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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보통? 여기선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나 책을 읽고 나면 드는 느낌이 있다. 얼마나 내 머리로 이해하느냐, 얼마나 내 온 마음, 온 몸으로 깨닫느냐 그리고 얼마나 내가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간혹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스토리나 인간의 심리, 상황 등도 있고, 또 간혹 머리로는 이해했으되 내가 온몸으로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생활에서도 각자 나름 이해한 바대로 실천하게 될 때가 있다.
보통(이 책의 저자)은 이 책을 통해서 내게 그런 느낌을 줬다. 읽어가는 내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고 머리로만이 아니고 나의 감성과 온 마음으로 깨닫고 공감했다. 물론 실천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을 어떻게,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할지 확신이 섰다고나 할까... 그만큼 이 책이 끌어내는 공감도 크지만, 또한 쉽게, 재밌게 써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재밌게 다 읽고 난 지금, 그런 기분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의 철학을 갖고 세상을 산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철학자는 위대하고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도 자신의 인생의 철학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난 어느 철학자보다 내 인생에 대한 길을 더 잘 보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보통을 처음 접한 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원제, On love)로였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고 거기서 겪는 심리와 그 발전 단계를 너무 무겁지 않게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연애의 그 여러 가지 상황과 관계를 수학의 여느 방정식처럼 풀어내고 분석하는 그 솜씨에 푹 빠져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감했었다. 물론 연애는 그 결론이 방정식처럼 하나의 해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생사, 세상사 뭐, 꼭 다 같은 결론을 낼 필요가 있나. 풀이하는 방식을 이해했으면 이제 각자 나름대로 풀어가는 것이겠지. 아무튼 이 작품은 기가 막힌 철학적 연애방정식이었다.
보통(이제 보니 내가 ‘보통’을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닐세...) 철학자들의 글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보거나 철학교수들의 명강의, 또는 그 철학을 풀이해 놓은 해설서 등등을 읽으면 도대체 뭔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보통이고, 어쩌다 하나 이해하면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개념으로서(형이하학에 살면서 형이상학을 논하듯이) 자리잡고 우아를 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야말로 철학이 인간에게 주는 위안을 시대를 초월한 철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사상을 통해서 그 과정을 설명하고 논증했다.
왜 하필 제목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인가>? 원제는 (철학의 위안)인데 말이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 괴테의 작품을 등에 업고 입신양명하려고 했는가? 괴테의 베르테르는 젊음이 주는 열병, 사랑이라는 테마로 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세상에 발뿐 아니라 온몸을 푹 담그고 사는 한 젊은 철학자가 같은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선물인가? 결국 이 책에서 사랑이나 연애에서 발생되는 고난이나 슬픔에 대한 위안은 몇 쪽 되지 않는다. 같은 제목을 단 장도 몇 쪽에 불과하고. 지금껏 제목을 갖고 주절주절한 것은 결국 제목이 책의 원제나 내용과 상관은 있지만 너무 축소한 듯한 느낌이어서 잘못 택해졌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 여기서 새삼 제목에 대한 태클을 걸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것 일뿐이지.
저자는 이 책에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철학자들과 그들의 삶, 사상을 통해서 그들이 진정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했는지, 그 동안 어떻게 그것들이 왜곡되거나 축소되었었는지 쉽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고 진정 그들의 사상이 우리 실생활에 어떤 식으로 파고들 수 있는지, 어떤 위안을 줄 수 있는지 하는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선 21세기를 아옹다옹 살아가는, 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갖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부각시키고 여러 철학자들의 예를 들어 설명과 분석 그리고 결론을 제시한다.
1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들어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을 얘기한다. 저자는 “타인과 대화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라고 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그 나라가 어디든간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드러내놓고 진실을 왜곡하거나 인기를 얻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못하겠지만, 타인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흔히 말하듯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또한 사회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어느 한 나라에서, 어느 한 세대에, 상식이나 신념, ‘진리’로 통하는 개념들에 대한 논리적인 검증을 요구한다. 철학적 사색을 통하지 않고도 진실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각자의 의견이 장래 부딪히게 될지도 모르는 반대 입장들을 사전에 논리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어떤 반대에 봉착했을 때”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반대하는지 그 이유가 얼마나 타당하고 훌륭한가 하는 데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반대에 얼마만큼 중요성을 부여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하에서 둑었다. 즉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의 이상한 몰골을 보고 또 그 당시 사회현상에 기인해 그가 유죄라고 판결했다. 그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를 판단할 전문적인 지식은 없는 상태로 제한된 지식과 개인적인 이해득실을 갖고 소크라테스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한 진실을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실과 동의어로 보는 것은, 인기 없음을 잘못과 동의어로 믿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짓일 것이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다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2장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예를 들어 ‘충분한 돈을 갖기 못한 데 대한 위안’에 대해 얘기한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쾌락주의자’라고 알려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대해 약간의 수정을 할 필요가 생긴다. 그가 말한 쾌락은 인생에 대한 이해이며 타인을 돕고자 하는 것이었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것은 단지 끝간데 모르고 치닫는 음탕한 성적 쾌감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게 되는 ‘감각적 쾌락’만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한 쾌락주의는 저자에 따르면 ‘유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한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고 한 것만 보아도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그의 철학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진정 에피쿠로스는 삶 속에서도 소박하고 진솔했다. 그가 말한 가장 큰 쾌락은 뜻밖에도 ‘우정’이었다.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그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다. 이상적인 부모들처럼,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우정 다음으로는 ‘검소한 생활방식’을 수용하는 법을 역설하면서 가진 것이 적어도 불쾌한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유’에 대한 즐거움을 얘기했다. 친구들과 함께 소박하게 먹고 마시고 서로에게 경제적으로 입증해보이지 않아도 되는 삶인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물질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더라도 자신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정과 자유, 그리고 세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사색’이었다: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큰 성(城)과 텐트의 구별은 좀 아니다 싶었지만, (그건 아니잖아~! 그건 아니잖아~! 집도 절도 없는데 텐트에서 사는 게 좋을까. 큰 성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비바람 가리는 집이 한 채라도 있어야 어쩌다 하룻밤 텐트에서 자는 것도 좋지, 거기 살라고 해보라고.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싫겠지... 결국 나중에 오두막 한 채는 덧붙여졌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물질만을 쫓으라는 것도 부유한 걸 거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친구와 자유, 사색만 있다면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세네카의 예를 들어 ‘좌절에 대한 위안’을 얘기한다.
철학자는 열정적인 광인이 되기 전의 어린 네로를 가르치고, 끌어안으며 절대 둑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네로의 손에 결국 소크라테스보다 더 초연한 둑음을 맞는다. 여기서 보통이 설명하는 세네카의 철학은 정신과 육체 모두 약하디 약한 인간인 이상 자연이 주는 재해나 아무에게나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는 운명의 여신을 이해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나 상황이라면 체념하라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만한 분노, 충격, 불공평, 근심, 조롱을 설명하고, 체념의 기술에 대해 서술한다.
- 매일 매일 우리는 흔히 분노하고 화를 낸다. 하지만 나중에 혼자 조용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 대다수이다.
-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일 일어난다. 다리가 끊기기도 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절대 안전이라고 믿었던 빌딩까지도 테러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서 그렇지, 어차피 인간에게 둑음이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세네카의 명상에서는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들에 묻혀 살고 있네.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고,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의 아이를 낳는 법이야.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라고 말한다.
- 선하게 살면 보상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은 도덕적인 기준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까. 불공평하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더라도 ‘운명의 여신은 장난을 하고 절대로 도덕적인 재판관은 아닌’ 것이다.
- 근심이란 것은 어떤 일이 있을 때, 최선의 결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과 최악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의 불안한 상태라고 한다. 원래 우리가 금욕주의라고 알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빈곤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가난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경멸할 것도 아니라고 권한다. 비교해보면, “현명한 사람은 친구 없이 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친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 생물체든 비생물체든 우리에게 판단착오를 불러오는 것은 ‘정신의 나약함’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즉 현실을 제대로 보고 분석, 파악하기보다는 ‘무조건 모욕으로 판단하는 성향’이며 ‘자신이 조롱당할 만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체념의 기술’에서 현명한 사람은 예를 들면 “자신의 여행가방이 운송 도중에 분실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몇 초가 지나면 체념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차피 낡은 가방이었기 때문에 더 좋은, 예쁜 가방을 사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경우다~!) 인간은 정확하게 그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만 한다면 “각자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런 숙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독특한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4장에서는 몽테뉴의 예를 들어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을 말한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부적절함, 수용하기 어려운 점을 이해해야 하는 점을 말하고자 보통은 몽테뉴를 예로 든다.
- 성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부분에서는 인간의 육체이기에 참 싫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방귀나 트림, 또는 성적 욕망 등등 그로 인한 괴로움까지도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지 않고 안달하지 말고 전쟁도 하지 말고 그렇게 무서운 것도 굴욕적인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성행위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경우, 우리의 육체적 자아와 화해하도록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이기에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 문화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우리는 일단 누군가에게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 이유는 그 말 속에 알게 모르게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을 집어넣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한 한 곳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지역적으로 한정된 ‘정상’에 대한 관념을 갖고 외부인, 외부 지역을 대하다 보면 생기는 문제들인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정상, 비정상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했기에 그것을 선악과 동일시해, 자신과 다른 모습, 다른 종교를 가졌단 이유로 수많은 인디언들을 둑였던 것이다. 편견의 국경을 뛰어넘는데 대한 사색,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관습의 다양성에 자신을 노출시키라는 충고까지 다양한 방법들이 기술된다. 그 가운데 친구와 글쓰기가 좋은 방법 중의 하나로 제시된다.
- 지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세상의 지식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이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해서 절망할 것은 없다. 지식은 단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학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학과 라틴어를 모른다고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면 그런 지혜가 더 가치 있는 것인데, 왜 “우리는 오성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공허하게 비워놓고서 오로지 기억을 채우기 위해 분투하는” 것일까. 현명해지려는 노력은 독특한 패션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돌보면서 자신을 지적 삶을 추구할 만한 훌륭한 존재로 여긴다면, 몽테뉴가 암시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대의 훌륭한 책에 담긴 사상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5장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예를 들어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을 얘기한다.
인간은 일종의 오류이며 여섯 살에 절망에 빠지고 인생이 덧없고 확실치 않아 쉬이 사라지기 때문에 굳이 여자를 만날 어려움을 감내할 필요도 없고, 인생의 즐거움을 얻으려면 이 세상에 가치를 부여하기를 충고하는 괴테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인생 자체에는 고유의 값어치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인생은 오직 궁핍과 환상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면서도 둑음 을 너무나 두려워해 자신의 안전과 건강에는 극도로 신경썼다고 한다.
‘생에 대한 의지’,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고 번식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로 정의했다. 보통은 사랑에 거부당했을 때 위안을 받는 법, 우리를 거부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라고 한다. 사랑의 환상에 빠진 사람은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그 환상은 금방 사라지고 이제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삶의 고난과 고통은 삶에서 얻는 과실이나 이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혹하다.
즉 쇼펜하우어는 일부러 우리를 우울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통함을 불러일으키는 헛된 기대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두더지처럼 땅만 파고 사는 운명으로 보면 인간도 두더지와 다를 바가 없지만, 인간에겐 예술과 철학이 있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공포와 고독까지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그 고통을 지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 혼자서만 고통받고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식’을 아는 것으로부터라고 한다.” 수많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을 아는 순간부터 그 고통은 통증이 누그러지고 객관성을 띠면서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땅을 파는 사이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눈물을 지식으로 바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니체의 예를 들어 ‘곤경에 대한 위안’을 말한다.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한 불운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 불운을 대하는 데 있어서 방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고통을 피할 것이냐 아니면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하겠느냐’로 되묻는다. 산을 예로 들어 평범한 삶인 제일 아래에서 고통이라는 등성을 지나 결국 완성이라는 산꼭대기 정상에 이르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소리로 말을 거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까. 니체에게 있어 철학은 얼음으로 뒤덮인 고산에서 자발적으로 사는 것이었다.’
누구의 삶이나 삶은 힘겹고 어렵다. 하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정신적 공황 상태가 될 수도 있고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불공평이나 부러움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인간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선한 감정으로 승화시키느냐에 삶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미움과 사기, 탐욕 그리고 지배욕조차도 삶의 윤활유 역할이 된다. 결국 자신이 처한 곤경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곤경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곤경을 피하려들지 말고 그것을 세련되게 활용하라고 말했다. 열정과 욕망이 지닌 어두운 힘을 두려워하고 피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이가 아프다고 모조리 뽑아버리는 것과 뭐가 다르리.
처절한 고독과 무명, 가난 그리고 나쁜 건강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니체는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투쟁했다. 곤경이 성취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눈에 고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비치는 것들을 끝까지 소중하게 여겼다. 즉,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애썼던 것이다.
흔히 초인이라고 번역되는 위버멘쉬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도 정열, 사고보다도 육체를 존중할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쾌락과 불쾌감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그만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 가장 완성적인 인생 설계는 고통과 분리할 수는 없다.
보통이 말하는 철학은 일상을 소재로 현실로 잡아낸 철학이다. 같은 철학 사상이라도 보통의 지성 아래에서는, 그의 펜 아래에서는 더 쉽고 더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는 철학이다. 마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앞에 펼치듯이 보통은 우리 앞에 적절하고 평이한 철학을 펼쳐보인다. 독자들은 어렵게 머리 굴릴 필요도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훨씬 멋진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인생사, 세상사를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이 책의 이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마음에 새기고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느끼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살게 되어있는 것이다. 가끔은 그 세상이 아무리 태클로 가득 차 보여도... 세상아, 어디 한 번 더 덤벼봐~! 덤벼보라구~!
(리뷰가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제가 2006년도에 89권을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