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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달을 먹다>의 서사와 글맛, 말맛에 취해 한 달 이상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활자중독이라 글만 보면 무조건 아무 책이나 읽어대던 시절이었는데도 그 책을, 그 책은 차마 그냥 흘려보낼 수 없어서 읽고 읽고 또 읽었었다. 인간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까지 내 맘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었다.
그리고 작가의 독서로 인한 생각과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사고가 들어있는 산문집엔 작가로서의 불안이 그대로, 날 것 그대로 들어있어 감히 안쓰러움을 느꼈고 작품보다는 김진규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작가가 말했듯이 작가의 양지를 담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번 느낀 것은 정독은 개인의 성향일 수도 있지만 책 자체가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과 함께 몇 달을 꼬박 보냈다. 정말 행복한 몇 달을…… 침대 맡에 놓고 두 번을 꼬박 읽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샀지만 금방 읽을 수는 없었다. 정말 맛난 음식을 아끼다가 썩혀 버릴 것처럼 난 이 책을 대했다. 그러다 드디어 심호흡을 하고 책을 잡았다. 한 번은 스토리, 또 한 번은 문장 맛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젠 아무데나 펴서 다시 그 맛을 음미한다. 그렇게 읽고도 차마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책이 내겐 바로 김진규의 책들이다.
왜냐고? 그게 단지 작가와 독자간의 궁합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안다. 그건 바로 이 책이 갖고 있는 힘 때문이다. 어쩌면 그 힘을 알아보는 게 내 취향인지도 모르겠지만.
인물들과 온갖 삶의 서사를 보여주던 전작과는 달리 이 책의 스토리는 단순, 복잡하다. 공생원과 그 마나님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스토리는 단순하되 그에 얽히는 인물들과 그들의 삶, 운명 등으로 인해 복잡하게 보여진다. 단순, 소심해 보이는, 사회에서도 그리 성공도 못한 어느 정도는 찌질한 공생원,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부유하지만 풍만한 풍채에 왈가닥 같은 성격으로 겨우 시집 온 공생원 마나님의 사랑은 혼인한지 이십 년이 넘게 안 생기던 아이를 마나님이 임신함으로써 위기에 놓인다. 알다시피 조선시대의 사랑이 어디 우리가 요즘 말하는 사랑이던가. 그건 차원이 다른 애정을 말함이었다.
여러 가지로 소심할 수밖에 없는 공생원은 공처가이면서 좀생이지만 체면은 차릴 줄 아는 인물이다. 사랑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은 탐을 안 내지만 ‘자기 것’을 지키려는 인물이다. 맘에 들건 안 들건. 그에 반해 풍채가 큰 만큼이나 손도 큰 마나님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런 저런 일, 이런 저런 인물들하고 얽힌다. 이에 함께 얽히고설키는 용의자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공생원의 마음, 이를 안 보는 듯 지켜보고 있었던 마나님……
이 작품은 우리 인간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자 하지만 결국엔 감정적인 것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속엣말 한번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는 공생원이 안쓰럽고, 슬슬 떠보겠답시고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는 걸 보면서 함께 오금이 저린 건 어쩌면 내 안에도 공생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 복잡한 스토리와 함께 공감을 끌어냈던 건 각각의 인물들의 캐릭터와 심리였지만 날 더욱더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은 건, 바로 아름다운 한국말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주옥 같은 말들을 찾아내는 건지, 단순히 써먹어야겠다나 알려주겠다 차원을 지나 진정 문장 속에서 녹아드는 그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 안에 안겼다. 그 말맛, 글맛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맛이다. 김진규, 최고다.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에 공생원에게 던진 마나님의 한 마디, 정말 최고 중의 최고다~!
“당신 자식이 아닙니다.”