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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당신이 결정한다
샤론 모알렘 지음, 정경 옮김 / 김영사 / 2015년 9월
평점 :
히틀러는 T-4작전이라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살을 시작했다. 우생학적 믿음에 근거했던
이 정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 말고도 장애인, 정신질환자, 범죄이력자 등 사회 부적격자에 대한 청소 정책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정책을 그들의 논리로 보자면 결핍되고 이상적 변이를 일으킨 유전자들을 소멸시킴으로써 후세는 더 완벽한 인간만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랄프의
경우를 보자. 그는 완벽한 외모를 가진 덴마크 남성으로 정자 기부를 통해 최소한 44명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유전자에
'제1형 신경섬유종증'을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외모와 성향을 가진 그가 이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몰랐을까. 이는 유전발현의 다변성이라는 개념을 간과한 것으로, 유전적 변이나 유전병에 의해 한 사람이 영향 받는 정도를
측정하는 단위를 말한다. 유전자가 전해준 정보는 인쇄된 글씨처럼 명백하지만 발현되는 것에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를 통해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유전자가 아닌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개념이 나온다.
지난 2013년 헐리우드
스타의 충격적인 수술이 있었다. 섹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유방젤제 수술이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어떠한 병에 걸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지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선제적으로 유방을 절제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환자를 두고 예방생존환자라고 한다. 그녀는 검사를 통해 유방암
확률이 65%나 되는 BRCA1이라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 또한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녀는 선제적
절제 수술을 선택한 것이다. 유전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대응하는 방식이 이런 것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일단 정보를 알게 된다면 그 발병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진행시킬 수는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예이다.
물려 받은 유전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안 좋은 예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알콜을 분해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족한데 이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술은 마시면 는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전혀 틀린 말도 아니어서 대학때 소주 두 잔도
못 마셨던 내가 지금은 한 병 정도를 마시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유전자의 결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생각과는 정 반대의 케이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선천적인 유전에도 불구하고 이를 환경에 맞춰 극복(?)해 나가는 선례로는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트런트 러셀이 90이 넘도록 담배를 즐겼다고 해서 원래 담배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도 그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동료가 매일 밤새 술을 마신다고 해서 나도 그런 행동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저자는 우리 몸에서 취약한
유전자에 대해서 발견하고 이에 대해 미리 대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첫 장에서는 얼굴의 생김새만으로 어떠한 유전적 결함이
있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별도의 유전자 지도를 그리지 않고도 우리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에서 수없이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게된 취약한 유전자에 대해 작게는 생활 습관을 고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선제적 수술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 몸의 입장에서 보자면
왜 우리는 병에 걸려야만 하는 것일까, 혹은 왜 몸에 이상이 있는 채로 태어났어야만 할까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수십억개의 세포가 하나의 오류 없이 제역할을 해낸다는 것이 더 신기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유전자의 분석을 다
마쳤다고 거기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마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질병이 어떤 유전자의 오류에 의해 생겨나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선천성 무통각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SCN9A라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이런 병이
생겨났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통에 대한 400여개의 유전자들에 대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감사하고 미안해 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아직 우리는 수없이 펼쳐진 유전자 지도의 아주 일부분을 해석했을 뿐이다. 오류가 발생했을 때 이를 역으로 추적하거나 다수의 이상이
발생하는 사람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답을 유추해갈 수는 있지만 그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하지만, 유전자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앞으로도
무한하고 인류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