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있어서 이 소설이 매우 불편하고 거부감을 일으키며 지치게 만드는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자로 잰 듯한 정교한 묘사로만 이루어진 소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묘사. 다른 소설에서 이런 식의 묘사가 잠깐 나와도 왠지 거북스럽게만 느껴졌던 나로서는 이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시선에 의한 서술만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화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식사습관 등의 화자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들뿐이다. 뿐만 아니라 화자가 그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림자와 벽이 만드는 각도와 같은 화자의 평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실들만 나열될 뿐이다.

도대체 이 소설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인지도 의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밤과 낮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시간의 연속성이 없다. 저녁은 그냥 저녁이고, 아침은 그냥 아침이다. 아침에서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된다는 당연하고 자명한 진리는 이 소설에서만은 예외였다.

또한, 이 소설에서 사건은 - 두 줄 이내로 서술할 수 있을 만큼 - 거의 없다. 하지만 한 사건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프랑크는 자기 집 드나들 듯이 계속 A의 집을 방문하고, A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나눈다. 소설에 나온 횟수만 따지면 프랑크와 A는 적어도 열 번은 시내를 왕복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데, 같은 사건마저 계속 반복되어 서술되어 있으니 점점 이 소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기법 상의 심정적 거부감과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와 같은 장면에 대한 계속적인 반복, A를 쫓는 화자의 집요한 시선 그리고 ‘질투’라는 제목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일지는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에서 이 소설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고통스러운 관찰의 기록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 그 어디에도 화자가 A의 남편이라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화자가 A의 남편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큰 단서는 흑인 하인이 화자에게 “주인마님께선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다. 하인이 A를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보고할 때에는 화자가 A보다 높거나, 상응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나는 상황적인 근거에 의해서 화자가 A의 남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A에 대한 비정상적인 화자의 시선이 이해가 간다.

프랑크는 자신의 집도 아닌데도 A와 화자가 살고 있는 집을 자주 방문한다. 그리고 A와 둘이서 테라스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한다. 화자는 프랑크와 A의 친밀한 관계에 질투가 난다. 처음에는 그 질투가 지나가는 감정 상태의 하나였겠지만 프랑크와 A의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서 병적인 상태로 커졌을 것이다. 그는 농장 일을 돌보기보다는 블라인드를 통해서 A를 감시하고 지켜보는데 집중한다. 소심한 성격의 화자의 집착과 질투는 자폐적인 수준에 까지 이르고, A와 A의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묘사가 더더욱 정교해지고 치밀해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프랑크와 A가 시내에 같이 나가서 외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낯선 남자와 밤을 새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화자의 초조함과 극도의 질투와 분노는 추측하고도 남는다.

이 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프랑크와 A의 장면들은 A가 프랑크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끊임없이 화자의 머리 속에서 반복된 영상들은 아니었을까? 프랑크와 A가 저녁을 먹던 어느 날의 장면, 시내에 나가자고 모의(?)하던 장면,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하던 장면들이 질투 섞인 분노와 함께 화자의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A와 프랑크의 외유 이전부터 이미 화자는 프랑크와 A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고, 병적이고 자폐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날의 일로 폭발된 것이다. 물론 이런 정신병적인 기억의 반복과 함께 행동도 이루어진다. 화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지네가 죽은 자국을 지우기도 하고 아내의 방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기억의 반복과 행동들은 서로 결합되면서 화자의 극한의 초조와 분노의 모습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된다. 그 장면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었지만 - 아니면 화자의 머리 속에서 확대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사실에 기초한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 소설에서 그 사건들의 배열은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가 외박한 극도의 초조 상황 속에서 화자의 머리 속에서 두서없이 반복되는 영상일 뿐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은 아내가 프랑크와 외박한 후 돌아온 이후일 것이고, 그 중간 부분들은 모두 아내가 외박하던 밤과 새벽 사이에 화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났던 영상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한 남자의 정신병적인 관찰과 상념으로 이루어진 질투의 기록이 될 것이다.    

참으로 섬뜩하다. 나는 이 소설의 이후를 생각하기가 겁난다. 이미 미쳐버린 이 남편은 A를 어떻게 했을까. 이 곳은 주위는 바나나 농장으로 가득차있고, 이웃이라고는 프랑크 일가밖에 없는 이 고립된 아프리카의 마을이다. 밤마다 짐승의 소리로 뒤덮이는 섬뜩한 곳이다. 그런데 소설의 끝은 저녁 6시 반의 칠흑 같은 어둠이 퍼진 조용한 집을 보여주며 끝난다. 집에는 A와 화자밖에 없을 것이다. 흑인 하인은 그들만의 거처에 머물렀을 것이고. 아내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미치광이 남편은 이 저녁에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소름끼치는 감정이 이렇게 소설을 하나의 줄기로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차갑고 섬뜩한가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앞서 내가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었던 요소들로 제시한 것들은 사실, 이 소설의 분위기와 결말을 위한 작가에 의해 의도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화자에 의한 냉혹한 묘사와 사건의 계속적인 반복,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구성들이 화자의 정신병적인 모습과 연결되어 얼마나 이 소설의 결말을 더 돋보이게 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이런 로브그리예에 대한 나 자신의 재평가와는 별개로 이 소설을 다시 읽을 자신은 없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 자유롭다. - 물론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나 같은 3류 독자는 문학 작품 보다도 신문의 가십 기사 한 조각 안에서 가장 자유롭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징비懲毖'란 <시경> '소비小毖'편에 나오는 문장, '予其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즉, 징비록은 유성룡이 자신이 겪은 전란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다시 분석하여 후대에 교훈으로서 남기려 한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7년 전쟁)의 십여년 전부터 노량해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하면 보통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우리가 결국에는 이긴 전쟁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국사 교과서나 우리들의 사고에서는 의도적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임진왜란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고, 우리가 질 수도 있었으며, 그나마 영토를 지킨 것은 명나라 군대의 도움도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전란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의 훈련이며, 전쟁 장비며 성이며 모든 것들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나마 전쟁을 대비해 축조된 성들도 요즘 말하는 '전시행정'으로 평지에 크게 지어놓았다. 전쟁에 대비한 어떤 짜여진 대비는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도 무지했다.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해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그 때 조선에서는 활을 쏘고, 짧은 창으로 대비하는 것에 그쳤다. 그것마저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성룡이 신립에게,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으니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라고 말하자, 신립은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라고 답했다고 한다. 얼마나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는 소린가. 결국 신립은 평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다가 참패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뛰어난 장수도 없었다. 징비록을 보면 유성룡이 신립과 이일이 당시에 가장 뛰어난 맹장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립은 용감하긴 했지만 전략이 없었고, 이일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로, 왜군을 만나기만 하면 도망가는 처지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순신을 비롯해 여러 의병장들이 나중에 조선의 체면을 세우기는 했지만 한 나라에 이 정도로 뛰어난 장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인 것이다.

유성룡은 전란이 있기 전부터 신비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신비로운 징조를 인간이 몰랐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전란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비로운 징조들이 아니더라도 조정 돌아가는 꼴과 군사들의 현실 들을 보았으면 '지금 전란이 일어나면 당해낼 수가 없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미 전쟁의 징조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징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유성룡이 후대에 교훈으로 주려 했던 사실들은 성을 어떻게 축조하고, 지형을 어떻게 이용하고, 포대를 어떻게 쌓느냐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유비무환의 정신.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찾으며, 시류를 민감하게 주시해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하며, 나라 안으로 부터 기강을 다지는 것. 이 것이 유성룡이 말하는 국가와 개인의 전쟁대비법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순신에 대한 대하드라마가 방영되고, 이순신에 대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하면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원균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드라마 또한 이순신과 원균을 재평가하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고, 한 쪽에서는 역사왜곡이라고 맞서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잘 모르겠지만 이순신을 '성웅'에서 '인간이지만 훌륭했던 장군'으로 되돌려 놓고, 원균을 '동물'에서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옳지 않나 싶다. 물론, 기록과 여러가지 근거에 기초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유래없는 이 임진왜란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에도 옮겨졌으면 한다. 고전이 현재에도 가치있는 것은 그런 이유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고전을 새로운 감각으로 번역하고, 여러 삽화와 자료를 첨부한 서해문집 출판사의 '오래된 책방' 시리즈에 칭찬을 해주고 싶다. 초심을 잃지 않고 좋은 고전을 충실하게 계속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욕망과 야망이 양심을 짓누르고 발현될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었다. 맥베스의 비극, 모든 비극의 시작, 그 것은 욕망과 야심으로부터 나왔다. 그것이 양심과 현실인식을 억누르고 몸 전체를 장악하면서 맥베스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된다.

맥베스는 위엄과 능력을 모두 갖춘 장군이었다. 그는 덩컨왕으로부터 "용맹한 사촌" 이자 "훌륭한 신사"라는 말을 들으며 총애를 받는다. 하지만 마녀가 나타나 맥베스에게 "글래미스의 영주, 코도의 영주,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말을 한다. 맥베스는 이미 글래미스의 영주였고, 코도의 영주는 맥베스가 아직 전달받지 못했지만 왕이 그를 코도의 영주로 임명하였고 그 소식을 전하러 왕의 칙사가 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것은 예견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이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은 너무 황당무개한 것이라 처음에는 맥베스조차 의심한다. 하지만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맥베스는 장차 왕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 예언. 그것은 마녀가 맥베스를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 파멸을 보며 즐거워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예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 만약 운명이었다면 맥베스는 덩컨왕을 죽이지 않아도 언젠가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녀의 그 말로 해서 맥베스는 안정을 잃게 되고 덩컨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 만다. 만약 왕을 죽이는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맥베스는 자신이 왕이 된다고 했는데 과연 언제 될 것인지 의심하고 초조하게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 예언. 맥베스는 그 마녀의 예언을 듣지 말던지 들었어도 무시해야 했다.

사실 그렇다. 점을 보는 사람들. 그 점의 매력은 얼마나 넘치는가. 불분명한 미래에 대한 명쾌한 예언. 그리고 현재의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맞추는 점쟁이의 신통력. 우리는 그 예언에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맥베스를 보면 그것이 저주도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운명이라는 것이 완전히 정해져 있다고 믿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윤곽이 정해져 있을 뿐, 그 상세한 내용은 내가 채워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점쟁이와 마녀가 말하는 내 미래는 그 것은 미래의 한 틀일 뿐 그것이 완결된 운명이 아니다. 그의 예언이 마치 나의 미래이며 운명인양 매달리는 것은 남은 인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지름길일 뿐이다.

맥베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벵코는 말했다.

"어둠의 수족들은 우리를 해치려고 가끔씩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소소한 정직으로 우리를 유인하여, 중대한 결말에서 배반한단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다면 명예와 돈과 마음의 안정을 모두 지키면서 살 수 있었을 맥베스는 예언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욕망과 야심 탓에 나머지 인생 전부를 망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양심의 가책에 몸과 마음을 모두 망치고 만 맥베스의 비극적 결말.

욕망과 야심, 그리고 예언과 운명. 이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마지막까지 맥베스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 혼 사마천
천퉁성 지음, 김은희. 이주노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신문의 신간소개란에서 확인했을 때, 보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 들었었다. 하지만 역시 돈이 문제여서 사지 않았고, 그냥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험 기간 때 공부는 안하고 서가를 서성이다가 이 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시험기간때는 왜 그렇게 책을 보고 싶던지. 시험 끝나고는 하루에 10페이지도 안 읽는다.)

사마천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려져 있다.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이기고 동아시아 최고의 사서 史記 를 완성한 사람. 그의 사기 집필 방식인 기전체는 동아시아 두루의 나라에서 정사를 서술하는 기본 체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서 말이다. 하지만 사마천에 대한 기록은 얼마 없다고 한다. 반고가 지은 한서의 사마천전, 그리고 사기의 태사공자서,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단 세 개의 사료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말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이 세 개의 사료에 나오는 조각난 기록에서 온 것이다. 이 사료들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사마천이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단편적이고 조각난 사마천의 일생을 소설화시켜서-그렇다고 소설은 아니다-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 사료를 기반으로 하였다. 내가 볼 때는 거의 사료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만약 사료에 사마천이 어디를 여행했다, 굴원의 시를 좋아했다라는 기록이 있다면, 이 작가는 그 것을 사마천이 어디를 여행했는데 거기서 굴원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화시키는 과정에서 사마천을 쉽게 감동하고 쉽게 깨달음을 얻는 감성적이고도 예민한 존재로 표현한 것이 어색해보였다.

이렇게라도 사마천의 일대기를 재구성 해놓으니 좀 더 생생하게 그의 일생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은 있었다. 단점으로는 이 것은 시작 자체부터의 한계지만 사료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살을 붙이면 왜곡의 가능성이 있어 진위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그렇다고 해서 살을 안 붙이자니 이야기가 너무 한정되는 식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도 이런 딜레마에서 자유롭지는 않아 보였다.

이 책에서는 한무제에 관해서도 꽤 비중있게 다뤘다. 작가가 말했듯이 사마천의 인생을 바꾼-궁형을 당하게 한-가해자로서도 그렇고 당시 시대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영향면에서도 그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평소 한무제를 왕권을 강화시키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시키면서 소금과 철 전매제 등 재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 (중국 역사에서의)명군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진시황처럼 불로초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고, 신선을 믿어서 사이비 도사들을 궁중으로 끌어 들이고, 다혈질 성격으로 쉽게 화내서 사람 죽이고 처벌하고-사마천의 경우에서와 같이-등등. 그리 좋은 평가만을 내릴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말미에서 그래도 한 무제는 중국민족의 영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마천과 사기를 빼놓고 중국 역사를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그 정도로 사마천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당시 사대부로서 굉장한 치욕인 궁형을 감수하면서 사기를 완성한 그 집념도 대단하다. 그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것을 보면 몇 번이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죽었더라면 어떻게 사기가 나왔겠는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집념과 자부심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신. 그 것은 너무나도 부럽고 배우고 싶은 자세다. 사마천이 죽은지 100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도 아직까지 우리가 사마천의 이름을 되뇌는 것은 그가 중국역사에서 남긴 위대한 족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 치열한 집념과 확신, 그 것에 대한 평가이기도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이 글은 일본 최연소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의 것이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매우 얇은 책의 두께와 표지의 '고등학생' 같은 그림과 사실 나는 이 소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출판사 역시 '황매'가 아니던가. '황매'는 귀여니의 소설을 출판한 전례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였다. 이 따위 출판사 편집국장이 제대로 된 머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아마도 돈에 미친 그저 그런 사람일거라는 편견은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이 책도 귀여니와 나이도 같고 소설로 뜬 인물이니 - 그들은 귀여니의 글도 소설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 '일본의 귀여니' 정도로 띄워서 책이나 팔아보자라는 심산이었겠지.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이 책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묘하게도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어갔다. 어딘가 나도 한 번 겪어본 것 같다는 생각도 아무 이유없이 들었다. 또, 술술 쓴 것만 같은 - 물론 그렇지 않았겠지 - 문체며, 주위 묘사며 나는 그녀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머리 속으로 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재미있고, 상쾌한(?) 글이라 생각한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무겁지도 않은.

이 글의 주인공 하세가와 하츠는 약간 삐딱하고 모난 아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과 일부러 친해지려고 애를 쓰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유일한 단짝 이었던 오구라 키누요 또한 고등학교 들어와서 한 무리의 아이들 속에 끼어드려고 한다. 그야말로 하츠는 외톨이가 된다. 하지만 애써 다른 아이들 속에 끼어드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츠 역시 혼자 먹는 점심시간이 싫고, 혼자 무료하게 지내게 될 여름방학이 불안한 그런 아이다.

또다른 주인공 니나가와는 고양이 등같은 등짝을 가지고 있고, 역시 외톨이이지만 '올리짱'이라는 모델에 푹 빠져 있는 광적인 팬이다. 또, 집에서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자기 방에서 숙식이며 빨래 모든 것을 해결하며 은둔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람을 오타쿠라고 부르나? 잘모르겠다.)니나가와는 그 모델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수업 시간에도 그 모델이 나온 여성 잡지를 뒤적인다.

하츠는 이런 니나가와에게 일종의 동질감이자 호감을 가지게 되고, 니나가와는 하츠가 예전에 올리짱을 만났었다는 사실 때문에 하츠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하츠는 니나가와의 그런 광적인 올리짱에 대한 집착에 고양이 등짝과 같은 그의 등을 발로 차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니나가와를 좋아하면서도 올리짱에 대한 집착으로 심하게 상심하고 낙담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니나가와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고 싶다. 절망적인 얼굴을 보고 싶다. (중략)오싹했다. 좋아한다는 말과 지금 내가 니나가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그 차이에."

하츠나 니나가와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고, 서로 터놓고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츠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니나가와는 그런 마음이 올리짱에 대한 집착으로 왜곡되게 표현되어 나타난다.

사람들과 관계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있고, 또 사람과의 관계에 성공한 사람 또한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사람이 사는 것은 사회 속인 만큼 적절히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물론 그렇다고 그 속에서 자기를 억누르고 자기를 집단에 맞게 변형시킬 필요는 전혀 없지만. 아무튼 무척이나 호감이 갔던 이 두 캐릭터 역시 한 단계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