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달콤씁쓸한 모호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 난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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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사라지지 않을 것을 욕망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리스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했다. 그들은 그것을 표현하고자 에로스를 발명했다.

앤 카슨-에로스, 달콤씁쓸한-난다


사랑은 달콤하면서 씁쓸한 것, 유행하는 노래 가사 같은 이 단어Bittersweet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로 시작하여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로 마무리된다. 고대 그리스어 분석을 현대 영단어 분석하듯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앤 카슨의 차분한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날고 있다. 에로스가 등 뒤에 달아 준 날개로. 책이 어려운데 쉽다. 고대 그리스에 발을 딛고 있는데 들이마시는 공기는 현대의 그것이다. 에로스에 대하여, 연인의 사랑에 대하여, 연인의 욕망과 소설의 욕망이 겹치는 지점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가 인간을 영원히 바꾸게 된 것에 관하여, 앤 카슨의 글은 힘겹게 술술 읽힌다. 달콤씁쓸한.


-25쪽, 그리스어 단어 에로스는 '필요' '결핍' '없어진 것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연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한다. 원하는 것은 소유되지마자 더이상 원하는 대상이 아니게 되므로, 그럴 경우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 책은 이 해석의 긴 주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게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 나의 연인, 소설, 도달하고자 목표한 높은 정신, 지혜, 욕망은 결핍이 충족된 순간 사라지고 그 순간 내 손에 쥔 것은 욕망의 대상 자격을 상실한다. 그래서 욕망은, 에로스는 충족의 순간을 유예한다. '-142쪽, 상대 연인은 연인에게 말한다. 그렇게 욕망이 손을 뻗는 행위는 계속 이어진다. 역설이란 무엇인가? 역설이란 손을 뻗어보지만 그 끝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는 생각의 일종이다.'


에로스는 동사다. 에로스는 우리를 욕망하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든다. 이룰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영원히 손을 뻗게 만든다. 손을 뻗었는데 그 대상이 잡히는 순간이 오는 걸 두려워하게 만든다. 에로스는 날개다. 예고 없이 날아와 나를 덮쳐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나를 철저히 부수고 파괴한다. '-247쪽, 에로스는 날개를 달고서 난데없이 나타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의 몸에서 주요 장기와 물질적 실체를 빼앗고, 그의 정신을 약화하고 생각을 왜곡하며, 정상적인 상태의 육체적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질병과 광기로 대체한다.' 에로스는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로스를 피해야 할까?


책 후반부에서 작가는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뤼시아스의 '사랑하지 않는 사람' 이론을 소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나선다. 욕망에 장악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로 남을 수 있도록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인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는 마음, 그건 학생의 마음가짐이다. 지식을 갈망하며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자, 그리스에서 탄생한 철학의 어원. 그리스인은 에로스와 함께 철학을 발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소크라테스를 낳았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에 사로잡힌 자신을 인정한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287쪽, 사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위는 우리를 이 도시 너머로, 어쩌면 소크라테스처럼 이 세상 너머로 데려가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주 분명히 보았듯이,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는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 자신이 구애 자체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다. 끝없는 구애의 과정에서 이런 책도 만나고, 저런 책도 읽고, [에로스, 달콤씁쓸한]과 같은 책을 경험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원하는 궁극의 책에 가까운 책을 만나면 '이 책을 영원히 읽고 싶다'는 욕망에 고통스러워 하는 내가 있다. 그건 나만의 에로스, 달콤씁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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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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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인쇄하여 한 부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붙이고, 한 부는 근무하는 학교 책상에 걸어놓았다. 계엄령이 급습하고 내란 사태가 지속되는 상황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저 두 문장을 되뇌었다. 타인을 향한 폭력을 숨기지 않으려는 인간들과 그들을 막아내려는 인간들의 충돌, 각자의 손에 들린 총과 응원봉, 폭력과 빛.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유독 즐겨 읽는다. 폭력과 고통이 난무하는 이 형편없는 세계에서 기어코 한 조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삶의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견디고 있나?


-101쪽, 화단이 마당 북쪽에 있어서, 나무들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거울 세 개를 놓았다. 남중하는 햇빛이 느리게 거울을 지나가면 창문 같은 빛이 벽에 비친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출간된 첫 책이자 에세이집에서, 작가는 북향집을 구입하여 마당에 작은 정원을 꾸리게 된 과정을 이야기한다. 햇빛이 잘 닿지 않는 집이기에 거울을 사서 빛을 반사해 나무와 꽃에게 보내기로 한다. 십오 분 간격으로 거울의 각도를 조절해 가며 비껴가는 햇빛을 모아 나무에게 보낸다. 꽃에게 보낸다. 작가가 포집한 빛을 먹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열린다.


이 세계에 빛 같은 건 없으리라 절망하기 쉬운 엉망진창의 세계 속에서 거울을 가지고 빛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다. 눈 앞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포기하려는 이들 앞에 빛으로 된 창문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이 있다. 앞으로 거울로 빛을 포집하는 직업을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좋겠다. 그 빛을 먹고 우리가 열심히 자라날 수 있었으니까.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오늘도 살아냈다.


더 살아낸 뒤

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글쓰기로.)


사람들을 만났어.

아주 깊게. 진하게.

(글쓰기로.)


충분히 살아냈어.

(글쓰기로.)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 더 살아낸 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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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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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실패'를 다루겠다는 야심 가득한 책을 받고 웃었다. 실패를 이야기하는 일에 실패하더라도, 결국 실패를 성공한 셈이 되기에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룩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릴 테니까. 실패를 실패하면 그건 성공일까? 모든 글쓰기는 실패다, 애초에 읽기부터가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 실패라는 단어를 하도 많이 읽었더니 실패가 실패 단어 그대로 이해되는 것조차 실패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이 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68쪽, 우회. 들뢰즈가 항상 반복했던 것. 글쓰기는 에둘러 가고 비틀어 가고 리좀을 형성한다, 중간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자라는 식물처럼. 말은 내가 세상의 그 무엇을 전달한다는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나를 붙잡고 바람밖에 씹지 못하는 이 이빨들 중 하나로 전락시킨다. 글을 쓸때 늘 느끼는 실패감이 바로 여기서 온다.


클라로, 각별한 실패, 을유문화사


그래서 이 말은 무엇을 전달하는가? 아무것도, 혹은 모든 것을. 실패는 -와 같다, 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의 목록,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단편소설, 인용들, 맥락에서 벗어난 듯 책에 한 발 간신히 걸치고 선 파편들이 뒤섞인 이 책은 하나의 실패를 실패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아무것도, 혹은 이 책을 읽은 느낌의 모든 것을.


글쓰기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위대한 카프카도 끝내 자신의 장편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페소아는 원고 한 상자를 두고 떠났다. 우리는 당신에게 보내는 카톡 한 줄조차 완벽하게 나의 진심을 담아 보내는 데 실패한다. 이건 글쓰기의 필연이다. 글쓰기와 실패는 이음동의어의 관계다.


읽기부터 실패의 과정이다.


-202쪽, 실제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 아래 형체들이 지나가는 것만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잡하지 않는 것,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시선을 벗어나는 것, 말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듯한 것, 너무 눈부셔서 눈을 멀게 하는 것, 우리를 너무 바짝 끌어당긴 나머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 부서지고 불완전해 보이는 것, 계속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것, 떨어지는 것, 붕괴되는 것. 그렇다, 의미는 결코 떡하니 주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부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페이지를 마주한다. 우리는 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꾸는 꿈의 일부가 되고 싶으니까. 이 책의 비법들이 신비를 통해 살아남았으니까. 우리는 이해의 실패라는 성운에서부터 줄곧 호흡한다.


애초에 이 책을 읽고 쓰는 감상문부터 실패한다. 책을 읽으며 느낀 약간의 실망감과 그럼에도 소중히 주워담은 몇 개의 빛나는 조각들을 글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결국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성공적인 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 책이 도모한 실패의 일부가 되고 싶으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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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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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책의 날에 읽는 허구의 책에 대한 서평과 서문 모음, 책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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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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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나의 글쓰기는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잡문'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내가 젊은 시절에 루쉰의 잡문에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또래와 내 선배들 세대에게 루쉰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루쉰은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고 했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등 루쉰 잡문집이 여러 형태로 나와 있다. 그러나 루쉰의 잡문이란 그냥 잡문이 아니라 일상사에서 시작해 사상의 담론에까지 이르는 글이다.

옛 문인들의 문집을 읽을 때도 나는 시, 논, 소, 차, 서, 서, 척독 등 정통적인 글쓰기보다도 대개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잡저를 눈여겨보았다. 잡저에는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고 거기엔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답사기'라고 해놓고 이 소리 저 소리 다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런 잡저와 잡문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에 나의 산문집을 아예 '유홍준 잡문집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 이름 지었다.

유홍준 잡문집-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창비

서문에서 밝히는 대로 저자가 살아 온 인생만사가 다 들어있는 잡다한 글, 그런데 그 저자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인,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글의 완성도와 신뢰도가 보장된다는 건 크다. 기념비적인 교양 시리즈가 된 답사기의 역사적인 첫 권이 '남도답사 일번지'였고, 전라남도 장흥 출신인 아버지는 행복한 얼굴로 우리 가족을 차에 태워 고향으로 향했고, 아버지의 가방 안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당연하게 들어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도 재미있게 술술 읽혔던 답사기가 품고 있던 힘은 강력했다. 책에 부록으로 실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력서'를 읽고 나면 오랜만에 답사기를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진다. 일단 이 잡문집을 읽는다. 잡문집도 너무나 재미있다. 잡문집은 원래 재미있다. 한국의 봄꽃을 이야기하는 '꽃차례'나 바둑의 사례로 한미 FTA의 필요성을 역설한 글 '바둑 FTA', 아재 개그의 진수 '문화재청장의 관할 영역'은 재미있고, 답사 여적과 인연이 있었던 예술가를 이야기하는 챕터는 전체가 아름답다. 부록의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과 '나의 문장수업'은 수식어를 더 붙일 필요조차 없는 글이다. 글쓰기 조언은 전국의 학교 글쓰기 시간에 가르쳐야 한다. 이미 답사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긴 하지만..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꼭 글을 잘 쓴다고 할 수는 없다.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교도소에 복역하고, 출역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취업하고, 한국미술 평론가로 등단해 한국미술 강의 및 답사를 이끌다 제안을 받아 답사기를 쓰게 되고,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되고, 문화재청장에 취임하고,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열심히 읽고 쓰고 답사하고 사람을 만나고 느끼고 강의하고 이 모든 일들을 다시 또 글로 남긴다. 그렇게 쓴 잡문이 또 너무 재미있다.

작가님은 친절하게 15가지 항목으로 좋은 글쓰기를 위한 조언을 조목조목 달아 주셨지만, 글재주 없는 형편없는 제자로서 '이 책 너무 재미있고 훌륭합니다!'를 최대한 늘린 게 이 글이라 송구합니다. 저는 다시 '남도답사 일번지' 읽으러 떠나봅니다 총총-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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