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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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사에서 1940년대만큼 중요한 순간은 더 없을 것 같다. 분단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고, 독재의 발판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고, 친일파는 이 시기에 사회 주류로 자리잡았다. 2005년 현재를 움직이는 사건들이 바로 194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데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만큼 좋은 책이 없는 듯 싶다. 물론, 이 시기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전문서가 있기야 하지만 대중들이 접할만한 수준의 책은 이 책이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훑다 보면 마치 내가 이 시대를 산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면 지나친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강준만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삼 그의 부지런함을 상기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1940년대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각은 김구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노선이 아닌 김구의 노선대로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이 시대를 보는 나의 눈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한 정당은 백범기념관에서 행사를 갖기도 했다. 개혁세력을 표방하는 이 정당은 김구 선생의 휘호를 당사에 걸기도 했다.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조금 개혁적이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 시기의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김구를 꼽는다. 나는 지금까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다들 김구일까 하는 생각을 아직까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강준만을 통해서 하게 되었다.

김구는 1948년 부터 암살당하기 1년 전까지만 남북연합 노선을 걸었다. 그 이전은 애매모호했다. 아직도 김구와 연관되는 '38선을 베고 죽을 지언정 단정에 참여할 수는 없다.' 라는 말과 함께 연상되는 분단을 막는 뛰어난 지도자로서의 김구의 모습은 최후의 1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물론 그 1년 여의 활약만으로 김구는 존경받을만 하다. 하지만 과연 김구만 그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김규식이 있었고, 여운형도 있다. 하지만 여운형은 좌파에 기울었고 좌파에 알르레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풍속때문에 여운형을 지지 한다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안전하게 김구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강준만의 지적은 새롭고 일리가 있는 말인 듯 싶다.

이 시기는 극단과 분열의 시기였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노선대로 좌우합작을 보다 빨리 잘 실현했더라면 우리나라가 분단에 이르렀을 것인가. 중간파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우파고 좌파고 극단에는 답이 없다고 나도 믿는다. 합리적인 좌, 우의 대화와 타협에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40년대에는 이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분단에 이른 원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여순사건과 4.3사건 등 해방후 좌익척결 작업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했는가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익이 좌익을 싸그리 죽였다고 해도 그 것은 천인공노할 일인데, 우익이 좌익만 죽인게 아니라 이념에 관심없는 민간인도 처참하게 죽였다는 것은 짐승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좌익의 우익에 대한 공격과 살해가 있었을 터이지만 대한민국 건국 후 이뤄진 이런 국가 차원의 학살에 비길 수 있을까. 우리가 제대로 된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비극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분명히 있어야 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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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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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이다. 첫 문장부터 그녀의 표류를 있게 한 근원적 이유이자 그녀에게 가장 아픈 상처인 사실을 담담하게 털어놓고 있다. 제일 약한 부분을 처음부터 내보이는 화자가 나에게 더 이상 숨길 사실이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숨기는 것 없이 다 털어놓을 것 같았다. 그런 화자를 대하는 나는 왠지, 술자리에서 자신의 내밀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친구를 앞에 둔 것처럼 왠지 모를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궁금함을 가지며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과연,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매우 흥미로웠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할 때 나는, 시절이 어려웠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소설 또는 순수했던 화자가 세상과 접촉하면서 농익은 중년으로 변해가는 소설을 생각했다. 이 책에서도 라일라라는 소녀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점점 나이 들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한 편의 성장소설로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에 와서 나는 이 책은 한 소녀의 성장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 개인의 성장이야기가 아니라 한 집단의 성장이야기 같았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세상의 올가미와 그물이 위협하는 황금 물고기인 라일라로부터 눈을 돌리니 수많은 황금 물고기가 라일라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라일라들’이었다. 라일라처럼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들도 또 다른 황금 물고기였고, 사회의 뒤편에서 가늘게 호흡하는 소수자들도 황금 물고기였다. 한편 아직도 식민 시대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일부 백인들, 소수자를 억압하는 지배자들은 황금 물고기를 가두려는 그물이며 올가미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라일라의 성장이야기라기보다는 라일라가 대표하는 각 세계의 소수자들의 ‘역사’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서구인들의 비서구인들에 대한 식민주의. 식민주의는 실패했지만 차별과 의식 속의 지배는 아직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의식 속에 존재하는 차별은 현실에서 다시 발현된다. 그 악순환. 서구인들의 비서구에 대한,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경제적 문화적인 지배는 계속되고 있다. 100 여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지배당해 온 그들의 경제와 문화는 식민모국인 유럽의 여러 나라에 종속되어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아직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많은 것이다. 우리가 산업화시대 때 농촌에서 서울로 옮겨 갔듯이, 일제강점기 때 출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듯이 말이다. 하지만 식민모국으로 옮겨간 그들의 삶은 라일라가 목격한 자블로 거리의 흑인들의 삶과 일치한다. 그들은 뿌리 깊은 차별 속에서 식민모국인들의 공공의 적으로, 그들 사회의 하층민으로 자리 잡는다.

 

 르 클레지오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악순환에 대해 분명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구인이 아니다. 백색 피부가 아닌 검은 피부의 소녀이다. 바로 이 사실만으로도 그 해답은 찾을 수 있다. 피지배자,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본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장 빌랑이라는 프랑스인 교수는 라일라와 함께 힐랄 부족의 마을로 들어간다. 나는 이 장 빌랑이 바로 작가 자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장 빌랑은 작가만은 아니다. 장 빌랑은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의식 속의 차별을 간직한 서구인,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백인만이 지배자는 아니다. 우리도 의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소수자에 대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저지르는가. 외국인 노동자들, 혼혈아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식민주의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장 빌랑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라밀라가 도착한 마을은 라밀라만의 고향인가? 아니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도착해야 하는 마음속의 고향이다. 현실 속의 차별과 억압을 부정하고, 또다른 ‘라밀라들’의 손을 잡고 함께 도착해야 할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작가가 바라는 세계도, 내가 바라는 세계도 그곳에 있다. 라밀라가 말한 사랑의 시대는 바로 그 고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라일라들’의 손을 잡고 그 고향으로 가야한다. 다소 계몽적이고 공익광고 같은 것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얻은 결과이자 교훈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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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청목 스테디북스 71
다니엘 디포우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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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에밀'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읽혀야 될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꼽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주위로부터 로빈슨 크루소가 소위 세계명작이라는 이유로 읽기를 강요당해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않다고 나는 최근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은 후에 바로 드는 생각은 이 책이 왜 세계명작일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가치를 갖는 것은 높은 문학성 때문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가지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중류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편안하다고 충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모험을 떠나는 로빈슨의 모험심이 아이들에게 주는 좋은 영향 때문에 소위 세계명작으로 지속적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진출 시대에 뒤이은 영국의 해외 확장 시대와 맞물려서 출판되었다. 그만큼 이 책은 당시 영국인들의 확장주의와 그에 따른 자신감, 모험심 등을 담은 시대적 산물이다. 로빈슨이 무인도에 살게 된 이유도 흑인 노예를 수송하는 일을 하러 아프리카로 가다가 생긴 일이었고, 로빈슨이 하인으로 삼는 프라이데이 또한 백인에게 충성스러운 흑인 노예를 표상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당시 시대의 서구확장주의와 서구인의 자신감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의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다원주의가 대두되고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21세기에 이 책이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또 하나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에 대한 것인데, 이 책의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끊임 없이 생산해 낸다. 섬에 혼자 남겨지면 고독감에 지쳐버릴 것 같은데 로빈슨은 그렇지 않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섬에 홀로 있으면서도 고독에 대해서 깊이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는데 생계를 위한 생산만 충족된다고 살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심과 굳센 의지, 독립심, 자신감은 읽는 이에게 감동과 희망 그리고 교훈을 주겠지만 너무 인간같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로빈슨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도서출판 청목'의 번역본에 대해 너무 실망스러웠다는 점이다. 오자가 너무 많았다. 오자 한 두 개 정도는 실수로 봐줄 수 있지만 너무 잦은 오자는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무리 저렴한 가격의 문고본이라도 품질은 일반 서적에 뒤떨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출판사의 배려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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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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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있어서 이 소설이 매우 불편하고 거부감을 일으키며 지치게 만드는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자로 잰 듯한 정교한 묘사로만 이루어진 소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묘사. 다른 소설에서 이런 식의 묘사가 잠깐 나와도 왠지 거북스럽게만 느껴졌던 나로서는 이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시선에 의한 서술만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화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식사습관 등의 화자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들뿐이다. 뿐만 아니라 화자가 그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림자와 벽이 만드는 각도와 같은 화자의 평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실들만 나열될 뿐이다.

도대체 이 소설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인지도 의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밤과 낮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시간의 연속성이 없다. 저녁은 그냥 저녁이고, 아침은 그냥 아침이다. 아침에서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된다는 당연하고 자명한 진리는 이 소설에서만은 예외였다.

또한, 이 소설에서 사건은 - 두 줄 이내로 서술할 수 있을 만큼 - 거의 없다. 하지만 한 사건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프랑크는 자기 집 드나들 듯이 계속 A의 집을 방문하고, A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나눈다. 소설에 나온 횟수만 따지면 프랑크와 A는 적어도 열 번은 시내를 왕복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데, 같은 사건마저 계속 반복되어 서술되어 있으니 점점 이 소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기법 상의 심정적 거부감과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와 같은 장면에 대한 계속적인 반복, A를 쫓는 화자의 집요한 시선 그리고 ‘질투’라는 제목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일지는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에서 이 소설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고통스러운 관찰의 기록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 그 어디에도 화자가 A의 남편이라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화자가 A의 남편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큰 단서는 흑인 하인이 화자에게 “주인마님께선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다. 하인이 A를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보고할 때에는 화자가 A보다 높거나, 상응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나는 상황적인 근거에 의해서 화자가 A의 남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A에 대한 비정상적인 화자의 시선이 이해가 간다.

프랑크는 자신의 집도 아닌데도 A와 화자가 살고 있는 집을 자주 방문한다. 그리고 A와 둘이서 테라스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한다. 화자는 프랑크와 A의 친밀한 관계에 질투가 난다. 처음에는 그 질투가 지나가는 감정 상태의 하나였겠지만 프랑크와 A의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서 병적인 상태로 커졌을 것이다. 그는 농장 일을 돌보기보다는 블라인드를 통해서 A를 감시하고 지켜보는데 집중한다. 소심한 성격의 화자의 집착과 질투는 자폐적인 수준에 까지 이르고, A와 A의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묘사가 더더욱 정교해지고 치밀해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프랑크와 A가 시내에 같이 나가서 외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낯선 남자와 밤을 새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화자의 초조함과 극도의 질투와 분노는 추측하고도 남는다.

이 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프랑크와 A의 장면들은 A가 프랑크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끊임없이 화자의 머리 속에서 반복된 영상들은 아니었을까? 프랑크와 A가 저녁을 먹던 어느 날의 장면, 시내에 나가자고 모의(?)하던 장면,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하던 장면들이 질투 섞인 분노와 함께 화자의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A와 프랑크의 외유 이전부터 이미 화자는 프랑크와 A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고, 병적이고 자폐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날의 일로 폭발된 것이다. 물론 이런 정신병적인 기억의 반복과 함께 행동도 이루어진다. 화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지네가 죽은 자국을 지우기도 하고 아내의 방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기억의 반복과 행동들은 서로 결합되면서 화자의 극한의 초조와 분노의 모습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된다. 그 장면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었지만 - 아니면 화자의 머리 속에서 확대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사실에 기초한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 소설에서 그 사건들의 배열은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가 외박한 극도의 초조 상황 속에서 화자의 머리 속에서 두서없이 반복되는 영상일 뿐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은 아내가 프랑크와 외박한 후 돌아온 이후일 것이고, 그 중간 부분들은 모두 아내가 외박하던 밤과 새벽 사이에 화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났던 영상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한 남자의 정신병적인 관찰과 상념으로 이루어진 질투의 기록이 될 것이다.    

참으로 섬뜩하다. 나는 이 소설의 이후를 생각하기가 겁난다. 이미 미쳐버린 이 남편은 A를 어떻게 했을까. 이 곳은 주위는 바나나 농장으로 가득차있고, 이웃이라고는 프랑크 일가밖에 없는 이 고립된 아프리카의 마을이다. 밤마다 짐승의 소리로 뒤덮이는 섬뜩한 곳이다. 그런데 소설의 끝은 저녁 6시 반의 칠흑 같은 어둠이 퍼진 조용한 집을 보여주며 끝난다. 집에는 A와 화자밖에 없을 것이다. 흑인 하인은 그들만의 거처에 머물렀을 것이고. 아내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미치광이 남편은 이 저녁에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소름끼치는 감정이 이렇게 소설을 하나의 줄기로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차갑고 섬뜩한가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앞서 내가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었던 요소들로 제시한 것들은 사실, 이 소설의 분위기와 결말을 위한 작가에 의해 의도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화자에 의한 냉혹한 묘사와 사건의 계속적인 반복,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구성들이 화자의 정신병적인 모습과 연결되어 얼마나 이 소설의 결말을 더 돋보이게 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이런 로브그리예에 대한 나 자신의 재평가와는 별개로 이 소설을 다시 읽을 자신은 없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 자유롭다. - 물론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나 같은 3류 독자는 문학 작품 보다도 신문의 가십 기사 한 조각 안에서 가장 자유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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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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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懲毖'란 <시경> '소비小毖'편에 나오는 문장, '予其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즉, 징비록은 유성룡이 자신이 겪은 전란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다시 분석하여 후대에 교훈으로서 남기려 한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7년 전쟁)의 십여년 전부터 노량해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하면 보통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우리가 결국에는 이긴 전쟁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국사 교과서나 우리들의 사고에서는 의도적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임진왜란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고, 우리가 질 수도 있었으며, 그나마 영토를 지킨 것은 명나라 군대의 도움도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전란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의 훈련이며, 전쟁 장비며 성이며 모든 것들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나마 전쟁을 대비해 축조된 성들도 요즘 말하는 '전시행정'으로 평지에 크게 지어놓았다. 전쟁에 대비한 어떤 짜여진 대비는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도 무지했다.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해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그 때 조선에서는 활을 쏘고, 짧은 창으로 대비하는 것에 그쳤다. 그것마저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성룡이 신립에게,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으니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라고 말하자, 신립은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라고 답했다고 한다. 얼마나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르는 소린가. 결국 신립은 평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다가 참패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뛰어난 장수도 없었다. 징비록을 보면 유성룡이 신립과 이일이 당시에 가장 뛰어난 맹장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립은 용감하긴 했지만 전략이 없었고, 이일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로, 왜군을 만나기만 하면 도망가는 처지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순신을 비롯해 여러 의병장들이 나중에 조선의 체면을 세우기는 했지만 한 나라에 이 정도로 뛰어난 장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현실인 것이다.

유성룡은 전란이 있기 전부터 신비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신비로운 징조를 인간이 몰랐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전란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비로운 징조들이 아니더라도 조정 돌아가는 꼴과 군사들의 현실 들을 보았으면 '지금 전란이 일어나면 당해낼 수가 없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미 전쟁의 징조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징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유성룡이 후대에 교훈으로 주려 했던 사실들은 성을 어떻게 축조하고, 지형을 어떻게 이용하고, 포대를 어떻게 쌓느냐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유비무환의 정신.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찾으며, 시류를 민감하게 주시해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하며, 나라 안으로 부터 기강을 다지는 것. 이 것이 유성룡이 말하는 국가와 개인의 전쟁대비법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이순신에 대한 대하드라마가 방영되고, 이순신에 대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하면서 임진왜란과 이순신, 원균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드라마 또한 이순신과 원균을 재평가하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고, 한 쪽에서는 역사왜곡이라고 맞서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잘 모르겠지만 이순신을 '성웅'에서 '인간이지만 훌륭했던 장군'으로 되돌려 놓고, 원균을 '동물'에서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옳지 않나 싶다. 물론, 기록과 여러가지 근거에 기초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유래없는 이 임진왜란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에도 옮겨졌으면 한다. 고전이 현재에도 가치있는 것은 그런 이유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고전을 새로운 감각으로 번역하고, 여러 삽화와 자료를 첨부한 서해문집 출판사의 '오래된 책방' 시리즈에 칭찬을 해주고 싶다. 초심을 잃지 않고 좋은 고전을 충실하게 계속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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