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인생
이동원 지음 / 포이에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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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구질의 공이 회전을 이용해 궤적의 변화를 만드는 것과 반대로 너클볼은 회전 없이 던져지는 것이 특징이다. 축구든 골프든 탁구든 공을 이용하는 운동은 모두 그 회전을 이용한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끝없이 변화를 일으키려 노력하듯, 경기에서 공은 회전을 통해 수많은 변수와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공이 회전하지 않을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이 회전하지 않는 순간 벌어지는 일은 길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회전하는 공은 열심히 내달리는 인생처럼 정해진 길을 따르고 다만 얼마나 많은 회전을 하느냐에서 변화의 정도가 달라질 뿐이다. 하지만 회전하지 않는 순간 정해진 선은 한순간 사라지고 공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스스로 변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공기와의 조우를 통해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마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성공한 사람, 성공할 줄 알았는데 실패한 사람, 그리고 실패한 사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이 범주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다음 물음은 '성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주제는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천착하고, 어쩌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처럼 안고 가기도 한다. 성공한 인물은 경찰청장이다. 그는 그저 모난 구석 없이 묵묵히 자기 길을 가다 보니 먼저 낙마한 동기들 틈에서 경찰청장이 된 사람이다. 다음 성공하다 실패한 우태진은 이십 대 중반에 프로야구 투수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얻고 마침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느덧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로 나설 예정이다. 마지막 한 명, 실패한 사람은 인질범이다.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가 달린 엉성한 인생으로 출발한 그는 27명의 인질을 잡고 있다. 그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우태진이 한국시리즈 마지막 선발투수가 될 것. 그가 내려온다면 누군가 죽을 것이라는 것.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게 인생의 한계다.(p.34)

아무리 집중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는 수도 없이 많다. 우태진은 왕년의 에이스였지만 한국시리즈 7차전은 의욕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위험한 순간은 타자가 일순한 다음이다.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선수들은 확연히 눈에 익은 공을 쳐내기 쉬워지는 법이다. 우태진의 위기이다. 더 나아갈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지만 쉽사리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그때 그는 '너클볼'을 던진다. 인생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 나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듯 너클볼은 공기와 만나 변칙을 만들어 낸다.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선 그 모든 힘과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너클볼은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가 없다.... 일단 공을 던진 다음에 마운드와 타석 사이를 흐르는 바람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미세한 바람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야 한다. (p.75)

너클볼을 던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직구를 던질 수 없어서 느린 볼을 던진다는 말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노력을 그만두고 바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말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의 공통점이라면 당연히 '야구'가 되겠지만, 실질적인 교집합은 바로 '너클볼'이다. 그들이 속해있던 레일 위를 벗어나 비로소 자연스러워지는 삶, 스스로 바꿔보려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삶이 그들이 향하는 유일한 목표이다. 그것이 어긋나든 옳은 방향으로 흐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이다. 이것은 오독하면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상투적 문구와 혼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의미는, 내가 흐름에 나를 맡겼다면 결과야 어떻든 다 상관없다는 의미이다. 등장인물들이 팔의 힘을 빼고 바람에 몸을 맡길 때 과연 그들의 '완벽한 인생'은 이뤄졌을까. 이 소설은 뒤로 갈 수록 '완벽한' 것의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퍼펙트'의 개념과 다른 것임을, 그리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자꾸 되묻는다. 그리고 답은 역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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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지음, 윤길순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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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가장 위기를 겪는 시기는 언제일까. 그것은 당연히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독재자가 정권을 잡았을 때이다. 하지만 명백한 공격의 대상이 존재할 때는 그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동력이 결집된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표방한 위정자가 집권 했을 때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 시민들은 이 정도면 민주화가 됐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민주화 운동의 명분을 지지하지 않으므로, 민주화는 완성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부유한다. 


같은 논리로 페미니즘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는 언제일까. 그것은 여성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남녀평등이 충분히 이뤄졌다는 생각이 대체적으로 퍼져있을 때가 아닐까. 페미니즘은 세 번의 큰 물결을 일으키며 여성인권의 변혁을 주도했다. 192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지금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세 번째 물결 페미니즘의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거의 백년에 이르렀으니 이제 제법 여성의 인권은 모양새를 갖췄다고 생각하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과연 그럴까. 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운 정권에서 민주화 운동이 무력화되듯이, 남녀평등의 가치가 사회전면에 등장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편견과 오해 속에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1991년 출판된 이 책을 지금 펴내는 이유는 아마도 세 번째 페미니즘 운동이 왜 시작되었는지에서 접근하면,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여전히 약자인지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접근한다면 일부에서 일고 있는 의심과 오해에 대해 논리적 접근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저자가 주목하는 여성 해방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여성이 해방되는 것이다. 왜 '아름다움'으로부터 여성 해방이 시작되는 것일까. 우리는 아름다움은 여성들의 본능이며, 이를 선호하는 남성의 기호는 진화론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배워왔었다. 저자는 과거의 여성인권신장 운동의 결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면서 바로 아름다움의 신화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자 남성 중심의 기득권 세력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성적 판타지를 과장하여 여성을 옭아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그저 기준을 정한다고 정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데아처럼 불변의 가치인가가 중요해진다. 아름다움은 얼마나 자의적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굳이 몇십 년을 거슬러가지 않고 불과 15년 전만해도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계란형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V형 얼굴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계란형 얼굴보다 V라인이 대세로 올라섰다. 마오리족은 살찐 음부를 찬미하고 파동족은 축 늘어진 유방을 찬미한다는 사실은, 아름다움의 개념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인가를 설명해준다. 이 유동적인 개념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느냐의 문제에 대해, 그것이 바로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이 다소 비약적으로 설명된 부분도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가 여성의 능력보다는 외모에 높은 점수를 매기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30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와 함께 여성의 지위 또한 그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녀는 '아름다움'은 누군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를 위해 추구되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여권 운동을 벗어나 스스로의 욕망을 발견하고 자신에 몸에 대한 자각을 위한 발전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가치나 견고한 사회질서에 대해, 소수나 약자에게 발언권을 허용하고 권리를 부여하는 구도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운동이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차별을 옹호하는 것에서 벗어나 제3세계 여성이나 동성애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다는 상상의 관념은 항상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었다. 페미니즘 운동을 단순히 여성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부리는 고집으로 생각하지 않고, 불합리한 기준이나 부당한 기득권에 대한 이의제기로 인정하고 발전적으로 수용할 때 우리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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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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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가 발생한다. 학생 두 명이 같은 학교의 학생과 선생님을 향해 총기를 난사해 13명이 죽고 24명이 부상을 입는다. 이 책은 두 명의 가해학생 중 딜런의 엄마인 수 클리볼드가 쓴 사건 이후의 기록이다.  


슬픔이 공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육아서적을 보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을 훑어볼 때 머릿속 생각은 '어떻게 하면 아이가 잘될 수 있을까'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신이 오직 양의 방향으로만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음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은 부모가 그 책임을 게을리 했을 때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아이가 잘 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잘못되는 일은 벌어질 수 없다고 책을 보며 생각한다. 그 편견에 대한 반론이 바로 이 책이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사건의 원인이다. 당연히 폭력적인 게임이나 평소 아이의 성향이 용의선상에 오를 것이고, 마지막엔 반드시 '부모'의 책임으로 귀결될 것이다. 얼핏보면 그 원인이라는 것이 사건의 전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밝히는 원인들 대부분이 사실은 자신 혹은 자신의 아이를 사건의 당사자와 분리시키려는 시도이다. 사실 딜런이 성장하는동안 보인 행동이나 부모의 훈육에서 다른 가정의 그것과 확연하게 분리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 사실을 믿게 되면 평범한 우리 가족의 일원도 이런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범죄가 부모 탓이라고 믿고 싶은 더욱 강력한 이유가 있다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위험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 클리볼드가 우리아이는 잘못키운게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녀가 전혀 알지도 못하던 아들 딜런의 모습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알고자 17년간 기록하고 생각했다. 딜런이 우울증이 있었고 그것을 부모가 몰랐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런 성향은 청소년기의 방황의 한 부분으로 일시적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지만, 딜런은 쉽게 영향을 받는 스타일이었다. 그 옆에는 분노의 표출을 요구하는 에릭이라는 공범 친구가 있었다. 후의 연구에 따르면 '총격 가해자의 25%가 짝을 이루는데, 두 아이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영향을 쉽게 받고 의존적 성향이 있고 우울에 시달리는 아이'라고 한다. 이 글이 딜런의 부모 입장이기에 반드시 옳은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평범한 교육이 영향을 미친것이 아니라면, 딜런의 우울함과 반항적 기질을 표출시키도록 도발한 에릭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하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힘으로 구분되는 위계와 현실적인 자신의 지위를 인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돕고 싶은 친구가 있어도 그것을 할 수 없어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가 학교 짱을 쌍절곤으로 응징하는 장면을 되돌려 보는 이유는 누구든 중고생 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위계질서를 일거에 전복시킬 강력한 힘에 대한 열망은 남자 아이들이라면 태생적으로 타고 나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 모두의 아들 그 누구도, 그런 생각을 부모에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육을 잘못해서도 아니고 아이가 원래 폭력적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이것은 부모와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점이 그녀가 아들의 기록을 되짚어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이 남의 아이들을 죽인 사건이면서 자기 아들이 죽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에 죽을만큼 미안하고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괴로운 맘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아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없는 그녀의 처지가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어떤 친구는 그녀가 딜런을 원망하고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미안한 맘을 가질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자살예방 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FBI 조사반 자문이었던 퓨질리어 박사는 '에릭은 사람을 죽이러 학교에 갔고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딜런은 죽으러 학교에 갔고 그러다 다른 사람도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책에서도 반복해서 살인 후 자살하는 사건에 대해, 자살을 방지한다면 이에 따르는 살인 또한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다른 피해를 줄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에게 끝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일로 그녀의 삶은 위안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그 기록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남편 톰이 그의 묘비명에 '이제 끝이라니 감사합니다.'라고 할 것 같다는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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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개발의 정석 오늘의 젊은 작가 10
임성순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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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소설의 제목은 '자기계발'이 아니고 '자기개발'인가. 검색에 따르면 '계발'은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상이나 인성 따위를 포함한 슬기나 재주를 일깨운다는 뜻이고, '개발'은 인위적인 교육(훈련)을 통해 어떤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의미이다. 차이랄 것도 없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계발은 잠재되어 있는 어떤 능력을 일깨우는 것이고, 개발은 훈련시키지 않았다면 없었을 능력을 발전 시키는 정도라고 한다면 맞겠다. 굳이 그런 해석을 갖다 붙이는 이유는 이 책에서 주인공이 '개발' 하는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쓸데 없는 훈련을 통해 도달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하나 덧붙여 이 소설에서 '계발'과 '개발'의 가장 큰 차이점을 구분하자면 누구를 위해 발전시키느냐의 문제이다.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계발' 시키는 삶에서, 나를 위해 '개발' 시키는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줄거리다. 


누구를 위하여 삶을 울리나


자기계발이 사실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쓸모있는' 부속품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자기계발의 신화가 말짱 허상이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더이상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미움'받더라도 자기 삶을 사는 용기 쪽을 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부장은 표지의 흐리멍텅한 모습과는 달리 나름 대기업 부장이고 무려 임원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3년의 여유가 있긴 하지만 승진에 실패한다면 그 역시 옷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에 가 있는 딸과 부인을 위한 뒷바라지가 남아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면 자기계발을 해야할 이유 또한 분명해진다. 사실 그가 살아 남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잘 참았다는 이유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동기들 다 빠져 나갈 때 그저 묵묵히 자리를 보전했다. 


딱히 눈에 띄는 선수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특징이 있는 선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그가 속한 팀의 그가 속한 포지션에 별다른 경쟁이 없었을 뿐이었다. (p.53) 

퇴직의 기로에 서 있고,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면서 몸이 고장나기 시작하는 나이 40대. 이 부장은 중년남성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만성전립선염'이다. 그는 민망한 자세로 엎드려 의사의 손가락이 항문으로 들어오는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매주 의사를 보지 않고도 셀프 마사지를 할 수 있는 '아네로스'라는 기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지만 혼자 주 2,3회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럽다.


아네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아네로스라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도구로 마사지를 받다가 이 부장이 '오르가슴'을 느끼면서부터이다. 46년을 그저 잘 살아왔고, 남들도 다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슬픔과 기쁨을 교차 시키며 산다고 생각했던 이 부장에게 처음 느껴보는 쾌락은 자신의 인생전체를 일거에 전복시킨다. 


이전까지 이 부장의 세계는 아주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표와 결과가 있었고, 목표를 향하는 거대한 기계는 그의 인내를 연료로 움직였다. 세상은 쓸모 있는 것과 쓸데없는 것으로 나뉘었고,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면 효율을 위해 버려 마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쓸모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p.71) 

모든 것에 목적과 그에 응당한 결과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오르가슴'은 도무지 지금까지의 삶의 방정식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목적성을 띠고 일방적이면서도 쾌락을 선사하는 비대칭적인 삶이 있었다니. 이 부장에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그저 욕조에 앉아 자신을 위해 반신욕을 하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어색할 지경인데, 몇 단계를 뛰어 넘은 그의 삶은 기쁘게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찾다가 오프라인 모임에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그 모임 때문에 그의 삶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묘한 결말을 향해 이야기는 진행된다.  


특이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내용이나 구성도 흥미롭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소제목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 나온 7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깜빡 속기 좋다. '자기의 삶을 주도하라',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윈윈을 생각하다', '끊임없이 쇄신하라' 같은 주제는 사회적 성공의 요건이기도 하지만 개인적 삶의 성공 요건이라고 보기에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가는 과정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여기에 덧붙여 작가는 끊임 없는 자기개발(?)을 통해 오르가슴에 도달한 이 부장의 삶이야 말로 이 시대의 '정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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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탁재형 여행 산문집
탁재형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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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도 그것이 직업이 되면 게임이 지겨워지고,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도 그것이 훈련이 되면 견딜수 없게 되어버리지. 여행이 직업인 사람이 직업이지 않은 여행을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훈련이 아닌 방법으로 야구를 즐기는 것은 어떤 방법일까. 끝없이 마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 자꾸 끌어 앉히려는 당위의 부담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는 것. 여행의 시작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겠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모든 것의 자기장을 벗어나 이내 훌훌 날아가는 것.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그 스케일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 장을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자유스러워져 버리니까. 그 찰나의 공포를 견딜 수 있다면 누구든 떠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떠나고 싶어할 지도 모르지. 설혹 현실에 지극히 만족하는 누군가라 하더라도,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닐거야. 누구는 숨막히는 현실이 싫어서, 누군가는 지리한 일상을 견딜 수 없어서 떠나고 싶어져. 여행은 그런 꿈이 가능할지를 가늠해보는 예행연습과도 같은 과정이야. 엄마의 손이 근처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발을 떼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안도를 한 후에야 비행기에 오르곤 하잖아. 진짜 여행이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떠나야 하지만 그런 여행은 흔히 존재하지 않으니까. 고작 이렇게 짧은 일탈의 시간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지곤 하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탁피디의 짧은 시를 인생으로 바꿔서 들으면 어떨까.


여행 도중에,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비를 맞아도 괜찮은 여행이면 좋겠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한번은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가다 비가 온 적이 있었지. 급하게 뛰어서 비를 피한 곳은 운동장 귀퉁이의 테니스장 옆 짧은 지붕이었지. 20년도 전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해. 갑자기 쏟아지는 비때문에 운동장의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일제히 피어 올랐어. 거기서 네가 그랬지. '나는 비가 올 때 이 흙냄새가 좋아.' 그전까지 나는 그런 냄새를 수도 없이 맡았지만 그 냄새가 그렇게 근사하다는 생각은 처음 했지. 그 순간 나는 인생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지. 비가 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날만큼은 비를 맞아도 좋았어.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까. 


인생을 사는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지. 하지만 비가 와도 괜찮은 인생이면 더 좋겠지. 어짜피 비 내리지 않는 여행이 없듯이, 고통이 없는 인생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그것을 긍정한다면 더 그럴듯 하겠지. 그러고보니 '인생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보왕삼매경의 말과도 닮았어. 고통이 없다면 좋겠지만 우리 인생은 설사 곤란함이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도 괜찮은 여행이지 않을까. 모든 여행이 그렇겠지만 탁피디의 여행은 유난 우리의 인생을 닮았어. 그리고 운이 좋으면 당신과 만나는 행운이 있기도 하니 어찌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여행 책이 그렇지만 이 책도 특별해. 지독한 악취가 나는 취두부를 두고도 연인을 생각하게 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들은 수긍하고, 순간의 행복을 신앙하며, 모든 잊혀져 가거나 잊혀진 것들을 떠올리게 해주지. 그가 여행에서 던진 그물에 걸린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펼치다 보면 어느새 완전한 새 이야기가 만들어져. 그것은 여기서마저 언급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지구상에 없을 이야기들이었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것에게만 가능한 일이니까. 여행 산문집이라는 것이 꽤 괜찮다는 생각을 해. 여행은 무언가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안에 어떤 것이 무엇에 반응하는 지를 알아보는 과정이었으니까. 이 책을 보는 동안 꿈틀거리던 감정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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