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한 노인이 방에 갇혀있다. 하루에 86,400장의 사진을 찍는 카메라가 머리 위쪽에 있지만, 그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물건에는 물건을 가르키는 영어 철자가 붙어 있고, 우리는 그가 그 사물을 말할 때 단어를 읽고 있는 것인지 사물을 보고 구별하는 것인지 조차 알수가 없다. 그는 그 자체로 공백 상태이므로 저자는 이를 Mr. Blank.라고 부르기로 한다. 스스로의 삶을 기억할 수 없는 존재란 어떤 것일까. 더구나 그에게는 도저히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한번씩 찾아와 분노를 내비친다. 그에 비해 블랭크 씨는 기억이 희미한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노인이다. 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이에게 끝까지 잘못을 밝혀 내고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노인은 짧아지는 기억력 때문에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기록을 남긴다. 신기한 것은 그 이름을 볼 때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독자인 나는 작가의 평소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쉽게 답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이로 인해 더 초조해지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뭔가 답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안나, 

피터 스틸먼 주니어

팬쇼.

.....

존 트로즈,

소피, 

대니얼 퀸, 


이름을 보니 왠지 좀 익숙한 느낌이 처음부터 있었다. 뭔가 알것 같긴 한데. 미스터 블랭크, 아니면 폴 오스터 이제 깜짝 놀랄 결론을 내란 말이야. 도대체 그 이름들이 뭐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아 맞다. 이 사람들. 폴 오스터 작품 속 주인공들. 아. 그러면 이제야 들어 맞는다. 그가 어려운 임무를 맡기고 위험한 곳에 보냈던 인물들은 죄다 폴 오스터 본인이 만들어 낸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죽을 위기까지 몰아 넣었던 작가에 대해 단체로 반기를 들고 일어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노인 이야기 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의사 새뮤얼 파가 다음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하자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인의 머리에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책을 하나씩 열어서 주인공 이름을 확인해 봤다. 뉴욕3부작을 열자 마자 나오는 이름 스틸먼. 그러면 내내 미안하다고 하면서 노인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안나라는 인물은 어디서 나왔을까. 안나 블롬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폐허의 도시'에서 오빠를 찾기 위해 도시로 취재를 떠난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그의 첫 번째 탐정이자 이제는 변호사가 된 남자 '퀸'은 뉴욕3부작 '유리의 도시'에서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 탐정이 되어버린 남자이다. 그리고 그 첫장면에서 온통 하얀 옷을 입은 피터 스틸먼이 등장한다. 뉴욕3부작의 마지막인 '잠겨있는 방'에는 드디어 팬쇼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끔 폴 오스터의 글을 볼때면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커다란 오스터 공화국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곳에서는 작가와 등장인물 간의 차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유리의 도시'에서도 탐정 놀이가 뜻대로 되지 않는 퀸이 실제 탐정인 폴 오스터라는 인물을 찾아가기도 한다. 폴 오스터도 등장인물이고 등장인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이다. 그가 만들어 낸 세계는 '기록실로의 여행'으로 다시 한번 선명해진 느낌이다. 그가 등장인물들에 가졌던 미안한 마음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쓰여진 이 작품은, 그들을 하나의 단독한 존재로서 인정한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스터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기묘한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우연의 요소가 모든것을 바꿔 놓기는 하지만 판타지나 있을 수 없는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희박한 확률로 일어날 법한 일을 쓰기 때문에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도 조금은 비현실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믿기 힘든 일이라고 해서 가능성을 0으로 놓는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 할 것인가. 폴 오스터의 글이 흥미를 끄는 것은 있을법 하지만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일어난 일처럼 이야기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폴 오스터는 다시 그 노인을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려 버린다. 그리고 마치 남의 일인양 너스레를 떨며 말을 한다. 


얼마 안 있으면 한 여인이 그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음식을 먹여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여인을 누구로 할 것인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간다면 안나를 보낼 작정이다. (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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