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은 예전에 발췌 독서를 했던 책이었는데, 이번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정독하고 싶어서 꺼내 읽었다.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소설 및 전기를 썼는데, 여느 독일어권 작가의 작품에 비해 문체도 섬세하고 애정이 느껴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작가다. 쇼펜하우어도 <문장론>에서 비판했듯이, 독일어 작품은 유난히 어렵게 느껴진다. 늘 그랬기에 웬만한 독일어 작품은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도 굳이 옮긴이 탓을 하거나, 내가 독일어를 했다면 더 잘 이해했을 텐데... 따위의 섣부른 자만은 안 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츠바이크의 문장은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도 느껴질 정도이고, 마치 내가 그 글을 쓴 작가인양 공감하게 된다.

우연과 광기로 점철된 역사 가운데에서 츠바이크는 이 작품집을 통해 모두 12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무척 흥미롭고 놀라울 정도의 재미를 간직하고 있다. 야사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첫 이야기에서는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건달 발보아가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태평양을 발견하며 한 순간 건달에서 영웅으로, 영웅에서 처형당하는 죄수 신세로 전락하는지, 짧고 굵은 인생을 산 한 인간의 인생무상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의 잔인한 무하마드가 어떻게 기독교의 중심부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그 어려움과 야망, 그리고 어떤 전략의 전쟁을 치렀는지 피 튀기는 현장이 담겨있다. 세 번째 이야기서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뇌졸중까지도 극복한 헨델의 이야기가 아리아가 되어 퍼지고, 네 번째 이야기는 하룻밤 만에 프랑스 국가를 작곡한 무명의 루제에 대한 이야기로 프랑스가 왜,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기까지 한 가사를 지닌 국가를 지니게 되었는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고지식한 부하 때문에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이야기로, 당시 전쟁의 상황과 한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 놓는지 볼 수 있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열아홉 소녀를 사랑한 일흔넷의 괴테 이야기가 젊은 베르테르의 열정과 다름없이 펼쳐진다.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는 농사나 지으려던 수터가 황금향 엘도라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삶의 터전도 잃고 평생을 고난과 가난과 싸우며 살게 된 이야기가 안타깝게 전개되고, 여덟 번째 이야기에서는 사형 직전 목숨을 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시적으로 표현되고, 아홉 번째 이야기에서는 대서양에 해저 케이블을 설치한 사이러스 필드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초월해 교류하고자 하는 야망과 더불어 펼쳐진다. 열 번째 이야기에서는 악처 때문에 위인이 되었던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미완성 드라마로 엮어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간다. 열한 번째 이야기에서는 남극을 탐험하다 얼어둑은 비운의 탐험대장 스콧의 이야기가 가슴을 시리게 하고 열두 번째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레닌이 어떤 상황을 거쳐 갔는지, 그 기차를 못 탔더라면 어떻게 역사가 바뀌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이야기가 숨 가쁘게 펼쳐진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어떤 광기, 어떤 우연을 거쳐 완성되었는지 읽다보면 마치 한편의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과 행동, 사상들이 나왔는지 알게 되는 것도 야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악행을 행하는 자는 악행을 당하는 자보다 영혼으로 보면 더욱 불행한 법이라네. 나는 그러한 자를 불쌍하게 여길 뿐 미워하지는 않아.” 악처에게 시달리며 온화한 글과 사상으로 국민을 위로하고 무지를 깨치던 톨스토이가 말뿐으로만 아니고 ‘피 흘리는 혁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압제를 이기기 위한 방편으로 증오와 폭력을 내세우는 젊은 혈기들에게 톨스토이가 하는 말은 단호하기만 하다. “신념을 위해서 살인하는 것보다 신념을 위해서 고통 받는 쪽이 백배나 더 나은” 것이라고 말이다.    

츠바이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그의 섬세한 감정과 애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읽는 내내 그와 함께 때로 탄식을, 때로는 한숨을 또 때로는 열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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