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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자체 - 40억년 전 어느 날의 우연
프랜시스 크릭 지음, 김명남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생명의 기원을 찾으려는 문제는 항상 양갈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이 생명체들이 어느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가장 작은 원자 단위부터 우연히 생성되어 진화에 진화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인지이다. 진화론의 반대편에서 종교적 의미를 과학적으로 윤색한 '지적설계론'이라는 이론이 있다. 지적설계론이란 인간을 비롯한 고도로 정교한 시스템에는 반드시 설계자가 존재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인간은 진화가 아닌 외부의 절대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론이다. 그렇다고 프랜시스 크릭이 '지적설계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그 이론에서 따온것은 바로 무언가가 생명체를 지구에 가져다 놓았다는 사실이다.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신'일 것이라는 주장이고, 크릭은 그것이 바로 외계의 이름 모를 생명체라는 주장이다.
이를 다룬 영화가 종종 있는데, 멀게는 1968년에 만들어진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가깝게는 지난 12년 리들리 스콧이 '에일리언'의 프리퀄 형식으로 제작한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특히 프로메테우스는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단순히 외부에서 돌기둥을 하나 세워주는 것에 비해 외계 생명체의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근본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초반부에 외계의 생명체는 어떤 이유에선지 지구에 홀로 남겨져 어떤 액체를 마시고 산산히 분해되어 그의 DNA가 지구에 흐르던 물에 뒤섞인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그럼, 책으로 돌아오자. 이 책의 저자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물학자이다. 그렇다고 이 이론이 절대적이라는 근거는 아니지만, 그의 주장이 단순한 상상이나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것임을 알려주는 정도는 될 것이다. 그는 레슬리 오겔과 이러한 가설을 주장한다. 수십억년 전 알 수 없는 외계에서 무인 우주선의 머리 부분에 실려 지구에 떨어진 미생물들이 지구 생명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향범종설'이라고 한다. 이는 프로메테우스에서 외계의 생명체를 지구에 떨어뜨려 지구 생명의 기원을 만들었다는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저자는 원시수프에서 지금의 생명체들이 생겨났다는 주장에 대해 여러 근거를 제시하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원시 지구의 대기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보자. 1953년 스탠리 밀러는 실험을 통해 원시 지구와 같은 상황이라면 유기화합물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실험을 성공시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때는 크릭이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해 발표한 시기이다.) 스탠리 밀러의 실험은 이런 식이다. 원시대기와 비슷한 성분인 메탄, 암모니아, 수소, 수증기를 단힌계에 담아 놓고 방전시킨 뒤 기체를 순환시킨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원시 대기의 성분들은 번개, 자외선, 열 같은 외부 에너지를 통해 유기물의 형태로 바뀔 수 있다는 가설이었다. 이 실험 결과 물 속에는 단백질에서 발견되는 글리신과 알라닌을 포함한 유기 화합물들이 다양하게 들어있었다. 하지만 이 실험의 문제점은 원시 대기에 산소가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다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실험은 원시 지구의 대기가 환원성(수소가 다량 함유되고 산소는 없는)이라는 것을 가정했으나, 지금의 연구는 원시 지구가 산화성(산소가 포함된 오늘날 비슷한 대기)이었다는 증거를 여럿 찾아내기도 했다. 물론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원시 대기의 지구 성분을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저자는 그밖에 여러 근거를 통해 원시 지구에서 생명체가 생겨나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부로부터 생명체가 유입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외계의 어떤 생명체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머지 않아 종말을 앞두고 있을 때 가장 가까운 별 중에서 생명체가 전혀 없는 지구를 발견을 했을 수 있다. 그들이 옮겨 가기에는 가장 가까운 별이 수십 광년이 떨어져 있다면, 이주는 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별에 있던 생명체를 옮길 수 있다면 이는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산소 없이도 살 수 없는 세균이었고, 그들이 지구의 어느 곳에 떨어져 지금의 지구 생명체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큼직한 주장만 모아 놓으니 공상과학소설 같은 면도 없지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라는 것이 철저한 실험과 증거를 통한 증명의 과정이지만 그 시작은 '가설'로부터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괴리감이 많이 사라진 것은 그의 이론이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면서도 터무니 없지는 않은 그의 이야기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