진 착각으로서 무시되고 말 것이다. 소망에서 충족으로, 이 충족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끊임없이 옮겨 가는 유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명을 굳어지게 하는 끔찍한 권태이자 특정한 대상이 없는 김빠진 동경으로서, 숨 막히게 하는 우울로서 나타나는 정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직 무언가 소망하고 노력할 것이 남아 있을 때가 그래도 제일 행복한 법이다. 이때 소망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행복이라 불리고,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고통이라 불린다. 이 모든 사실에 따르면, 의지는 인식의 빛으로 조명되는 경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늘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즉, 모든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모든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이때 이곳에 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원인에 의해 규정할 수 있지만, 이 현상 속에 나타나는 힘은 일반적으로 원인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자연 현상이 사물 자체, 즉 근거가 없는 의지의 현상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서 의지의 이 유일한 자기 인식은 전체로서 표상이며, 직관적 세계 전체다. 이 세계는 의지의 객관성이자 의지의 드러냄이며 의지의 거울이다.


-384쪽, 순수하게 그 자체로 고찰하면 의지는 인식이 없으며, 맹목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충동이 우리 자신의 삶의 식물적인 부분에서뿐 아니라 무기적이고 식물적인 자연이나 그 법칙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의지는 자신에 도움이 될 만큼 발전된 표상의 세계가 추가됨으로써 자신의 의욕에 관한 인식과 자신이 의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이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상하는 세계를 의지의 거울, 의지의 객관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삶이란 표상에 대해 의지의 의욕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388쪽, 우리는 무엇보다 의지의 현상 형식, 즉 삶의 형식이나 실재성의 형식이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뿐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래나 과거는 개념 속에 존재할 뿐이며, 이것들이 근거율에 따르는 한 인식과 관련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 속에 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미래 속에 살지 않을 것이다. 현재만이 모든 삶의 형식이고, 결코 삶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삶의 확실한 소유물이다. 현재는 항상 그 내용과 함께 현존한다. 현재와 그 내용은 폭포수 위의 무지개처럼 확고해서 흔들림이 없다. 의지에게는 삶이, 삶에게는 현재가 확실하고 틀림없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바라보는 이 세계의 본질은 의지-멈추지 않는 의욕이다. 그리고 의욕은 고통을 기초로 한다. 춥거나 덥지 않게 살고 싶어 집을 원한다. 성적 충동이 우리를 채찍질해 짝을 찾는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성공을 추구한다. 의욕이 쉽게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또 의욕이 너무 빨리 충족되면 무료해진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다.(426쪽)' 욕망은 끝을 모른다. 삶은 고통이다. 나라는 인간은 불변의 의지가 잠깐 꾸는 꿈에 불과하다.


-438쪽,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외부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게 흘러가는지, 안에서 갖는 느낌으로도 얼마나 막연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지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의 삶은 빛바랜 동경이자 괴로움이고, 보잘것없는 일련의 생각을 품고 인생의 사계를 거치며 죽음을 향해 꿈결처럼 허우적거리며 걸어간다. 이들은 태엽이 감기고는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가는 시계의 태엽 장치와 같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이 새로 감기는 것인데, 이는 이미 수없이 연주된 손풍금 곡을 악절마다 소절마다 보잘것없게 변주하여 거듭 되풀이하기 위함이다.

모든 개인, 인간의 모든 얼굴과 그 인생행로는 자연의 무한한 영, 즉 삶에의 불변하는 의지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고, 자연의 영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무한한 백지에 재미로 그려 보는 덧없는 형상에 불과하다.


한 해의 끝을 마무리하는 글로 지나치게 우울하지 않은가? 정작 쇼펜하우어를 읽는 내내 크게 슬프지 않았다. 의지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내겐 하나의 구원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 채 원하는 고통에서 나를 충동하는 근원을 깨닫는 것. 지치지 않고 산 위에 바위를 올려야만 하는 인간의 고통은 삶이 고통이라는 인식 자체부터 시작이다. 생각 없이 살 때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세계의 베일 너머 '의지'를 인식하기, 예술 작품을 통해 순수한 의지를 인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거나 종교의 성인들과 같이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꿰뚫고 의욕하는 것을 멈추기, 구원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의 선택이 중요할 뿐.


내년은 쇼펜하우어가 보여 준 의지로서의 세계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감히 말하진 않겠다. 애초에 나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읽지 않는다. 철학'하기'를 위해 도전한다. 덧없는 삶의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하여.


-518쪽, 그 자신의 본성과 수많은 쓰라린 투쟁을 거친 뒤 결국 완전히 극복하는 인간은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로서만, 세계를 맑게 비추는 거울로서만 남아 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고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하면서 욕망, 두려움, 질투, 분노로서 이리저리 휩쓸리게 하는 의욕의 온갖 수천 가지 실마리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조용히 미소를 띠고, 한때 그의 마음까지 동요시켜 괴롭혔지만 이제는 승부가 끝난 뒤의 장기의 말처럼, 또는 축제의 밤에 우리를 놀리고 불안하게 한 가장 무도회의 복장이 아침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그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의 환영을 되돌아본다. 삶과 그 모습은 덧없는 현상처럼, 이미 꿈에 현실의 햇살이 새어 들어와 더는 그를 속일 수 없는, 반쯤 깨어난 사람의 가벼운 아침 꿈처럼 그의 눈앞에 어른거릴 뿐이다. 또 이 꿈과 마찬가지로 삶의 모습도 급기야는 무리한 변천을 거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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