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의 그림책 - 오늘의 눈으로 읽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단원이 좋아서, 그의 그림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틈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 내 자신이 기특할 정도다. 예전부터 우리 옛 그림들이 좋아서 화집을 모으고 싶었었다.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외국 화가들의 그림은 그 멀리 루브르까지, 오르쉐 미술관까지 가서 보고 왔으면서 우리 화가들의 그림은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실제로 본 게 거의 없을 정도다. 이제나마 이렇게 책으로 단원의 그림이라도 한껏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사실 최근에도 <바람의 화원>을 읽으면서 신윤복의 그림을 좀 자세히 보고 싶어졌었다. 특히 원본들을…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그림들이 대부분 개인소장이라 그런지 전혀 전시를 하지 않고 있다. 화려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만큼이나 그 그림들을 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건만…

이 책에는 27점의 단원 그림이 크게 또는/그리고 세세하게 “그림 까막눈”의 설명이 현대적(!)이고 유머스럽게 함께 들어있다. 그렇다고 가볍게 여기진 마시라. 절대 가볍지 않다. 내 눈으로만 봤다면 아무리 세세하게 봤어도 그냥 스치고 지나쳤을 것들도 글쓴이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까막눈이 쓴 책치곤 꽤(!) 학구적인 비교 분석도 들어있다. 단원의 그림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불가능할 작업이었을 것이다.

단원의 그림을 이렇게 많이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좋은데, 글쓴이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대로 때론 신윤복의 그림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론 다른 풍속화가들의 그림이 등장해 그 비교하는 재미까지 쏠쏠하다. 비슷한 얼굴이나 표정, 태도 등도 여기저기에서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또한 단원의 당시 생활이나 생각 등도 덤으로 엿볼 수 있어 좋다. 그토록 비난받는 시대, 조선이건만, 단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민초들의 고생이, 삶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단원의 그림 속에는 힘든 삶 속에서도 일상의 행복이 묻어나고 여유가 넘친다. 또한 풍자로 세상을 살짝 비웃으면서도 다 함께 웃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 단원의 그림을 보면서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무동>이나 <씨름> 등 몇 편의 그림에서 손을 틀리게 그린 건, 아무리 봐도 실수로 보기 어렵다. 그토록 세세하고 그토록 그림에 통달한 화가가 실수로 손을 틀리게 그렸을 것 같지 않다. 단원의 그림에서 보듯이 그의 풍속화엔 유머와 풍자가 넘친다. 가끔 그런 식으로 손을 바꿔 그림으로써, 반항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불만이나 생각을 나타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좀 놀려주려고 그랬던지 말이다. 즉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는 데 내기를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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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어떤 오후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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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에 이 책을 받자마자 벌어진 일 때문에 지금도 괜히 웃음이 난다.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었는데 잠깐 서류를 주러 왔던 수이씨가 책을 펼쳐 보더니 정말 그야말로, “헉!” 했다. 뭣 때문인가 했더니 작가 사진 때문이었다. 가운데 가리마를 한 긴 곱슬머리 때문이었을 게다. 근엄한 표정으로 언뜻 남미나 스페인계의 얼굴과 비슷하단 느낌을 받았다.

정영문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의외의 독특한 문체 때문에 처음엔 무척 신선했고 나중엔 좀 지루하단 느낌을 받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문장들이 마치 인간 심리의 단절과 그 이어짐을 보여주는 듯했고, 평소에 보던 문장들보다는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정도 앞질러 달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보통은 어떤 상황이나 심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이랬다’ ‘저랬다’ 등에서 끝나지 않는가. 그런데 정영문의 문장은 “이랬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건 아니었다. 그건 사실 요랬다.” 등등 마치 상황이나 심리를 좀 더 멀리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브라운 부인>과 <목신의 어떤 오후> 등 모두 열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마지막 세편은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라는 같은 제목에 서로 다른 소제목을 달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마지막 세 작품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동물들의 권태에 내 권태가 합쳐지듯이 질질 끌며 간신히 읽었다.

나머지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인간들의 ‘표현되지 않는 개인성’을 나타내는 듯 싶었다. 즉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 있어도 대화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고 고립성이 느껴진 것이다. 그건 고독이나 외로움, 소외 그런 것과는 다르게 그냥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내면성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내면성은 모두 각 개인에게 고유한 개인성이고 그 개인성은 다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았다.

배경은 지루하리만치 고요하고 목가적이고 자연적이다. 그런 자연 속에 있는 인간 개개인도 하나의 배경처럼 처리되는 것이 독특한 문체와 맞먹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글이나 그가 그리는 세상이 우울하거나 절망적이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 또 다른 독특한 점이었다. 무의미한 일상, 무의미한 생각, 무의미한 행위가 있을지언정 내용은 무의미하지 않고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과 세상의 느낌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닭 울음소리에 차츰 정신이 든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그 소리를 들으며, 닭은 하루에도 여러 번 울지만 닭 울음소리로는 새벽에 우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닭 스스로도 밤사이 자고 난 뒤 새벽에 처음 우는 울음을 최고로 여기며 그것에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닭으로서는 새벽에 다른 닭이 자신보다 먼저 우는 것은 무척 김이 빠지는 일이며, 또한 다른 닭이 자신보다 더 큰 소리로 우는 것은 무척 맥이 빠지는 일일 수도 있다는, 다소 얼빠진 생각을, 어떤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어 그것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했다. 새벽에 잠에서 깨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약간 우습게 여겨졌고, 그래서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나는 계속해서 누운 채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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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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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한국문학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작년에 은희경 황석영 김연수 정이현 등등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나와 버렸기 때문에 올해는 저들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던 중 김연수의 산문집이 나왔다. 여행산문집이라지만 여행 얘기 반, 문학 얘기 반이 알찬 알곡처럼 들어있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앞부분의 여행 얘기가 더 흥미로웠다. 그가 여행을 하면서 보는 세상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점점 뒷부분으로 갈수록 문학적인 얘기가 많아져서 여행기라기보다는 문학 사색이 더 맞을 것 같다. 물론 작가의 세계관이나 문학관 등을 소설이라는 1백퍼센트 창작이 아닌 좀 더 실제적인 얘기를 직접 엿볼 수 있어서 작가 김연수의 생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그의 작품이 간혹 읽기 어렵고 한번 읽어선 뜻도 제대로 새길 수 없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이 산문집은 작가 김연수의 개인에 더 초점을 맞춰 그를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여행이란 일단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다. 내가 속해있던 곳에서 나와 금을 넘어가는 것, 그래서 새로운 곳엘 간다는 뜻이다. 김연수는 여행을 하면서 겪은 그의 일상에 대한 얘기에서도 문학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아버지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에서 그는 아버지의 리얼리티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자신의 리얼리티 사이의 이야기를 한다.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일단 그 ‘다른 곳’에 다녀오자, 잊었던 육체의 기억이 완전히 복원됐다. 아버지는 일본노래를 들었고 일본책을 읽기 시작했다. 틈나는 대로 일본차를 마셨으며 우메보시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 갑자기 아버지가 도끼로 이마까라 상처럼 보인다면 그걸 환영할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의 육체는 더 이상 국경선 안쪽의 리얼리티를 인지할 수 없게 됐다. 아버지의 리얼리티와 나의 리얼리티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다른 리얼리티는 작가들의 서로 다른 인식의 지평으로 얘기를 발전시킨다. 작가의 세계관 속에는 그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지평이 고스란히 담기는데, 그 지평에는 인식의 지평도 있고, 현실의 지평도 있고 지리적 지평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김사량과 이광수 등의 얘기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작가라면 본질적으로 그 어떤 지평에도 속하지 않고 그 지평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는 문학’, 이런 소설을 꿈꾸지 않겠는가 하고.

‘또오꾜오에서 이상이 과연 무엇에 실망했는지를 찾기 위해 헤매던 나는 또오꾜오 칸다구 진보쬬오 3초메 101의 4번지 앞까지 이르렀다. (...) 이상의 임종을 지켜본 김소운에 따르면 “진보초 뒷골목, 햇살이 들지 않는 좁은 이층 방”이다. 그 안에서 오들오들 떨어대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그 어두운 방이란 바로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 천당과 지옥의 접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환상의 공간이 바로 내가 꿈꾸는 국경이다.’

향년 28세에 덧없이, 그것도 일본에서 둑어버린 이상을 찾아 일본으로 갔던 여행에서 작가가 느낀 점이다.    

역과 휴게소 그리고 공항은 언제라도 작가를 매혹시킬 세 개의 공간이라고 한다. 역마살로 인해 숱하게 다닌 곳들, 지금도 여전히 다니는 곳들, 그곳에서 작가처럼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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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만찬 - 공선옥 음식 산문집
공선옥 지음 / 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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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남 곡성, 나는 그곳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부터 고소하고 찰진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는 건 어찌된 일일까. 어쩌면 그건 내가 이미 공선옥의 글을 알고 전라도 음식의 유명세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그런 소릴 한다. 전라도에서는 아무데나 들어가서 음식을 먹어도 맛있고 경상도에서는 맛있다고 사람들이 데려간 곳도 맛이 별로라고. (경상도 사람들아, 용서하시라. 어쩌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전라도로 놀러갈 땐 한번도 도시락을 싸거나 먹을거리를 준비해가지 않는다.

공선옥이 우리에게 차려주는 행복한 만찬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어찌 보면 미쳐가는 요즘 세상의 먹을거리에 대한 일침이자 외침이고 또 어찌 보면 가난했던 그 시절에 먹었던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이다. 먹을 것도 많지 않았고 늘 허기졌기에 그것들이 더 맛났던 걸까. 그것들은 다만 과거의 전유물이었을까. 지금은 먹을 것도 많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늘었다. 하지만 우린 왜 더 해피하지 않은 걸까. 이 글을 읽으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물에 만 찬밥을 먹어도 해피했던 시절이 우리 누구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한 그릇의 쌀밥 속에서 나는 찔레꽃 향기를 맡는다. 쌀밥 속에 들어 있는 게 어디 향기뿐인가. 쌀밥을 보면서 나는 뻐꾸기 소리도 듣는다. 내가 밥을 먹으면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소리도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온다. 만날 여름만 계속되는 베트남 쌀보다 우리나라 쌀이 맛있는 이유는 아마 봄의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소리, 여름의 매미 소리와 칡꽃 향기, 가을의 국화꽃 향기와 바람 냄새, 쓰르라미 소리들이 모두 그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엔 그 옛날 우리 부모님의, 우리 시골의 모든 세월이, 시절이 녹아 있다. 고구마 밥에도 그 이름도 예쁜 보리밥에도 백날 묵어도 탈나지 않는 무시에도 가장 마음이 정갈해지는 가죽나무 잎 부각이 놓인 밥상에도 무욕의 음식 대사리탕에도 시커먼 토란잎 무침에도 짜고 짜진 시래기 된장국에도 세상에 쓴 것도 맛있다는 걸 제대로 알려준 머구에도 ‘꽃밭에 방애잎’에도 정다운 님에게 주고픈 솔들에도 밀가루 반죽을 도르르 말아 총총 썰어 끓인 돈부죽에도 열매도 맛있지만 잎도 맛있는 호박에도 달래 냉이 씀바귀 등의 봄나물에도 어린 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추어탕 메밀 딱주에도…

그게 바로 공선옥이 우리에게 차려주는 행복한 만찬이다. 공선옥의 펜 아래에 펼쳐지는 맛난 음식들이 맛나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오는 음식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차곡차곡 떠오르는 추억이고 향수이다. 그 시절,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았다. 그 시절, 먹을거리가 없었지만 먹을거리가 없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그런 집에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살아서 우리 집 마당이 저리도 풍성한 것이로구나, 살아 있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눈물 나고, 가슴 뻐근하고 그런 것이로구나. 그리하여 나는 마당의 풍경들을 앞으로 보고, 옆으로 보고, 뒤돌아보고, 그러다가 다시 훔쳐보듯이 보고, 또 보고 하였던 것이다.’

고소하고 찰진 음식과 이렇게 따스하고 자연스러운 글에 또한 잔잔한 공선옥식 유머는 덤이다. 읽다 보면 눈가가 촉촉해지고 입안에 침이 고이는 동시에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도 공선옥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 호박꽃이 꽃이지 그럼 풀이냐? 나무냐? 좋은 일 생길 때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호박씨 깐다느니, 호박꽃도 꽃이냐느니 한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앞으로 호박은 먹을 생각도 말아야 한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인데 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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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8-06-16 11: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책은... 참 좋아요. ^^*
예전엔 서재에 들어오면 친구들 글이 표시되어 있어서
가보기 좋았는데 이렇게 바뀌고 나서는
보기가 쉽지 않아서 저도 많이 안 돌아다니네요.
자주 뵈면 좋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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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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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재뿐인 세상이다. 모든 게 다 타버렸다. 태양은 모습을 감춰버렸고 검은 비가 내리고 검은 눈이 내린다. 길가엔 말라빠진 시체가 굴러다니고 집들과 건물은 온통 텅텅 빈 채로 쓰레기만 난무하다. 도시와 시골 모두 그런 잔해뿐이다. 남자와 아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다. 먹을 것은 다 떨어져가고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가는 둘은 그런 폐허가 된 길 위에서 추위에 떨며 간신히 걸음을 옮긴다. 또한 길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약탈자나 살인자의 공포에 떨면서.

그렇다. 그들은 망해버린 세상의 생존자였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시적인 생존자였다. 실낱같은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면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착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그들은 불을 운반하는 생존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세상에서 자신들은 좋은 사람들이냐고, 그래서 굶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지 않을 거냐고 아빠에게 다짐을 받는 아이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늘 그런 잿빛 세상만을 봤지만 선(善)을 향한 마음만은 한결같다. 어떤 순간이 닥치더라도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선을 향한 마음은 어쩌면 이 세상이 망해도 살아남은 어떤 것이 아닐까. 그게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개인이나 국가가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가고, 물질에 대한 끝도 없는 욕심 그리고 세상 망하는 줄 모르고 펑펑 써대는 자원과 늘어나는 쓰레기에 파괴되는 자연과 환경 등등 언젠가 이 세상은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망해버리는 게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가야만 하는 그 길, 배고픔과 추위에 떨면서 가는 그 길 위엔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커 보였다. 아니 온통 절망 투성이 길이었다.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우린 죽나요?
언젠가는 죽지. 지금은 아니지만.
계속 남쪽으로 가나요?
응.
따뜻한 곳으로요?
응.
알았어요.
뭘 알았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알았다고요.
자라.
알았어요.
불 끌게.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한참 뒤 어둠 속에서,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알았어요.’

남자와 아이는 서로를 보듬으면서 그렇게 남쪽으로 향한 길을 간다.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남자가 오히려 세상에 대해 경계를 하고 행복한 건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걸로 아는 아이가 오히려 친구를 찾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사는 목적이 아닐까. 세상이 망했어도 말이다.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
우리가 사는 거하고 비슷해요.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안 그렇고.
네. 아빠 이야기는 안 그래요.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그래요.
넌 그게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괜찮죠, 뭐.’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망하겠구나, 이 세상…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망치고 있구나… 미래에 올, 불을 운반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남자가 소년에게 하는 말에서, 그래도 이 세상에 선이 살아있다고, 영원히 선이 살아있을 거라고, 그리고 선이 이길 거라고 우겨본다.

‘너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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