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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ㅣ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7
죤 스타인벡 지음 / 일신서적 / 1988년 7월
평점 :
절판
1930년대의 미국 경제 공황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세계 공황으로까지 번진 무시무시한 공황이었다. 대다수가 실업자가 되어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이 책은 그 당시 상황에서 한 가족이 서부로 이주하는 과정을 그렸다. 극심한 가뭄으로 먼지만 풀풀 날리는 땅을 소작부치던 가족, 부자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대가족이 똘똘 뭉쳐, 부지런을 떨던 천상 농부인 가족이었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땅은 대지주인 은행으로 넘어가 트랙터가 집까지 갈아엎어버린다.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이래야 그 앞에 가서 엎드려 눈물도 흘리고 사정도 해보지. 은행이라는 기관은 사람이 바로 앞에서 둑어넘어가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고장 전체가 그런 지경이니, 어디서도 일거리라곤 없다. 하는 수 없이 한 가족, 두 가족 모두 서부로 떠나는 길로 들어선다. 서부에서 날아온 쪽지에는 목화를 따고 복숭아, 포도를 딸 일군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군들답게 그들은 거저로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일하겠다는 일념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서부로 떠나보지만, 미국을 조금씩 좀먹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그들을 점점 더 나락으로 이끈다. 어디서나 벼랑 끝에 몰린 그 가난한 사람들을 사기치고 등치는 장사꾼들이고, 거짓말로 순진한 농부들을 속이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고난의 연속일 뿐이다. 1백 명이 필요한 일군 품삯을 내리려고 마치 5천명이 필요한 것처럼 광고를 한다. 일자리가 필요한 그들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러니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단지 먹고살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뺏겼을 때 그 광경에 할말을 잃는다.
<<수많은 집안이 먼지 바람의 피해를 입고 트랙터에 밀려 자기 고향을 쫓겨났다. 집을 잃고 배가 고픈 사람들의 차가 길바닥에 깔렸다. 2만, 5만, 10만, 20만 명. 배가 고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험한 산을 넘어 밀려와서 개미떼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일자리를 찾아 뛰어다녔다. 쳐들기, 밀기, 끌기, 뜯기, 베기-밥만 나오면 무슨 일이라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좋았다. 어린것들이 배를 곯고 있다. 자기 집도 없다. 일자리를 찾아, 밥을 찾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토를 찾아 헐레벌떡 개미처럼 싸다녔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빛이 나는 부분은 바로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데 있다. 내가 먹을 것이 모자라는데도 더 없는 사람과 나누고 당장 아픈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이웃 사랑은 그렇게 빛이 난다. 게다가 모두의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고 내 한 몸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 끝이다 싶게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는데도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는다. 닥친 고난과 맞서 싸우고 자신이 가진 마지막 것까지 내놓는다. 아이를 사산하고 슬픔과 고통으로 둑음과 삶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서도 로쟈산은 퉁퉁 불은 그 젖을 둑어가는 사람에게 내민다. 마치 그 안에 인간의 최후 희망이 담겨있다는 듯이...
‘외눈깔’이라고 스스로를 비관하는 정비공에게 톰이 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약점이라고 알려져 있는 편견을 깨고 최고의 긍정적인 자산으로 만드는 비법이다. 일반 내공으로는 당연히 쉽게 안 되겠지만. 내 콤플렉스가 뭐더라...
<<“내가 한때 외다리 갈보를 하나 알게 됐는데, 그게 골목에서 한 판에 25센트쯤 받고 일을 치르는 줄 알아? 천만에. 남보다 20센트씩 더 받아내던걸. 그 말이 이렇거든. ‘외다리 여자를 데리고 몇 번 자 봤수? 처음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거든. 그럼 ‘당신 오늘 특제를 만났으니 50센트는 더 내야겠어요.’ 이러거든. 아닌게 아니라 손님들이 그렇게들 더 주거든. 그리고 모두들 나오면서 그날 재수가 좋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그 계집 말이 자기하고 놀면 누구나 재수가 붙는다는 거지.”>>
서부로 가는 길 위의 캠프 세상에 대한 이야기인데, 험한 상황에 처했어도 모두 같은 처지인지라, 나름의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간다. 인간이니까...
<<모든 가족은 어떤 권리와 어떤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천막 속의 비밀을 숨겨 두는 권리, 과거를 가슴속에 접어 두는 권리, 지껄이는 권리,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권리, 남의 도움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 받아들일 수 있는 권리, 도움을 줄 수 있는 권리, 안 줄 수 있는 권리, 아들이 구애할 수 있는 권리, 딸이 구애를 받을 수 있는 권리, 배고픈 자가 밥을 먹을 권리, 임신한 여자와 병자의 권리를 딴 어떤 권리보다 우선 취급할 권리.
모든 가족은 또한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이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권리가 망측한 것이며, 어떤 권리를 쳐부숴 버려야 할 것인지를. 개인의 비밀을 침해하는 권리, 천막촌이 잠들었는데 혼자 떠드는 권리, 유혹 혹은 강간의 권리, 간통과 절도와 살인의 권리, 이런 권리는 짓밟아 없앴다. 이런 권리를 살려두었다가는 단 하룻밤도 그 조그만 세계는 존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이지만, 이런 작품을 보면 우리네 질곡의 역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냥 고요한 강처럼 흐른 것이 아니다.
한쪽에선 배를 곯다 둑어가는데, 수확한 식량을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썩혀버린다.
분노의 포도 알은 이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짐승 앞에서 알알이 익어가지만, 평생을 땅만 판 농부들은 그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
<<강속에 내버린 감자를 건지러 사람들이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원들이 쫓아 보낸다. 덜거덕거리는 차를 몰고 사람들이 길에 쓰레기로 내던진 오렌지를 주우러 가 보면 오렌지더미에는 석유가 뿌려져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감자가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한다. 돼지가 죽는 소리도 듣는다. 도랑에서 돼지를 여러 마리 죽이고 그 위에다가 생석회를 뿌려 버리는 것이다. 산더미 같은 오렌지 더미가 무너지면서 질컥질컥 썩어 버리는 꼴을 본다.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로다 하는 표정, 배고픈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강해진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분노’라는 포도가 자라나서 제철을 찾아 알알이 소담하게 무르익고 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