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난바다
김멜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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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쪽, 물때란 밀물과 썰물의 변화를 가리키는 '바다의 말'로 조류의 흐름에 따라 1물부터 13물까지 나눠져 있었다. 을주는 숫자로 된 이름보다 '무릎, 배꼽, 가슴'으로 높아지는 우리말 이름이 좋았다. 그중 턱사리는 물흐름이 가장 세지기 직전으로 6물에 해당했다. 그리고 을주가 좋아했던 바다의 말은 또 있었다. 난바다와 든바다. 땅과 멀리 떨어진 바다는 '난바다', 가까운 바다는 '든바다'였다. 어릴 때 을주는 혼자 갯바위에 앉아 노란 햇빛을 보며 '바다 바다, 해다 해다' 중얼거렸다. 저 커다란 물도 '때'가 있으니 내게도 '때'가 올 거라고. 언젠가 이 외로움도 난바다처럼 멀어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다 바다, 비다 비다, 해다 해다', 리듬에 맞춰 소리 내면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좀 싱거워졌다.
리듬 난바다, 김멜라, 문학동네

김멜라의 장편소설 [리듬 난바다]는 표지 속 생기발랄한 딸기들이 독자를 맞이한다. 딸기향을 마음껏 내뿜으면서. 정확히는 바다 속 딸기들, 짭짤한 바다 향과 달콤한 딸기 향이 동시에 피어나는 소설 속 세계를 암시하면서.

물흐름이 가장 세지기 직전 '6물'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낮아지고 높아지면서 쉬지 않고 흐른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딸기 농장을 하는 청년 농부 을주와, 바다 앞 옥녀산의 수상한 삼층집에서 수상한 유튜브를 제작하는 둘희가 만나고, 엇갈리고, 둘희를 만나기 위해 유튜브에 출연하려는 을주와 한기연이라는 영화감독을 사랑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둘희의 서사가 교차되면서 소설은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예측 가능한 줄거리로 나아간다.

이 소설의 시작은 딸기 농장주인 을주가 담당하지만, 주요 서사의 축은 <욕+받이>방송을 제작하는 둘희의 '다시 쓰기' 작업이다. 그가 만드는 욕받이 방송의 제작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가(혐오의 언어가 과연 이런 방식으로 정화가 가능할까? 고작 이런 방송으로, 이 방송을 기반으로 제작하고자 하는 영화를 바탕으로 이 나라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수 있을까?), 그가 다시 쓰는 둘희와 한기연의 사랑의 서사가 유의미한가, 에서 이 소설의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혐오의 언어를 '다시 쓰는' 작업은 나름대로 참신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리고 둘희가 한기연을 '다시 쓰는' 작업은 둘희와 을주의 새로운 서사와 오히려 충돌을 일으켜 흔들리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딸기 향이 한기연의 바다 냄새에 묻히는 게 아닌가 안타까웠다.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몰아치는 파도에 정신없이 헤엄치듯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멈추지 못하고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의 다시 쓰는 작업을 응원하면서, 일부는 실패하고 실패하면서 뜻밖에 얻어가는 그들만의 성취에 흐뭇해 하면서, 이제 곧 출하될 올해의 딸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었다. 저 먼 바다에서 딸기들이 춤을 추며 다가온다, 냄새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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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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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라 작가의 첫 단편집의 제목은 불가해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뱀'과 '양배추'가 나란히 있어야 할 이유가 뭐지? 단편소설이 이런 것이다. 평소에 둘이 나란히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이 한 장면에 모인 순간 발생하는 힘, 감정, 느낌. 보통은 '불편함'이라 표현할 감정을 구현하는 예술적 장르.


-82쪽, 오래전에 호경이 내게 준 그것을 나는 베란다에 서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캄보자꽃과 원숭이, 노을에 물든 논밭 같은 상투적인 그림들을 제쳐두고 그애가 굳이 골라 내게 선물한 것. 아무런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조는 인용자)


강보라의 소설 속에서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은 다른 작가의 단편들보다 유독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인물 옆을 맴돌며 그들이 주는 불편함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티니안에서>의 민지와 수혜의 관계, <신시어리 유어스>에서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문규씨를 바라보는 '나'의 묘한 시선, 곧 떠날 동네라고 되뇌면서도 이웃집 여자를 훔쳐보는 일에 집착하는 <직사각형의 찬미>의 새댁, 소설은 불안감을 품고 유려하게 흔들리며 달려가다 쾅! 하고 폭발...하지는 않고 어떤 풍경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219쪽, 얼음이 얼지도 녹지도 않는 이상적인 온도에 다다른 기분. 완전한 고체도 완전한 액체도 아닌 무언가의 표면을 손끝으로 만진 듯한.... (빙점을 만지다)


-169쪽,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바우어의 정원, 25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그 풍경은 고체도 액체도 아닌 '무언가'이고, 크고 강렬한 불이 아닌 '작고 파란 불씨 하나'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그게 무엇인지 그들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의 깨달음은 '그 자신만의 것'이니까.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 소설을 읽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생각한다. 책을 덮고 밖에 나가 타인과의 대화에 끼어들었을 때, 어떤 모임에 참여했을 때, 무슨 장소에 당도했을 때, 문득 조금 전 읽었던 소설의 어떤 부분이 떠오르고 우리는 깨닫는다. '그게 이거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맥락에서 벗어난,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을 깨닫는 순간. 앞으로 이런 순간을 나는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라 이름붙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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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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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책의 날에 읽는 허구의 책에 대한 서평과 서문 모음, 책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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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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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폭설과 함께 도착한 전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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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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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한 나의 오만을 반성하며, 1998년에 출간된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읽는다. 문학동네에서 2017년에 한국문학전집으로 판형과 장정을 바꾸어 새롭게 출간된 판본이다. 두껍고, 어둡고, 무겁고, 읽는 걸 멈출 수 없다.


첫 장편 속에 이미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의선이라는 이름으로 발아하고 있었다. 햇빛을 갈망하며 고기를 거부하고 상처입은 짐승 같은 식물적 인간의 모습. [작별하지 않는다]의 제주에 퍼붓던 눈보라가 여기서는 강원도 깊은 산골짝의 사라진 마을 어둔리에 쏟아지며 사라진 의선을 찾아 온 인영과 명윤을 어둠 속에 가둔다.


아주 어둡다. 인영이 필사적으로 찍고 다닌 검은 바다의 어둠, 의선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 어둔리의 어둠, 사진가 장이 찍은 탄광의 어둠, 탄광 속에서 존재한다는 검은 사슴. 하늘을 보고 싶은 소망을 품었으나 햇빛이 닿는 순간 녹아버린다는 그 짐승은 인영에게, 명윤에게, 의선에게, 장에게 깃들어 있다.


외롭다. 서로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밀어내고 원망하고 그러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물의 외로움이 사무친다. 특히 인영의 외로움은 인영이라는 인물 그 자체로 굳어 단단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히려 한강 작가님의 이후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인물 중 가장 마음이 가닿는 캐릭터가 되었다.


-424쪽,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다 읽은 뒤 내가 어둔리의 어둠 속에, 폐광 깊은 곳에 갇힌 느낌이 든다. 검은 소설, 작가님의 [흰]과 극단에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순도 높은 어둠의 문장들. 어둠 속에 잠긴 채 빛을 꿈꾸는 인영과 의선과 명윤과 사진과 장과 모든 등장인물들, 그리고 작품을 읽은 독자 역시, 어둠이 우리 몸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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