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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중병에 걸렸을 때 생기는 변화 하나는, 믿음이 가던 말들과 익숙한 원칙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p. 87)
누구든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것에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일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생산벨트에서 불량품 찾아내듯 발견하려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과정은 종교인이 바라보는 무신론자에게 매우 유의미 하고 기대감이 들게 하는 순간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신은 위대하지 않다’던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생각할 때 일부 극렬한 종교인들은 그에 대해 서슴없이 악담을 쏟아 부었다. 대표적인 주장은 신을 모독하던 그에게 목소리를 잃게 만드는 식도암에 걸리게 된 것은 틀림없는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내심 기대를 걸고 있던 이들은 히친스가 자신의 평생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며 사실 신은 실재하면서 나같은 이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히친스는 이러한 소소한 기대를 저버리며 말하기를, 신의 복수라는 것이 고작 과거 자신의 생활방식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암’ 뿐이라면 그의 무기고는 텅 빈 것에 다름 없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벼락을 내리거나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 훨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유용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의 걱정은 그가 회복했을 때 이것은 신도들의 기도 덕분이라는 주장 같은 것들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극심한 고통과 방사선 치료를 견뎌 내며 잠깐 잠깐 의식이 돌아오거나 몸이 안정을 찾았을 때 생각나는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삶의 여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을 때 내가 쓰는 말은 어떨 것인가. 조금도 진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사로운 말보다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수백가지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말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에 대한 비난이나 악의를 두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선순위에서 더 중요한 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가 어떤 존재에게 악의에 가득찬 말을 쏟아 낸다면 그것은 그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니체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너를 죽일정도의 고통이 아니라면 너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 말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누군가에게 들린다면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 저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격언들이 갖는 무책임함에 대해 냉소한다. 폴린 케일의 말을 인용해 ‘그곳을 사람이 격려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곳’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마음이나 희망적인 생각이 강요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스스로 잘 견뎌내고 있고, 내가 암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암과 나와 싸우고 있는 저자에게도 사람들의 격려는 때때로 오히려 힘빠지게 하는 어떤 것이 되기도 했다. 니체의 이러한 격언 또한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지도, 눈 앞에 두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죽음을 지금의 고통에 비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실 우리에게 죽음은 그저 비교 대상이거나, 상대적인 고통의 크기를 비교 할 때 인용되는 정도였던 것이다.
끝까지 웃을 수 있게
고통의 순간에도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긍정적인 마인드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유머’라고 하고 싶다. 물론 크게 범주화 시키자면 같은 쪽에 속하겠지만 유머는 조금 냉소적인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는 4기 암의 좋은 점이 5기 암은 없는 점이라고 한다거나, 영국을 못 볼것 같냐는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니,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식의 생각은 보는 우리에게 안타까운 웃음을 준다.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강의였다. 그는 암 말기 환자이지만 여전히 여기 있는 분들보다 팔굽혀 펴기를 잘 할 수 있다고 시범을 보이고, 암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경건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암 환자를 대하는 이에게 재미 없게 구는 것 만큼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아마도 죽음을 앞둔 변화에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3분의 1이나 줄어버린 몸무게도, 갑자기 나오지 않게된 목소리가 아닌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타인의 시선이었던 같다.
그의 마지막 장은 아주 짧은 문장들로 이뤄졌다. 글의 길이가 짧아진다는 의미는 그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짬짬이 여유가 생길 때 온 정신을 끌어모아 글을 썼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일찌감치 죽음의 과정을 인정하고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한 반응까지 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죽고 난 후에 들었을 말들을 여전히 살아서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겠지만, 한편으론 괴로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마지막까지 그는 신이 내리는 벌이 고작 암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안쓰러운 존재라고 말하는 자신감을 보이면서도, 오히려 타인의 동정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약간의 동정이 서린 말은 의도와 달리 최종적인 느낌을 준다. 과거시제, 도는 마치 고별사 같은 느낌 때문이다. 꽃을 보내는 것은 생각만큼 좋은 일이 아니다. (p.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