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탁재형 여행 산문집
탁재형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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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도 그것이 직업이 되면 게임이 지겨워지고,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도 그것이 훈련이 되면 견딜수 없게 되어버리지. 여행이 직업인 사람이 직업이지 않은 여행을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훈련이 아닌 방법으로 야구를 즐기는 것은 어떤 방법일까. 끝없이 마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 자꾸 끌어 앉히려는 당위의 부담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는 것. 여행의 시작은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겠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모든 것의 자기장을 벗어나 이내 훌훌 날아가는 것.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그 스케일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 장을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자유스러워져 버리니까. 그 찰나의 공포를 견딜 수 있다면 누구든 떠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떠나고 싶어할 지도 모르지. 설혹 현실에 지극히 만족하는 누군가라 하더라도,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닐거야. 누구는 숨막히는 현실이 싫어서, 누군가는 지리한 일상을 견딜 수 없어서 떠나고 싶어져. 여행은 그런 꿈이 가능할지를 가늠해보는 예행연습과도 같은 과정이야. 엄마의 손이 근처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발을 떼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안도를 한 후에야 비행기에 오르곤 하잖아. 진짜 여행이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떠나야 하지만 그런 여행은 흔히 존재하지 않으니까. 고작 이렇게 짧은 일탈의 시간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지곤 하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탁피디의 짧은 시를 인생으로 바꿔서 들으면 어떨까.


여행 도중에,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비를 맞아도 괜찮은 여행이면 좋겠다.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한번은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가다 비가 온 적이 있었지. 급하게 뛰어서 비를 피한 곳은 운동장 귀퉁이의 테니스장 옆 짧은 지붕이었지. 20년도 전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해. 갑자기 쏟아지는 비때문에 운동장의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일제히 피어 올랐어. 거기서 네가 그랬지. '나는 비가 올 때 이 흙냄새가 좋아.' 그전까지 나는 그런 냄새를 수도 없이 맡았지만 그 냄새가 그렇게 근사하다는 생각은 처음 했지. 그 순간 나는 인생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지. 비가 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날만큼은 비를 맞아도 좋았어.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까. 


인생을 사는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지. 하지만 비가 와도 괜찮은 인생이면 더 좋겠지. 어짜피 비 내리지 않는 여행이 없듯이, 고통이 없는 인생이란 건 있을 수 없으니 그것을 긍정한다면 더 그럴듯 하겠지. 그러고보니 '인생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보왕삼매경의 말과도 닮았어. 고통이 없다면 좋겠지만 우리 인생은 설사 곤란함이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도 괜찮은 여행이지 않을까. 모든 여행이 그렇겠지만 탁피디의 여행은 유난 우리의 인생을 닮았어. 그리고 운이 좋으면 당신과 만나는 행운이 있기도 하니 어찌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여행 책이 그렇지만 이 책도 특별해. 지독한 악취가 나는 취두부를 두고도 연인을 생각하게 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들은 수긍하고, 순간의 행복을 신앙하며, 모든 잊혀져 가거나 잊혀진 것들을 떠올리게 해주지. 그가 여행에서 던진 그물에 걸린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펼치다 보면 어느새 완전한 새 이야기가 만들어져. 그것은 여기서마저 언급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지구상에 없을 이야기들이었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것에게만 가능한 일이니까. 여행 산문집이라는 것이 꽤 괜찮다는 생각을 해. 여행은 무언가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안에 어떤 것이 무엇에 반응하는 지를 알아보는 과정이었으니까. 이 책을 보는 동안 꿈틀거리던 감정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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