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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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있어서 이 소설이 매우 불편하고 거부감을 일으키며 지치게 만드는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자로 잰 듯한 정교한 묘사로만 이루어진 소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묘사. 다른 소설에서 이런 식의 묘사가 잠깐 나와도 왠지 거북스럽게만 느껴졌던 나로서는 이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시선에 의한 서술만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화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식사습관 등의 화자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들뿐이다. 뿐만 아니라 화자가 그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림자와 벽이 만드는 각도와 같은 화자의 평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사실들만 나열될 뿐이다.

도대체 이 소설은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인지도 의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밤과 낮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시간의 연속성이 없다. 저녁은 그냥 저녁이고, 아침은 그냥 아침이다. 아침에서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된다는 당연하고 자명한 진리는 이 소설에서만은 예외였다.

또한, 이 소설에서 사건은 - 두 줄 이내로 서술할 수 있을 만큼 - 거의 없다. 하지만 한 사건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 프랑크는 자기 집 드나들 듯이 계속 A의 집을 방문하고, A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나눈다. 소설에 나온 횟수만 따지면 프랑크와 A는 적어도 열 번은 시내를 왕복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데, 같은 사건마저 계속 반복되어 서술되어 있으니 점점 이 소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기법 상의 심정적 거부감과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와 같은 장면에 대한 계속적인 반복, A를 쫓는 화자의 집요한 시선 그리고 ‘질투’라는 제목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일지는 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설에서 이 소설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고통스러운 관찰의 기록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 그 어디에도 화자가 A의 남편이라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화자가 A의 남편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큰 단서는 흑인 하인이 화자에게 “주인마님께선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다. 하인이 A를 주인마님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보고할 때에는 화자가 A보다 높거나, 상응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나는 상황적인 근거에 의해서 화자가 A의 남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렇게 본다면 A에 대한 비정상적인 화자의 시선이 이해가 간다.

프랑크는 자신의 집도 아닌데도 A와 화자가 살고 있는 집을 자주 방문한다. 그리고 A와 둘이서 테라스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도 한다. 화자는 프랑크와 A의 친밀한 관계에 질투가 난다. 처음에는 그 질투가 지나가는 감정 상태의 하나였겠지만 프랑크와 A의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서 병적인 상태로 커졌을 것이다. 그는 농장 일을 돌보기보다는 블라인드를 통해서 A를 감시하고 지켜보는데 집중한다. 소심한 성격의 화자의 집착과 질투는 자폐적인 수준에 까지 이르고, A와 A의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묘사가 더더욱 정교해지고 치밀해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프랑크와 A가 시내에 같이 나가서 외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낯선 남자와 밤을 새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화자의 초조함과 극도의 질투와 분노는 추측하고도 남는다.

이 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프랑크와 A의 장면들은 A가 프랑크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끊임없이 화자의 머리 속에서 반복된 영상들은 아니었을까? 프랑크와 A가 저녁을 먹던 어느 날의 장면, 시내에 나가자고 모의(?)하던 장면,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하던 장면들이 질투 섞인 분노와 함께 화자의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A와 프랑크의 외유 이전부터 이미 화자는 프랑크와 A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고, 병적이고 자폐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날의 일로 폭발된 것이다. 물론 이런 정신병적인 기억의 반복과 함께 행동도 이루어진다. 화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지네가 죽은 자국을 지우기도 하고 아내의 방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기억의 반복과 행동들은 서로 결합되면서 화자의 극한의 초조와 분노의 모습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이 분명하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된다. 그 장면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었지만 - 아니면 화자의 머리 속에서 확대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사실에 기초한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 소설에서 그 사건들의 배열은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내가 외박한 극도의 초조 상황 속에서 화자의 머리 속에서 두서없이 반복되는 영상일 뿐이다.

이 소설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은 아내가 프랑크와 외박한 후 돌아온 이후일 것이고, 그 중간 부분들은 모두 아내가 외박하던 밤과 새벽 사이에 화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났던 영상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한 남자의 정신병적인 관찰과 상념으로 이루어진 질투의 기록이 될 것이다.    

참으로 섬뜩하다. 나는 이 소설의 이후를 생각하기가 겁난다. 이미 미쳐버린 이 남편은 A를 어떻게 했을까. 이 곳은 주위는 바나나 농장으로 가득차있고, 이웃이라고는 프랑크 일가밖에 없는 이 고립된 아프리카의 마을이다. 밤마다 짐승의 소리로 뒤덮이는 섬뜩한 곳이다. 그런데 소설의 끝은 저녁 6시 반의 칠흑 같은 어둠이 퍼진 조용한 집을 보여주며 끝난다. 집에는 A와 화자밖에 없을 것이다. 흑인 하인은 그들만의 거처에 머물렀을 것이고. 아내와 프랑크의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미치광이 남편은 이 저녁에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소름끼치는 감정이 이렇게 소설을 하나의 줄기로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차갑고 섬뜩한가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앞서 내가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었던 요소들로 제시한 것들은 사실, 이 소설의 분위기와 결말을 위한 작가에 의해 의도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화자에 의한 냉혹한 묘사와 사건의 계속적인 반복,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구성들이 화자의 정신병적인 모습과 연결되어 얼마나 이 소설의 결말을 더 돋보이게 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이런 로브그리예에 대한 나 자신의 재평가와는 별개로 이 소설을 다시 읽을 자신은 없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 자유롭다. - 물론 기존의 소설들 안에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나 같은 3류 독자는 문학 작품 보다도 신문의 가십 기사 한 조각 안에서 가장 자유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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