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컬렉션 - 호암에서 리움까지, 삼성가의 수집과 국보 탄생기
이종선 지음 / 김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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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수집하건 우선은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피규어든, 스타벅스 텀블러든, 하다 못해 어릴때 종종 했었던 우표 수집이든 경제력이 없으면 그들이 모은 것은 별 가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국보급 문화재를 이야기 하려면서 좀 동떨어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어떤 컬렉션이든 재력이 곧 그 가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재력을 가진 이들은 항상 딜레마에 봉착한다. 초등학교 때 한 아이가 고생해 가면서 일년 동안 모은 희귀 우표를, 돈 많은 집 아이가 1개월만에 모아들였다면 어떨까. 1년여의 정성과 노력, 우표에 대한 열정을 돈으로 환산한 느낌이다. 간송 전형필이 온 평생을 들여 전재산을 털다시피해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에 비하자면, 재력있는 삼성가에서 문화재를 모으는 것은 열정이라기 보단 취미처럼 느껴진다. 


이야기의 시작을 그렇게 했다고 해서 '리 컬렉션'이 그저 엄청난 재력을 가진 삼성가가 여기저기 문화재를 한순간에 모아들였다는 소리는 아니다. 조금 관점을 달리 해서 이 책을 볼 때는 문화재 그 자체에 대한 누군가의 열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문화재 수집의 역사가 이건희 회장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커지고 내실을 갖추는 과정의 기록이다. 단순히 재벌가의 취미 사업이라고 하기엔 그 기간이 무척 길고, 단순히 닥치는 대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관점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 문화재들은 삼성가의 창고에 숨어있지 않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는 점도 그 성격을 달리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이 책에 나와 있는 호암, 리움 박물관의 설립과정과 문화재 수집과정은 그저 부잣집 어르신들의 단순한 취미로 치부하기엔 그 열정과 정성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의 저자인 이종선 박물관장은 이병철 회장부터 이건희 회장까지 20여 년을 리 컬렉션을 실질적으로 관장해왔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이 이 부자의 관심과 추진력으로 이어지면서 경제 사실상 시기상조라고 느껴지던 70년대에서부터 박물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으로 가보면 여러 문화재의 다양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있다. 김일성이 문화재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조급해져서 실물도 보지 않고 구매를 결정했던 이암의 '화조구자도' 이야기, 단원의 편화들을 모아 구성한 리움컬렉션의 대표작품인 '절세보첩'과 관련된 이야기, '청화백자매죽문호'가 국보 제219호가 되기까지의 긴박하고 우연한 과정 등 여러 문화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적절히 흥미를 돋워준다. 


책의 말미에 가면 '간송 전형필'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실려 있다. 저자는 만약 간송이 상속받은 수십만 석지기의 재산을 문화재 수집과 보호에 쓰지 않고 사업에 사용 했다면 삼성 못지 않은 대기업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고도 말한다. 사실 그 말은 삼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사람들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비록 책에 실려 있는 문화재에 대한 의도가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대기업에서 모아들이는 작품들에 대한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비교할 때 개선되기에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행복한 눈물'의 사건에서 봤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재벌가의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검증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리움미술관의 많은 작품과 그 안에 숨겨진 크고작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소 선입견을 거두고 작품 자체로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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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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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C(대형하드론충돌기)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의 경우엔 '블랙홀'이다. LHC를 설계하고 설치할 때 실제로 그 안에서 생성된 블랙홀이 주변의 물질을 다 집어 삼키면서 팽창해서 결국엔 지구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는 꽤 흥미로운 사실이라 한동안 관련 기사를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실제로 2008년 9월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에서 LHC 가동을 시작했을 때 몇몇은 이를 중지하는 소송을 내기도 했다. 가동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몇가지 근거를 토대로 그런 염려는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중에 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은 지금 LHC에서 실험 -양성자 빔을 충돌시키는-하는 것들은 우주가 지구에 대고 그동안 30만번은 시도했던 내용과 같다는 살이다. 이를 우주로 확장하자면 그런 사건들은 지금보다 몇 천 배는 더 자주 일어났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LHC는 무엇일까. LHC는 규모만도 27km에 달하는 둥근 터널 모양의 장치로 스위스, 프랑스에 걸쳐 지하에 설치되었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양성자를 양쪽 방향으로 발사하여 충돌시키는 것이다. 최초 수소원자를 가열해서 분리된 양성자는 LINAC과 양성자싱크로트론, 양성자싱크로트론증폭기, 슈퍼양성자 싱크로트론을 거쳐 450기가 전자볼트까지 가속된 상태로 LHC에 들어간다. 양성자가 링을 따라서 회전하기 위해서는 자기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쌍극자를 만들어 냈다. 그밖에 몇가지 중요한 조건들이 있는데 이를 위해 약 9천 명의 물리학자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양쪽의 빔에서 발사된 각각 1000억개의 양성자가 만나게 되는데 이때 만나는 수는 고작 20개 정도에 불과하다. 빔은 1초에 1000만번 이상 교차하고 10억번 이상 일어나는 충돌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현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 LHC이다. 


그리고 그 가장큰 성과가 '힉스 보손'의 발견이었다. CERN은 2012년 7월 99.999994%의 확률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물리학의 표준모형 속에서 대칭성을 보존하며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입자는 1964년 영국의 피터 힉스 교수가 예견했던 입자였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발견된 적이 없어서, 표준모형이 정작 아무도 본적이 없는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LHC의 양성자 충돌을 통해 이를 확인 한 것이다.(힉스 보손은 16장에 나와있다. 책은 그 전에 쓰여져서 그 전의 내용까지만 포함되어 있다.) LHC는 양성자들의 강력한 충돌을 통해 이처럼 힉스 같은 예상했던 입자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현상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계획된 것이다.


그 중에는 그녀가 99년에 발표했던 '작은 여분차원에서 거대 질량 계층성 문제'에서 다뤘던 다른 차원에 관한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우주를 기본적으로 이루고 있는 네 힘,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에서 과학자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힘은 바로 중력이다. 중력은 어찌보면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힘에 비해서는 그 힘이 너무 미약하다. 그렇다면 그 힘들이 어딘가로 분산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게 당연한 물음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를 밝힌 그녀의 가설 또한 LHC를 통해 검증 가능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만약 여분차원이 존재한다면 그 사실을 알려주는 특징적인 '신호'가 언젠가는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물리학자들이 볼 때 어떤 책인 줄은 잘 모르지만 일반인이 볼 때 무척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보통 이런 류의 책이라면 있어야할 복잡한 수식이 없는 것도 장점이지만, 처음부터 어려운 이론으로 들어가서 기를 죽여놓는 다른 책들과 차별화된 점 또한 괜찮았다. 어떤 이론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문학적인 표현이 들어가 있어서 읽기에도 괜찮았다.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책을 수십번 다시 뒤적이고, 다른 사이틀르 들락날락 해서 맞는 말인지 아닌지도 헤깔릴 정도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한 장 한 장을 빼서 책을 써도 됐을 정도로 내용도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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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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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봤을 땐 좀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뭔 말도 안되는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의 교훈은 상대를 배려하라는 말인데 여우는 먼저 사과한 셈이라고 하지 않나,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 한 것은 심심해서이니 어른들 잘못이라고 하지 않나 왠지 이야기의 중심을 벗어난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건 왠지 내 스타일이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모두가 정해놓은 교훈을 따라갈때, '잠깐!!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하는게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나는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장담하건데 어떤 육아 서적보다 이 책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데는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세 개의 마을로 이뤄졌다. 제1장은 관용의 마을로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거나 살았지만 곤경에 처한' 여우와 두루미, 양치기 소년, 피노키오, 아기돼지 삼형제가 나온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는 논어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건 남한테도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정말 '쩐다'. 그럼 여우나 두루미나 둘다 '쌍방과실' 일까. 여기는 큰 차이가 있다. 여우는 모르고 한 행동인데 두루미는 알고 일부러 엿 먹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우는 그저 생각일 짧아서 두루미를 배려 못한 것이지 일부러 골려 먹으려고 한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서로 잘못한 것은 없는 셈 치면 된다는 생각을 경계한다. 거기에 강요된 화해는 얼마나 위험한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경우라면 그 말은 곧 피해자가 감수하고 가해자는 통 크게 웃어 넘기는 대인배가 되는 그림일 뿐이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에서 어떤 말을 할까. 우리는 왜 그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자꾸 하고 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어른의 통제를 벗어난 아이를 보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도 어릴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우리 아빠는 다른건 안 때려도 거짓말 하는 건 절대 용서 안해' 이런 식의 말 말이다. 어른들은 항상 아이가 자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그걸 발견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면서 거짓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피노키오'가 왜 생겨 났는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내글링크 http://blog.yes24.com/document/6546572) 나는 피노키오야말로 어른들의 두려움과 욕망이 만들어낸 완벽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공부 안하면 잡혀가고,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져 들키고, 학교에 안가면 불에 타는 공포는 아이들에게 심어주기에 얼마나 완전한 교육자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장은 일탈의 마을이다. 여기는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규범을 벗어 던진' 주인공 집합소이다. 거북이는 토끼가 자고 있는 틈을 타서 이겼다. 이건 그렇다면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은 거북이가 잘못인가? 아님 어짜피 다시 하면 이길 수밖에 없는 토끼가 승자인가?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게임을 만든 제3자이다. 사실 이 게임은 승자가 토끼라면 당연한 것 승자가 거북이라면 대박인 게임이다. 토끼 입장에서는 할 이유가 없는 게임이지만 누군가는 부추겨서 게임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토끼가 잠을 잤던 것은 이따위 말도 안되는 게임은 관심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거북이는 거북이대로 토끼가 그렇게 일탈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게임은 게임 당사자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면 판도 커지지 않고 각자가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 


빨간모자는 엄마가 신신당부한 큰길을 벗어나 '샛길'이라는 일탈을 택한 캐릭터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여느 동화와 마찬가지로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살아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훈훈한 결말로 끝난다. 저자는 모두 안정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샛길을 택했던 모든이들에게 사실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샛길로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어야지 왜 우리는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일까. 샛길 이야기는 '분홍신'에 가면 더 끔찍하고 비관적으로 그려진다. 검정신을 신을 수밖에 없는 아이가 분홍신을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사회, 미리 정해놓은 길로 인도하려는 기성세대에 대해 '죽을 때까지 춤출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 장은 지혜의 마을이다. 여기는 '우리가 사는 진짜 모습을 그려 보는' 장이다. 드디어 주인공 백설공주가 나온다. 그녀가 자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문을 여는 이유는? 바로 외로웠기 때문이다. 난쟁이들은 낮동안 일하고 밥을 먹으면 이내 잠들고 공주는 말할 상대도 없이 또 하루를 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문을 안 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능동적으로 친구를 만들기에는 이미 수동적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왕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마녀라고 할지라도 문을 열 땐 반가웠을 것이다. 반면에 왕비는 어땠을까. 왕비는 첫번째 부인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왕의 마음 속에서 끝없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를 인정해주는 거울이라는 존재는 -꼭 거울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책의 일부만 적어볼려고 했는데도 내용이 꽤 된다. 이 책은 이런 식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교훈들에 대해서,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는지. 그 이면에는 피해자나 힘없는 약자가 있는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학교 선생님이라 아이들의 욕구에 더 민감하고 귀를 잘 기울였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든 부모라면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을 것이다. 여러 관점도 아니고 주인공의 관점, 혹은 아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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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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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고 자신있게 외치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에 걸렸을 때 종교인들은 이것이야말로 신의 복수라며 통쾌해했다. 이에 대해 그는 '복수심에 찬 신이 생각해 낼수 있는 것이 고작 나이와 생활방식으로 예측 가능한 '암'을 내려주는 것이라면, 그의 무기고는 슬플 정도로 비어 있는 것'이라며 독설을 내뱉는다. 죽을 때 말이 착해질 지도 모른다는 종교인들의 기대는 그가 남긴 마지막 책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처절하게 무너진다. 주제 사라마구는 91년에 '예수복음'이라는 책으로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를 집필한 바 있다. 그는 이 때문에 98년 노벨문학상 수상시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 역시 생의 마지막에 가서는 종교에 귀의할지도 모른다는 일반적인 기대에 반하며, 오히려 생의 마지막 1년을 앞두고 '카인'을 썼다. 모든 철학자가 마지막에 쓰고 싶은 책은 종교 비판이라던 어느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카인'은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이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인물이다. 자기 동생 아벨을 죽여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졌으며, 아벨의 행방을 묻는 여호와의 질문에 뻔뻔하게도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답한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은 여호와의 책임이며, 자신은 주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그것은 카인을 시험해본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에 카인은, '주께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라며 울분을 토한다. 피조물의 의지가 신의 의지를 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호와가 그 책임을 피조물에게 넘기려는 상황은 불가해하다. 신의 능력이 무한하여 이 일의 끝을 미리 알았다며, 우선은 시험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면 적어도 아벨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문이다. 카인은 첫번째 살인자이면서, 가장 억울한 존재로서 소설 내에서 신이 내리는 옹졸한 판결의 현장을 시공을 초월해 등장한다. 


그 첫 장면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는 순간이다. 성경에서는 그의 경외함을 확인한 신이 이를 멈추게 하였지만, 소설에서는 카인이 등장해 이삭의 죽음을 지연시켜 살린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그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도 죽이라고 명령할까요.(p.98) 

카인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어김없이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이에 대한 방종이 가져올 무책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신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얕은 소견으로 볼때 지독히 불합리하다. 아브라함은 신의 시험을 통과해 화를 면했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순탄치 못하다. 소돔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고 타락했다는 이유로 도시가 절멸한 위기에 있다. 아브라함이 그 도시에 죄없는 사람이 열명만 돼도 도시를 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소돔은 불덩이를 맞고 사라진다. 적어도 죄없고 동성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열 명을 넘는 도시였겠지만 소돔은 사라진다. 카인은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p.117) 

뒤에는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벌은 받은 인간들, 오직 신의 승리를 위해 죽어간 반대편 사람들, 오직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온몸이 곪아 터지는 욥, 모든 생명체를 멸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지전능' 함이 신의 기본 요소라면, 사건의 전후를 꿰뚫지 못하고 결과에 대해서 분노하고 이를 벌주는 신의 모습은 '전지'를 뺀 '전능'의 모습만 남은 신일 뿐이다. 옳은 판단이 결여된 '전능'의 무서움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소설 카인에서 신의 모습은 무한한 능력을 이용해 전횡을 저지르면서 책임조차 면하려는 실망스러운 존재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관용과 사랑'을 대표적 이미지로 차용하는 것을 생각할 때 성경속 여호와의 모습은 독자에게 불공평하고 편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수없이 제기되었던 의문과 비판을 모아서 작가가 인생의 마지막 힘을 모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본다. 


노아의 방주에 오른 카인은 천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면서, 완전무결함을 표방하지만 오류 투성인 신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한다. 


정말로 지금 인류를 멸하고 나면, 그다음에 나오는 인류는 똑같은 오류, 똑같은 유혹, 똑같은 어리석음과 범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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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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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라면, 혹은 내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야기 하기는 참 쉽다. 당장에라도 직장에서 청년 일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이런 말이 나온다. '지금 공장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라는데 편한데만 가려고 하니 일자리가 없지.' '게으르니깐 취업을 안하는 거지'라거나, '부모가 다 해주니깐 취직을 안하지' 이런 식이다. 이 말들의 공통점은 취업을 못하는 것은 사회의 문제가 아닌, 취업을 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문제라는 점이다. 청년 무업자들은 단순한 무관심을 넘어서 자기책임론이라는 멍에를 뒤집어 쓰고 낙오자로 낙인 찍힌다. 역시 이러한 논리의 전제에는 시스템은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는 다수의 묵인이 숨겨져 있다. 


이 책은 NPO법인 소다테아게넷 이사장 구도 게이가 '청년 기초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청년들을 교육하고 조사하면서 청년무업자 백서 형식으로 정리된 책이다. 이들이 훈련시키는 청년들은 교육과정에서 탈락했거나,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업이나 취직을 못하거나, 취업했지만 퇴직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니트, 히키코모리 정도로 이해되곤 한다. 니트는 교육도 받지 않고, 고용되어 있지도 않고 훈련도 받지 않는 상태의 구성원이고, 히키코모리는 교류 없이 6개월 이상 집에서 틀어박혀 있는 이들을 뜻한다.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무업자가 된 데에는 스스로의 책임이 더 커보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항상 오해와 무관심이 뒤따랐다. 저자는 이를 무조건적으로 일반화 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이해를 통해 그들이 처해있는 상태를 더 이해하고 그로부터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니트, 히키코모리, 프리터(파트타임 생활자) 등으로 대변되는 무업 청년들은 일단 그 단어 선택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 무업자의 75% 정도가 취업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이 다시 취직을 못하는 이유는 질병, 부상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 책에는 여러 케이스가 나와 있는데,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동경하던 비전과 괴리된 현장에 실망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불합격을 100번 넘게 하고 구직을 포기하거나, 회사로부터 급작스레 퇴직을 통보 받거나 심지어는 세무사에 합격하고도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된 케이스, 동업을 했느나 결별하여 실업자가 된 케이스 등 자의에 아닌 경우도 많다. 


특히, 3장에서는 일하지 못하는 청년들에 대한 오해를 다루고 있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해서는 아닌가 같은 우리의 보편적인 의문, 매일 자유롭게 놀지 않나, 개선의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본인의 의지가 약한 것 아닌가 같은 일반적인 오해들에 대해 왜 그것이 오해인지 통계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일례로 부모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무업자의 77%가 부모와 동거한다는 자료를 보자. 이를 보면 많은 이들이 역시나 부모가 돌봐 주니까 취직을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부모가 돌봐줘서 취직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취직을 못해서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실제 집에서는 공기 취급을 받는 청년들이 많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운전면허조차 없는 경우가 절반에 이르는 것이다. 


많은 해결책들이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해결책은 역시 '재도전' 가능한 시스템의 확보이다. 제1기 아베 신조 내각에서 '재도전'이라는 키워드로 야심차게 이를 추진했고, '내각부 특명 담당 장과(재도전 담당)' 및 부서가 설치되기도 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 사실 청년들에게 한 번의 실패가 끝이 된다면 누구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 두번의 실수 없이 자리를 잡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공공의 차원에서는 맘놓고 도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을 사례별로 보여준다. 단순히 일을 한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 이어지고 유대의 매개체가 된다는 것, 꿈을 실현하고 사회로 나간다는 것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이 실려 있다. 일이 단순히 먹을 것을 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존감을 갖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청년 일자리나 그들의 첫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청년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실패를 당연시 하면서 그에 대한 대책에는 무심한 기성세대가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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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가 가장 큰 수혜자들의 논리에 의해 낙오자로 바뀌면서 실패한 개인이라는 멍에를 홀로 안고 가야 시스템과 성공한 다수가 책임을 회피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같이 몰락하는 길임을 시스템도 독식하는 승자들도 모두 알고 있어야 할텐데요.

연휴가 끝나가는군요.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고군분투 2016-02-09 23:26   좋아요 1 | URL
이렇게 쉬었는데 하루가 또 남았다니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벌써 마지막 날이라는 푸념이 목까지 차네요.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말,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 할 때마다 왠지 나는 그 문제와 관련없는 사람이고 싶은 것 같아 좀 맘에 걸려요. 그리고 이런 글에는 으례 그럼 어쩌라고. 라는 반문이 뒤따르죠. 관심을 더 두자는 것인데 대안이 없으면 꺼내지도 말라는 그런 말들이 정말 무심하게 느껴지곤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