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법이 없으므로,
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세속적 낙관주의자들,
곧 자격에 대한 감각이 잘 발달한 낙관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에 바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대부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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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하게도 이 강좌의 까다로움은 여러분이 이미 아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는데, 그 방법은 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친숙한 것들이 낯설어진 뒤에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인식은 순수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인식으로 불안을 느낀다고 해도
생각과 지식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 마이크 샌델 '정의' 첫 번째 시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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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이 이야기면 설명이되겠군.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어서 한꺼번에 많이는 살 수 없고,
조금 사서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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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것 자체는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떤 한 시기에 달성되어야만 할 것이

 

달성되지 한 채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니다.



 

나는 정말 알알하게 내 온몸으로 느낄수 있는 생의 시간을

 

자신의 손으로 쥐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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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사베드라는 안헤도니아라고 진단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나오는 것으로,

고산병과 아주 흡사하다고 규정한 병이다.

스페인의 이 지역에서는 여행자들 사이에

흔한 병이라고 했다.

이곳의 전원적인 풍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런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해서

격한 생리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눈앞에 다가오면 무시무시하고 불안해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클로이와 나는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헤도니아(행복)를 기억이나 기대 속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행복의 추구는 중심적 목표로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이런 아리스텔레스주의의 실현이

아주 먼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암묵적 믿음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믿음이 우리가 아라스 데 알푸엔테에서

그리고 그 보다는 덜하지만 서로의 품에서

발견한 전원 풍경에 의해서 도전을 받은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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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항상 꿈꿔오던 환상이 눈앞의 현실로 펼쳐질 때

나는 의연하게 그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항상 그 자체를 과분하게 여기고,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행복을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내려보낸다.

그렇게 행복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또 행복을 찾아 떠나는

어리석은 여행을 우리는 오늘도 하고 있다.

 

한번쯤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행복한 자리인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저 부인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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