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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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을 한 입 깨어 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감각적이다. 마들렌의 맛과 홍차의 향을 좇으면 언제든 주인공은 과거의 한 시기로 여행을 하게 된다. 내가 살던 집을 통해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이 여행은 투박하면서도 허전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이미 누군가가 차지해 버려서, 그것은 한 때 나의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증명해 주는 흔적은 오직 나의 기억과, 함께 시간을 보낸 가족들. 그 뿐. 그렇다 그것이 전부다. 이 이야기는 그 흔적을 따라 잔잔하게 이야기 하는 알랭의 자전적 소설이다. 


트랑에 들렀던 이브는 알랭이 살던 집을 지났왔었다고, 그 집엔 누가 사는 지 아느냐고 묻는다. 무심한듯 집에 대해서는 잊은척 하던 알랭의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를 거슬러 오른다. 주인이 바뀐 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더이상 과거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는 과거로 돌아 갈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내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고 하더라도 그때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는, '오늘은 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한다. 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은 근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무책임하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지금을 기억하는 것이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진실한 예의이다. 하나 둘 떠나는 트랑의 집, 그리고 어느 순간엔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도 머물수 없게 되어버린 그 집에 그들이 놓고 온 것은 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유년의 한 축이 집이라면, 알랭의 나머지 한 축은 아버지였다. 그것은 덮어놓고 좋은 의미의 것만은 아니다. 열남매를 두고도 매일 밖으로 다니던 아버지, 돌아가시는 순간이 될 때까지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아버지는 좋은 축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지만,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이제 내가 그의 나이가 되어 옆에 앉아 있는 듯한 당신을 보니 이제 이해할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신해철의 노래 '아버지와 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은 침.묵.뿐.이.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 기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의 영향을 축소시키고, 내 방식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제 알랭은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항상 악역으로 존재했던 아버지를 이제 행복의 영역에 옮겨 놓고 비로소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종전을 위한 조용한 평화 선언문이다. 알랭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생각한다. 아기들의 무덤에서 아기천사상을 수집하곤 했던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보낸다. 항상 뭔가 얻어가는 곳이라 생각했던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놓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쩍 성장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p.95)

2006년 과학 학술지에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미국 여성의 사례가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녀는 모든 날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말인데, 가끔 그것은 매우 큰 축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기억과 힘든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면서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 특정한 순간의 기억과 괴로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은, 행복한 일을 잊지 않으면서 얻는 기쁨에 비해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뭐든 들어왔다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모음이다. 특히 감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절실하다. 슬픔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어디론가 반드시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들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면서, 이제는 그것을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는 예쁜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한번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은 내게서 서서히 빠져 나간다. 마치 모든 것이 잊혀지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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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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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더럽게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려운 이론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려운 것일까, 어렵게 설명하려고 해서 어려운 것일까.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해서 어려운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잘난척 하고 싶어서 어렵게 쓴것일까. 아마..'

 

물증이야 없지만 심증적으로는 '더럽게' 어렵게 쓰는 사람이 '졸라' 잘난척 하려는 욕심만 줄일 수 있다면, 좀 더 대중적인 글이 써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야에서 그보다는 못할터인데 그 간극을 줄여줄 생각은 없이 꽁무니만 보여주고 내빼기 일쑤다. 대중적인 글을 써주는 친절한 작가는 무식한 독자에게 늘 환영 받기 마련이다. 대표적 인물이 유시민, 강신주, 최재천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전문분야를 평균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줘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서민' 교수도 그런면에서 친절한 저자이다. 혹자는 얼굴이 친근해서 글이 편한거 아니냐며 말도 안되는 음모를 제기 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그런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봤을리 없지 않겠는가.   

 

처음 딴지일보에서 '마태우스'를 봤을 때 그야말로 딴지에 어울리는 글이라고 생각했었다. 본인은 그야말로 쓰레기인 책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 볼 땐 전문적인데다 웃기기까지 해서 꽤 즐겨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오인용에서 '중년탐정 김정일'이 나오고 있었는데 컨셉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 모든 증거를 싸그리 무시하고 심증으로 진범을 놓치는 개 유능한(?) 탐정이다. 나는 그 당시에 그에 필적할 만한 탐정은 마태우스 뿐이라고 나름 세계 랭킹을 매기고 있었다. 그때는 물론 재미있게 봤지만 그 사람이 지금 나오는 '서민'이라곤 쉽게 연상시키지 못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의 칼럼을 한두번 보긴 했겠지만 봤더라도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칼럼(http://seomin.khan.kr/)에 가보면 여전히 위트 넘치고 편한 글을 여럿 볼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자꾸 밟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지옥훈련'이라는 단어였다. 뭔들 그리 갖다 붙이면 지옥훈련이 아니겠냐만 10년의 지옥훈련은 왠지 엄살 같이 들린다. 활자로 볼때도 놀라운데 강연회에 가면 꼭 지옥훈련을 언급하면서 방청석의 나까지 화끈거리게 만든다. 유리겔라가 숟가락 오그라 뜨리는 능력을 보였다면, 서민 교수는 손가락을 오그라 뜨리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아 쫌, 제발요 교수님. 지옥훈련 말고 다른 단어 좀 쓰시면 안되요?'라고 했을 것이다. 보통 생각하는 지옥훈련이란 눈을 뜬 순간 애니(미저리 주인공 여자)가 버티고 서 있고, 원하는 글이 나오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으며, 원하는 글이 나와서 하산을 할라치면 망치로 다시 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는 되야지 않은가 싶단 말이다. 책 많이 읽고 글 계속 쓰고 하는 건 그냥 글 잘 써보려고 맘먹은 사람은 다 하는 것이잖은가. 이건 굳이 비교하자면 나 살찔거야 하는 사람이 '밥만 먹고 똥을 참았어요.'라든가, 영어를 잘하려는 사람이, '이태원에 가서 시비걸고 영어로 매일 싸웠어요.'라는 비결보다 더 하찮다.  

 

 

그런 오바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바로 글을 써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글쓰기가 별것 아니라는 느낌을 줘서이다. 매일 써보고 책 읽고 하면 되는구나. 그냥 친구한테 말하듯이 쓰면 되는구나. 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남한테 말하듯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생의 고시 합격기를 보면 좌절하지만, 지방대 생의 합격기를 보면 의욕이 샘솟는 원리랄까. 아 그래서 글을 좀 써보자 하고 작가 이력을 보면. 이런 망할. 서울대 의대 출신. 의욕이 식도를 역류하는 기분이다. 이 때문에 글 곳곳에는 의사는 글을 못쓴다며 또 말도 안되는 떡밥을 던진다. 서울대생 중에 자기 머리 좋단 사람은 본적이 없는 나로서, 여기서 왠지 속았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적 글쓰기는 분명히 괜찮은 책이다. (이쯤에서 블로그 글의 마지막을 어떻게 쓰라는 지 한번 뒤적였다) 

 

결론 부분에서 신경 써야 할 점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다고,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잘 쓴 글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p216)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결론을 내리라는 말처럼,

좋은게 좋으면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이 어디있단 말인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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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불능 - 인간과 기계의 미래 생태계
케빈 켈리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이인식 감수 / 김영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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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는 서기 2199년 인공 지능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가 나온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공자궁 안에 살면서 오직 가상의 현실이 실제라고 믿으며 살고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전부는 가상이고 그마저도 컴퓨터의 개입으로 조작되거나 지워진다. 컴퓨터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그들의 육신을 이용할 뿐, 사람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로 만든다. 인공지능의 진화가 결국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라는 예상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대부분 큰 차이가 없다. 영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류의 멸망을 불러 올 수 있다."고 경고했고, 엘런 머스크도 "인공지능 연구는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공지능은 적어도 엔터테인먼트 쪽에서는 여전히 흥미로운 존재이지만 냉정히 생각할 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강력한 인공지능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악의적인 방법으로 인류를 절멸 시키려 한다면 인간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산속도를 따라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강력한 네트워크나 개발 능력을 압도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느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주어진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했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이 더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통제 불능'을 보면서 조금 다른 관점을 보게 됐다. 엄밀한 의미로 단순히 주어진 자료를 취합하고 아웃풋을 생산하는 것은 인공지능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신 저자는 비비시스템을 이야기 한다. 


나는 만들어진 것이든 태어난 것이든 생명과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면, 그와 같은 시스템을 '비비시스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비비시스템 가운데 상당부분은 '인공적'인 것이다.그 비비시스템에는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 컴퓨터 바이러스 인큐베이터, 로봇 원형, 가상 현실 세계, 합성된 애니메이션 캐릭터, 다양한 인공 생태계, 지구 전체의 컴퓨터 모형 등이 있다. 그러나 야생 자연이야말로 비비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돕는 중요한 원천이다. (p19)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인공적인 것으로 생산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데 어떤 말인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뒤이어 나오는 여러 사례들은 어디까지가 인간이 주어주는 조건이고 어디서부터 인공 지능이 스스로 진화하는 단계인지를 보여준다. 토머스 레이의 이야기를 보자. 그가 처음 컴퓨터에 손으로 만든 작은 생물을 풀어 놓았을 때만 해도 그들은 번식속도만 빨랐을 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가 처음 만든 것은 80바이트로 만들어 '80'이라 명명했는데 10% 변이를 설정해 놓자 자연스레 79나 81이 생겨났다. 여러 숫자가 번갈아 가면서 컴퓨터에서 개체수를 반복했고, 45라는 기생충 버그까지 탄생했다. 기생충과 숙주가 공진화 하는 과정에서 면역력이 있는 개체가 증가하면 또 거기에 기생하는 버그 개체가 증가하기를 반복했다. 22바이트 생물도 생겨 났는데, 이전까지 아무리 코드를 줄이려고 해도 가능한 최소는 31바이트였기 때문에 매우 놀라운 사실이었다. 또한 스스로의 크기를 과장되게 하는 코드, 유성 생식을 하는 코드까지 생겨났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조차 진화를 통해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조금 섬짓한 이야기이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우리의 손을 벗어날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들어낸 다윈칩은 스스로의 성능을 개선하며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낼것이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생각하자면 우리가 주어지는 선까지 발전하는 것이 기술이다.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생물이 아니라면 불가능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들어 진 것'과 '태어난 것' 사이에는 교집합이 존재하며 이 영역에서 인공적인 특징과 생물학적 진화를 갖춘 시스템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는 인형사에게 단순한 자기 보존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말에 이런 답을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인간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할 때 나는 이 책이 공각기동대에도 어떠한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워쇼스키 남매가 공각기동대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서로 연관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컴퓨터가 자신들이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실제로 들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짜피 인간 또한 DNA를 보존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보의 보존 혹은 그 이상의 목적을 위해 구축된 시스템 또한 우리와 공존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인공지능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인 회의적 시각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어두운 미래를 언뜻 본 것 같아서 무거운 짐을 진 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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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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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마주보고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에서, 눈앞에 있는 사물에서 초점이 흩어지고 멀리 보이는 배경이 선명해지는 순간. 그 순간, 어떤이는 떠나고, 어떤이는 남는다. 그들을 떠나게 하는 마법은 선명한 것을 따르려는 본능보다 더 강한 광기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그것 뿐이니 그들은 결국 떠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허파에 바람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듯이, 한 번 궤도를 벗어나면 멈추지 못하는 방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디즈니랜드의 반짝이는 회전목마를 보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유전병처럼, 아버지는 이트륨이라는 희귀한 금속에 빠져 허파에 바람이 들고 만다. 초점이 먼곳을 향하면 주변의 사물이 흐려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 아버지는 물려받은 고물상에 관심이 사라지고 대신 희귀 금속을 추출해 내는 거대한 기계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의 딸 해미는 아버지가 버려둔 고물상과 유품정리의 바통을 쥐고 이어 달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쓸모 없는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삶, 사라진 것들에서 관계를 복원하는 삶. 모든 것을 소각하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마지막으로 '되물어주는' 삶이다. 고물상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것들에서 남아있는 가치를 찾아내 값어치를 매기는 작업이라면, 유품정리를 하는 해미의 일은 주인이 사라져버린 사물에 세상과의 관계를 복원시키거나 사라지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삶이 생태계라면 폐기물을 분리해서 다시 복원시키는 작업은 '분해자'의 역할이다. 분해자는 유기물의 시체나 배출물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고, 유기화합물을 무기물로 바꿔준다. 이들은 다시 유기물에게 소비되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결국 '흩어지는' 과정이다. 사물의 부분을 구성했던 과거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소멸되고 말것이지만, 각각의 개체로 분리된다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때문에 그들에게 '집합'은 의미가 없다. 오직 개체로서 존재해야만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귀금속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파지는 파지대로, 병은 병대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 자체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고유의 본질을 놓친 사물은 영원히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개체성은 더 확고해지고, 어디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가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소각의 여왕'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사물의 의미를 되묻는 희한한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 있다. 


눈 앞에 있는 것들의 의미를 찾는 일은 도무지 어렵기 때문에, 소각하는 과정은 그 공백을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절차가 된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사라지면 그들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각인시킨다. 유일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인정 받던 순간에서 주인의 부재로 인해 쓸모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순간이 모든 사물의 전부의 순간이다. 인간의 경우라면 다른 것들과 섞여 있을 때 개인의 꿈이란 희미해지는 것이고, 개별적 자아가 될 때 이상이 가까워 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환상의 영역에서 돌아오기에 그들은 너무 거친 삶을 살고 있었다.


펠릭스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그런 상태로 코마에 들어갔다간, 고통에 찬 육신으로 돌아오기보다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염려가 있었다. (타나토노트, p.21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는 위 장면이 나온다. 처음으로 영계 탐사를 앞두고 있는 펠릭스가 살을 파고든 발톱 때문에 영혼계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뤼생데르의 생각이다. 현실을 벗어난 이가 현실로 돌아오기 싫은 때는 현실에 지독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때이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 지창씨는 허파에 든 바람을 꺼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녀가 그의 죽음 앞에서도 크게 울지 않은 것은 그가 좇았던 꿈과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의 간극에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음을 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허파에는 금새 바람이 들었다가도 꺼져버리곤 하지만, 언젠가 또 그의 아버지처럼 바람든 가슴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삶이란 가슴 모퉁이에 비현실적인 꿈을 하나 안고 살다가 한 번쯤 날아가 버리거나 혹은 끝내 못하거나,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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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1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덕분에 두 번 읽는다는~ 추카추카. 나는 이번에 떨어졌..
당선작으로 들어와서 보니 오호 리뷰가 더 멋져~

고군분투 2016-02-11 19:14   좋아요 0 | URL
신기한 것은 게스님이 칭찬한 글은 항상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는. 그게 더 대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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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세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면 누구를 고르겠냐는 물음에 나는 여자 가수에서 이상은, 남자 가수에서 신해철을 고르고 싶다. 특히 신해철은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사실과 별개로 우리에게 가장 생각할 거리와 음악적 모티브를 많이 준 아티스트였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그의 발자취를 집대성한 책을 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 꼭 하고 말았을, 설사 한 두권이 나왔다 한들 더 잘 해볼 수 있겠다며 또 여러권의 책이 나올 수 있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이 달에 나온 책 중에서 가장 관심이 하는 책을 딱 한 권 꼽으라면 나는 이 책을 고르겠다. 그의 음악과 철학적 성철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목차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항상 소중한 것들은 너무 가까워서 잊혀지곤 한다.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힘들다는 사실을 느낀 적이 많다. 나만 그런가 싶어서 주위를 가만히 보면 사실 누구든 남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축하해주는 척 하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그런 심리에 관심이 많다.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감정은 어쩌면 진화의 과정에서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경험을 주었을 것이다. 제목도 어설프게 아닌척 하지도 않고 아예 대놓고 쌤통이라니 더 맘에 든다. 우리는 가끔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을 때 진실을 왜곡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것을 을 인정할 때 오히려 답이 보일 때도 있다.  



우주 이야기를 하면서 '코스모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제 식상한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광할한 우주의 공간과 유구한 역사를 생각할 때 코스모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인지 그리하여 우리가 집착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지를 알고 나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 랜들이라는 네임 밸류로서 뿐만 아니라 그녀가 쓰는 글의 친근함과 대중적인 형식이 책의 관심을 더 높여준다. 읽어도 읽어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겠지만 이런 책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들뜨게 해준다. 우주의 끝, 블랙홀, 힉스 보손처럼 목차 만으로도 읽을 거리가 많아 보인다. 



지대넓얕의 채사장이 또 한 권 대중적인 인문학 서적을 냈다. 특히 우리와 밀접한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라는 주제로 알기 쉽게 적었다. 각 주제마다 인문학적 이론을 통해 어떤 것이 진짜 답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태통령의 선택이라는 형식으로 왜 어떤 선택은 당연한듯 보이면서도 할 수 없고, 어떤 것은 아닌 것 같지만 해야하는 지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대넓얕은 일반적인 베스트셀러에 비하자면 내용이 충실하고 그 분야가 다양하다. 얕은 지식이라고는 했지만 결코 얕지 않은 내용과 많은 동기부여를 해주는 책이라 꽤 괜찮았는데 그 인기를 이 책에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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