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을 한 입 깨어 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감각적이다. 마들렌의 맛과 홍차의 향을 좇으면 언제든 주인공은 과거의 한 시기로 여행을 하게 된다. 내가 살던 집을 통해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이 여행은 투박하면서도 허전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이미 누군가가 차지해 버려서, 그것은 한 때 나의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증명해 주는 흔적은 오직 나의 기억과, 함께 시간을 보낸 가족들. 그 뿐. 그렇다 그것이 전부다. 이 이야기는 그 흔적을 따라 잔잔하게 이야기 하는 알랭의 자전적 소설이다.
트랑에 들렀던 이브는 알랭이 살던 집을 지났왔었다고, 그 집엔 누가 사는 지 아느냐고 묻는다. 무심한듯 집에 대해서는 잊은척 하던 알랭의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를 거슬러 오른다. 주인이 바뀐 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더이상 과거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는 과거로 돌아 갈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내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고 하더라도 그때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는, '오늘은 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한다. 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은 근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무책임하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지금을 기억하는 것이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진실한 예의이다. 하나 둘 떠나는 트랑의 집, 그리고 어느 순간엔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도 머물수 없게 되어버린 그 집에 그들이 놓고 온 것은 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유년의 한 축이 집이라면, 알랭의 나머지 한 축은 아버지였다. 그것은 덮어놓고 좋은 의미의 것만은 아니다. 열남매를 두고도 매일 밖으로 다니던 아버지, 돌아가시는 순간이 될 때까지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아버지는 좋은 축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지만,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이제 내가 그의 나이가 되어 옆에 앉아 있는 듯한 당신을 보니 이제 이해할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신해철의 노래 '아버지와 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은 침.묵.뿐.이.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 기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의 영향을 축소시키고, 내 방식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제 알랭은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항상 악역으로 존재했던 아버지를 이제 행복의 영역에 옮겨 놓고 비로소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종전을 위한 조용한 평화 선언문이다. 알랭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생각한다. 아기들의 무덤에서 아기천사상을 수집하곤 했던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보낸다. 항상 뭔가 얻어가는 곳이라 생각했던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놓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쩍 성장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p.95)
2006년 과학 학술지에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미국 여성의 사례가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녀는 모든 날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말인데, 가끔 그것은 매우 큰 축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기억과 힘든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면서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 특정한 순간의 기억과 괴로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은, 행복한 일을 잊지 않으면서 얻는 기쁨에 비해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뭐든 들어왔다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모음이다. 특히 감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절실하다. 슬픔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어디론가 반드시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들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면서, 이제는 그것을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는 예쁜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한번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은 내게서 서서히 빠져 나간다. 마치 모든 것이 잊혀지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