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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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폭설과 함께 도착한 전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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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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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한 나의 오만을 반성하며, 1998년에 출간된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읽는다. 문학동네에서 2017년에 한국문학전집으로 판형과 장정을 바꾸어 새롭게 출간된 판본이다. 두껍고, 어둡고, 무겁고, 읽는 걸 멈출 수 없다.


첫 장편 속에 이미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의선이라는 이름으로 발아하고 있었다. 햇빛을 갈망하며 고기를 거부하고 상처입은 짐승 같은 식물적 인간의 모습.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에 퍼붓던 눈보라가 여기서는 강원도 깊은 산골짝의 사라진 마을 어둔리에 쏟아지며 사라진 의선을 찾아 온 인영과 명윤을 어둠 속에 가둔다.


아주 어둡다. 인영이 필사적으로 찍고 다닌 검은 바다의 어둠, 의선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 어둔리의 어둠, 사진가 장이 찍은 탄광의 어둠, 탄광 속에서 존재한다는 검은 사슴. 하늘을 보고 싶은 소망을 품었으나 햇빛이 닿는 순간 녹아버린다는 그 짐승은 인영에게, 명윤에게, 의선에게, 장에게 깃들어 있다.


외롭다. 서로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밀어내고 원망하고 그러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물의 외로움이 사무친다. 특히 인영의 외로움은 인영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굳어 단단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히려 한강 작가님의 이후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인물 중 가장 마음이 가닿는 캐릭터가 되었다.


-424쪽,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다 읽은 뒤 내가 어둔리의 어둠 속에, 폐광 깊은 곳에 갇힌 느낌이 든다. 검은 소설, 작가님의 [흰]과 극단에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순도 높은 어둠의 문장들. 어둠 속에 잠긴 채 빛을 꿈꾸는 인영과 의선과 명윤과 사진과 장과 모든 등장인물들, 그리고 작품을 읽은 독자 역시, 어둠이 우리 몸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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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대니 샤피로 지음, 서제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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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 광년의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로 이어지듯, 우리 역시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가진 고독감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밤하늘에서 별을 보기, 소설 읽기,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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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풀
앨리 스미스 지음, 이상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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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갖지 못한 것의 조합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사람을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앨리 스미스 [아트풀], 프시케의 숲

앨리 스미스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작년 고요서사에서 진행된 문학 생태 워크숍이었다.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을 한 권씩 읽어나간 4주 간의 마법 같았던 시간을 통과한 뒤 마음 속 방 한 칸에 '앨리 스미스' 명패가 걸렸다. 소전서림 읽는사람 '이달의 소설' 8월에 앨리 스미스의 신간소설 두 권이 연이어 선정되어 있었고, 나는 당연히 그중 한 권을 골랐다.

'계절 4부작'을 읽으며 놀랐던 건 전통적인 소설 형식의 파괴와 보편적인 소설의 정서가 부딪히지 않고 조화롭게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작가 특유의 문체였다. [아트풀]역시 앨리 스미스다운 소설이다.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아트풀]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이게 소설이라고? 도입부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나는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와 죽은 이가 남긴 강연록을 읽는다, 이건 소설답군, 예술에 대한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시와 소설과 에세이를 인용하고 메모와 주석을 남긴 강연록이 편집 없이 그대로 삽입된다, 이런 걸 소설이라 하나? 죽은 이가 돌아와 살아 있는 나와 대화한다, 소설?

여기 현실과 상상이 만나는 곳이 있다. 현실과 상상의 교환, 현실과 상상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허구의 다른 세상뿐 아니라 실재하는 다른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같은 책

[아트풀]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연인을 잃은 '나'의 이야기와 죽은 연인이 남긴 강연록과 강연록을 읽고 주석을 남기는 나의 목소리가 뒤섞여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을 깨뜨린다. 이 소설을 요약하라고 하면 난감하다. 제목의 '아트풀'부터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예술을 주제로 다룬 소설이라 아트풀이 아니라 책 속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트풀 다저의 이름이다. 이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일단 독자인 내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지 않아 해석이 어렵다.

해석이 어렵다. 의미를 파악하기 까다롭다. 요약이 불가능하다.

나는 애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의 감정은 해석이 어렵다. 상실감은 파악하기 까다로운 마음이다. 애도는 요약할 수 없다. '나'는 이걸 알고 있다. 그래서 죽은 연인이 남긴 강연록을 뒤적인다. 돌아온 연인과 대화한다(고 상상한다). 애도는 요약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요약할 수 없다. 이 책은 한 권으로 된 애도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요약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예술도 요약 불가능한 형식과 내용의 총체가 아닌가, 한 줄 요약을 불허하는 소설만의 고유성을 앨리 스미스로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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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1 세트 (무선, 박스 특별 한정판) - 전4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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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 먹고 다니던 시절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을 좋아했다.


정직한 제목대로 여자아이 한 명을 잘 키워서 왕자님과 결혼시키는 게임이었다.

이를 위해 아빠로 설정된 플레이어는 수많은 선택지를 골라 프린세스 엔딩까지 무사히 도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선택의 순간 아이의 운명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렇게 가르고 나눠진 수많은 길의 끝에 수백 가지의 엔딩이 존재했다.

내 딸이 공주님이 되거나 여왕이 되거나 가정교사가 되거나 술집에서 일하거나 다른 남자들과 결혼하거나 나와 사이가 틀어져 이별하거나 사망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엔딩은, 무수한 선택이 모인 결과였다.


나는 삼십여 년 간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도달한 결과물이다.


- 1권 101쪽, 자신은 그대로인 채 다른 일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상상. 다른 나무가 있는 다른 집에 사는 같은 소년. 다른 부모님과 지내는 같은 소년. 같은 부모님이지만 하는 일은 지금과 다른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같은 소년.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여전히 큰 동물 사냥꾼이고 그들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유명 여배우이고 그들 모두 할리우드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남자 형제나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치 종조부가 죽지 않고, 그의 이름이 아치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다리가 한쪽이 아니라 양쪽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양쪽 다리와 양쪽 팔이 다 부러졌다면 어땠을까? 그가 죽었다면? 맞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었다.

폴 오스터, 4 3 2 1, 열린책들


아치 퍼거슨,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 혈통으로 어머니는 사진관을 운영하고 아버지는 삼 형제가 함께 가전제품 판매 상점을 운영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미국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수많은 아치 퍼거슨이 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소설가는 신과 같은 권위를 휘둘러 네 명의 퍼거슨을 선택한다. 1과 2와 3과 4의 퍼거슨이 출발한다. 1.1, 1.2, 1.3, 1.4, 2.1, 2.2...처음에 이 소설의 사전 지식 없이 무작정 읽으면 헷갈릴 수 있다. 왜 1.1에서 1.2로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지? 그 둘은 같은 퍼거슨이면서 다른 세계선의 퍼거슨이니까.


네 명의 퍼거슨은 출발 지점에서 비슷할 수 있으나, 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선택과 스스로의 선택이 쌓여가면서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아버지의 사업이 천천히 몰락하거나, 급격히 성장하거나, 창고에서 불이 나거나, 불에 휘말려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어머니가 사진 작가가 되거나, 사진을 포기하거나, 사별하고, 이혼하고, 퍼거슨이 여름 캠프에 참여하고, 참여하지 않고, 대학에 가고, 다른 대학에 가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망하고, 이 세계에서 연인인 여자가 다른 세계에서는 의붓남매가 되고, 네 명의 퍼거슨, 중간에 사망하는 퍼거슨의 페이지는 비워지고, 세 명은 계속 나아가고, 다른 퍼거슨이 사망하고, 두 명이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최후의 한 명이 남아 소설을 쓴다. 제목은 [4 3 2 1], 네 명의 퍼거슨이 등장하면 바로 이 소설을 소설 속 퍼거슨이 쓴다.


-4권 443쪽, 그는 여전히 열네 살 때 상상했던 두 개의 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었고, 래즐로 플루트와 함께 세 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며, 그러는 내내, 의식이 생긴 후로 줄곧, 그런 갈림길을, 선택받은 길과 선택받지 못한 길들을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걷고 있다는 그 평행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림자 같은 사람들, 지금 이대로의 세상은 진짜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느낌,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길은 그 어떤 다른 길들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단 하나의 몸 안에 살아 있는 것의 고통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단 하나의 길 위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길을 선택하고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


나는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로 간 수많은 나'들'의 집합체다.


결국 나는 가지 않은 길 위의 다른 나를 확인할 수 없기에, 나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하나의 길 위에 올라선 한 개의 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에, 그 한계가 답답하기에, 그렇기에 다른 선택지로 향한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기에, 상상한다. 선택하지 않은 나 역시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중에 사망한 다른 나 역시 나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4권 445쪽, 신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삶은 어디에나 있고, 죽음도 어디에나 있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합류한다.


지금의 나는 선택한 나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총합이다.

네 명의 퍼거슨은 결국 하나다.

한 권의 방대한 소설이다.

가지 않은 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소설이다.


학식 먹고 다니던 시절 폴 오스터에 푹 빠졌다.


왜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대라면 수십 가지도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좋은 건 등장인물이 열정적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치 퍼거슨 역시 열정적으로 읽고 쓰고, 최후의 1인은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살아 보지 못한 삶을 한 번 더 산다. [4 3 2 1]의 경우는 무려 네 번 더 살 수 있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 이번 소설은 네 번 연속 살아가야 해서 약간은 피로할 수 있다. 그 피로감조차 좋았다.


계속 이런 소설을 써 주셨으면, 하는 말은 이제 폴 오스터에게 쓸 수 없다.

한 달 전 4월 30일 77세의 폴 오스터 별세 뉴스를 접했다.

한 권의 소설이 끝났다.


그가 남긴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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